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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드록바/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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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첼시 FC 이전

어린 시절은 코트디부아르에서 지냈으며 삼촌[1]을 따라 프랑스로 가고 싶다는 드록바의 의지에, 그를 프랑스에 있는 삼촌댁으로 보낸다. 삼촌은 드록바를 양육하는 대신, 그에게 대학을 갈 것을 말했다. 그러나 드록바는 축구가 더 좋았고, 그의 삼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드록바는 삼촌에게 대학 합격증을 제시했고, 그제서야 그의 삼촌은 그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진심이란 걸 믿고 축구를 하도록 허락했다. 이후 르망, 갱강, 마르세유에서 활약하였다.

드록바는 프랑스 리그 앙 소속의 갱강에서 활약한 후[2] 마르세유로 이적한다. 그는 그해 유럽 대항전에서만 11골을 몰아넣고 마르세유를 UEFA컵 결승전까지 올려놓는 등 맹활약을 펼쳐 당시 첼시 감독이던 무리뉴가 영입해 첼시로 이적했다.

2. 첼시 FC

첼시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팀내 위상으로 따지면 아스날앙리, 맨시티아구에로가 대접받는것과 같다.[3]
파일:CDROG.jpg
381경기 164골
첼시 역대 최다 득점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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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하이 선화

2012년 6월 20일, 상하이 선화 이적을 공식발표했다. 계약기간은 2014년 6월까지.

그런데 2012년 9월 2일, 상하이 선화와의 계악을 해지했다는 기사가 떴다. 하지만 드록바의 대변인은 이를 부인했으며, 이후 9월 15일 경기에 출전해 찌라시의 낚시였음이 밝혀졌다.

2012년 11월 FIFA는 드록바의 첼시 단기 임대 요청을 기각했다. 드록바는 겨울철 중국 리그가 비시즌인만큼 1월 아프리카네이션스컵을 대비해 몸 상태와 실전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잠시 첼시에서 뛰려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때문인지 2013 아프리카네이션스컵에서 코트디부아르는 우승은 커녕 8강에서 나이지리아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했고 드록바는 다시 한번 아프리카네이션스컵 우승을 구경해야했다.

4. 갈라타사라이 SK

12-13시즌 겨울 이적 시장에서 반년만에 갈라타사라이로 이적했다. 계약기간은 2014년 6월까지. 챔스진출을 할 수 있어서 맘에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하이 선화가 반발하고 나서면서 FIFA에게 제소했다. 상하이 측은 2015년까지 상하이에서 뛰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드록바는 4달이나 월급이 밀렸기에 계약은 해지된 셈이라고 맞서고 있다.-4개월간 공짜로 뛰었다- 어찌됐든 터키 이적은 확실시되었는데 터키 쉬페르리그 데뷔전 첫 경기에서 1골을 기록하며 2:1 승리에 기여했다. 골 장면.

3월 24일 열릴 잠비아와의 브라질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에서 대표팀 소집명단에 들지 못했다. 대표팀 감독인 사브리 라모치와 사이가 안좋아서 안 뽑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라모치 감독은 드록바가 최근 8개월 동안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들며 3개 구단에서 뛰어 경기력이 떨어졌다고, 현재 갈라타사라이에서 경기력을 회복 중이기에 뽑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에 다시 뽑힐 수 있다고 한다.

챔피언스리그 8강 1, 2차전 레알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비록 팀은 탈락했으나 클래스 인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차전 원정에서 레알한테 0:3으로 완패했지만 그래도 사이드로 빠져서라도 활로를 찾으려는 모습을 보여주며 갈라타사라이 선수들 중 제일 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2차전 홈에서는 감각적인 판타스틱한 스피닝힐킥골로써 팀의 추격의 불씨를 활활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드록교 신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특유의 간지나는 세레모니는 덤.[4]

4.1. 2013-14 시즌

2013년 프리시즌 에미레이츠 컵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2득점에 성공, 아스날전 15경기 15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이겨야만 16강으로 올라갈 수 있던 챔피언스리그 32강 조별리그 마지막 라운드 유벤투스전 홈경기에서 기가막힌 헤딩 떨구기로 웨슬리 스네이더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그 클래스 어디 안간다는 걸 증명했다.

