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導哉日記. 조선시대의 선비 이준(李濬, 1686~1740)이 숙종~영조 대에 자신의 일상 생활을 기록으로 남긴 생활일기. 상당수가 멸실되고 현재는 숙종 43년인 1717년부터 영조 7년인 1731년까지 약 14년간의 일기만이 남아 있다.2. 내용
전라도 함평군 출신의 선비인 이준은 살아생전 매일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현재는 많이 훼손된 상태로써 남아있는 부분은 1717년 11월 27일부터 1731년 2월 16일까지 약 14년 분량 뿐이다.책은 앞부분이 크게 훼손되어 날아간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첫 부분인 1717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음이 확실하고, 일기의 마지막 부분인 1731년 2월 16일 이후에도 모월 18일의 일기와 5월 15~16일의 일기가 파편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후에도 한동안 일기를 썼음이 확실시되고 있으나 소실된 상태라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이준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향촌 사회에서 초야 생활을 한 인물로, 도재일기는 향촌 재지 사족의 일상 생활이 어떠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3. 일기에 남겨진 생애
현재 남아있는 일기를 통해 이준의 본관은 함평이고 숙종 12년(1686년)에 태어나 영조 16년(1740년) 사망할 때까지 함평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남아있는 일기 최초 분량인 숙종 43년(1717년)에 황감시에 응시한 것을 시작으로 영조 6년(1730년)까지 13년간 계속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하는 생활을 반복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43년(1717) : 12월 1일에 서울에서 응시 = 불합격
- 숙종 45년(1719) : 4월 9~10일에 흥덕에서 응시 = 불합격
- 경종 2년(1722) : 6월 15일에 응시 = 합격
- 경종 2년(1722) : 7월 28~30일에 순창에서 복시 = 불합격
- 경종 3년(1723) : 8월 19~21일에 장성에서 응시 = 불합격
- 경종 3년(1723) : 9월 6일에 금산에서 응시 = 형의 사망으로 취소
- 영조 1년(1725) : 8월 13일에 고창에서 응시 = 불합격
- 영조 2년(1726) : 8월 초에 화순과 고산에서 응시 = 병으로 응시 취소
- 영조 2년(1726) : 8월 28~30일과 9월 2일에 해남에서 응시 = 늦게 도착해 초장 응시 불가, 중장에 응시, 종장에는 눈병으로 응시 불가
- 영조 4년(1728) : 2월 10일에 홍성에서 응시 = 초장은 응시하였으나 종장은 집안일로 인해 응시 불가
- 영조 5년(1729) : 8월 11~13일에 서울에서 응시
- 영조 5년(1729) : 8월 27~29일과 9월 2일에 서울 예조에 동과(東科)
- 영조 5년(1729) : 9월 22일, 10월 13일, 10월 14~15일, 10월 17일 = 총 11차에 걸쳐 시행된 통독 강제 시험을 거쳐 합격 중 가장 낮은 석차인 삼하(三下)를 얻었고 최종적으로 17일에 차상(次上)을 얻어 불합격
- 영조 6년(1730) : 5월 5일에 응시 = 불합격
일기 마지막 부분 이후에도 끝까지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일기에는 과거에 떨어진 후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거나 합격자들 보니 자신과 비슷하거나 혹은 낮은 실력의 사람들이 모두 유력자의 친척이라며[1]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토로하기도 한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1년을 버티지 못하고 관에서 주는 구휼미를 받아 겨우 생활하기도 하는데, 영조 2년 2월 16일의 일기에 의하면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쌀을 무상으로 나눠 주기로 하여 함평읍에서도 장성에서 일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에 이준도 소노(小奴)에게 조를 받아 오게 했으나 도망가고 돌아오지 않아 절망에 빠졌다. 결국 4월 20일에 옥과에서 쌀을 받아와 겨우 해갈하였고 4월 29일에는 보리를 벤 후 가속들에게 "드디어 죽음을 면하겠다"고 말하며 웃고 말았다.
계속된 낙방으로 집안의 가세와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지 경종 1년 2월 12일에는 계집종들이 모두 도망갔는데, 이후 다른 종들은 모두 다시 돌아왔으나 막비만은 돌아오지 않아 분하게 여겼다. 이후 형편이 궁하여 이필무란 사람에게 노비들을 매매했으나 역시 그 소식을 듣고 계집종들이 모두 도망쳐 이를 잡아 형장을 가했다.
다만 그렇게 양반 권위 내세운다고 자신의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경종 3년 2월 5일에는 도망친 노비 돌선을 관에서 추쇄해 왔으나 그렇게 추노해 잡아온 노비에 대한 처우조차 어려워 부근의 양반인 고한익, 오덕해에게 매매하려 했다. 그나마도 사기가 많다 보니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고... 앞서 숙종 45년에 솔거노비 운비가 아들 우득을 데리고 도망쳤던 것을 이듬해에 금여 이초노란 사람 집에서 잡기는 잡았으나, 도망쳐 버린 것을 본인도 그날 눈바람이 심해서 잡으러 갈 생각이 안 났다느니, 찾아가 보니 불러 보니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꼴이 말도 할 수 없게 참담해 그냥 돌아섰다느니 하는 얘기도 나온다.
노비가 줄어든다는 것은 노비가 자신의 상전에게 노동력 또는 물품의 형태로 제공하는 신공(身貢)을 제대로 거두어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흉년이 들 경우를 대비한 식량을 비축할 만큼 넉넉하지도 않은데 신공을 거둘 수 있는 노비들까지 줄어드니 경제적으로 더욱 쪼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관의 힘을 빌려 도망노비를 잡아왔음에도 처우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매매해야 했으니, 잡아 온다고 무조건 신공을 거둔다는 뽀족한 대책도 없었다. [2] 자신 또한 훗날엔 이런 자신의 찌질한 처지를 자조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시험을 보러 진주를 지나던 중 지리산을 보고 데리고 가던 노비에게 "네가 이 길을 잘 알면 훗날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망가지 않은 노비들도 이준을 대놓고 가볍게 보곤 하였는데, 경종 3년 정월 30일에는 진주로 가는 길에 풍영정에서 자신의 노비인 철노의 집에 방문하였으나 대놓고 출타했다고 말하며 나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당시 향촌 사회 양반의 권위가 크게 하락되었고 특히 시험에 계속 낙방하는 선비에 대한 푸대접을[3] 볼 수 있다.
가난하여 영조 1년 5월 5일 단양절, 영조 1년 11월 18일의 참례전, 영조 2년 2월 29일의 장모의 염습 등 선비로서 반드시 행해야 하는 제사와 상례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울부짖기도 한다. 하필 이준이 살았던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나돌아서 이준의 일기에는 거의 해마다 연례행사급으로 전염병 얘기가 나올 정도다. 영조 1년은 흉년까지 전국적으로 나돌아서 더욱 괴로웠을 듯.
그 외에도 없는 살림에 문중 땅과 관련된 송사까지 당하여 이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러한 삶의 고통으로 인해 초연한 승려들의 생활을 부러워하고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 교리에 깊이 빠지기도 한다. 특히 전염병이 돌아 어머니의 생사가 오락가락하게 되자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에게 찾아가 종교적 행위를 하기도 하고 신의 도움을 빌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산 밑의 연못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무속 신앙 행위도 한다.
4. 기타
현재 도재일기와 청대일기(淸臺日記) 등의 여러 일기류 서적들은 조선시대 당시 벼슬