그런데 16강 추첨에서 운명의 장난인지 친정팀 첼시를 만나게 되었다. 추첨 전 주제 무리뉴가 "16강에서는 드록바가 있는 갈라타사라이랑 만났으면 좋겠다. 드록바는 이곳 스탬포드 브릿지로 돌아올 자격이 있다. 그는 여기서 내가 컴백경기 때 받았던 것보다 두세배 더 큰 환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드록바가 느꼈으면 한다."라며 드록바와의 재회를 기대했는데 그게 실제로 이뤄졌다. 드록바 본인도 대진이 결정되고 나서 "나는 이 대회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다. 16강 두경기를 모두 홈에서 뛰게 되니까!"라며 재회를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홈구장은 두곳만 쓰시는 겸손한 드록신의 위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열린 16강 2차전에서 갈라타사라이는 비록 0:2로 패배하였으나 블루스들은 드록바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으며 테리,램파드,체흐 등과 포옹하는 모습을 보이며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13-14 시즌 종료 후 갈라타사라이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다음 행선지가 어디일지 여러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는 중.

5. 첼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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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F 몽레알

2015년 7월 28일 부로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 CF 몽레알과 계약을 했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

10월이 끝났을때 지오빈코가 있는 토론토 FC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했다. 이로써 11경기 11골. 시즌 최종 기록은 14경기 12골로 2015년을 마무리했다. 무리뉴:돌아와...

한편, 주제 무리뉴가 첼시에서 경질당하고 후임으로 거스 히딩크가 선임되면서 드록바는 첼시의 새로운 코칭스태프로 합류할 것이라는 소식이 나왔다. 실제로 첼시 구단에서도 로만 구단주가 드록바의 첼시 복귀를 종용했고 드록바도 이에 응하면서 이제 코치 드록바를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겨울 휴식기간에 계속되는 유럽리그 임대로 정작 MLS 정규시즌에는 제대로 뛰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자 MLS 사무국에서 유럽리그 임대를 반대했고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2016 시즌은 22경기 10골을 기록했고, 시즌 종료 이후 몬트리올과 계약 연장 없이 FA로 팀을 나오게 되었다.

7. 피닉스 라이징 FC

2017년 4월, 미국 2부 리그 USL의 피닉스 라이징 FC와 2년 계약을 맺었다. 데뷔전에서 골을 넣은 활약을 보이면서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했고 이후 자신의 SNS에 며칠전 사망한 대표팀 동료 셰이크 티오테를 추모하면서 이 승리를 티오테에게 바친다는 글을 남겼다. 올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은퇴를 번복하고 현역생활을 연장, 피닉스 라이징을 이끌고 2018년 11월 4일, 오렌지 카운티와의 플레이오프 파이널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USL 서부 컨퍼런스에서 정상에 올라 동부 컨퍼런스 우승팀인 루이스빌 시티와의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불혹의 나이에 또 하나의 우승컵 획득을 눈앞에 두고 있다.

11월 9일 벌어진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피닉스 라이징은 비록 0-1로 패배하며 아쉽게 준우승을 거두었지만 드록바는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20년간의 선수 경력을 마무리하였다.

2018년 11월 21일 만 40세의 나이에 20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공식 현역은퇴를 발표했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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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촌인 미셸 고바(Michel Goba)는 스트라이커였으며, 스타드 브레스트 29(1982~1983), AS 앙굴렘(1983~1984), USL 됭케르크(1984~1985, 1986~1989), 라싱 브장송(1985), SC 아브빌(1989~1990)을 거쳤으며 주로 프랑스 2부리그 리그 2 소속으로 한 팀에서 2년 이상 머문 적 없는 저니맨이었다. 아들 케빈 고바(Kévin Goba)도 대를 이어 축구선수를 하고 있다.# 드록바의 두 동생과 아들도 축구선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코트디부아르 금수저 축구선수 집안인 듯하다. 그러나 집안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축구선수는 오직 디디에 뿐이며 다들 하위리그만 전전하다 은퇴하였다.[2] 갱강을 팀 역대 최고 순위인 7위까지 올렸으며, 갱강의 별로 불리웠다.[3] 바비 탬블링이란 거물급 스트라이커가 득점수가 더 많지만 커리어나 업적으로 볼때는 드록바가 한 수 위다.[4] 당시 갈라타사라이는 원정에서 0:3 완패에 홈에서 호날두에게 선취골을 허용하며 4강 진출을 위해 5골이 필요한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으나, 후반 50분 에부에의 골을 시작으로 웨슬리 스네이더의 골, 그리고 드록바의 골로 2골차까지 좁히며 희망고문에 들어갔다. 결국 더 이상 골을 넣지 못했고 후반 추가시간에 호날두의 골을 허용하고 말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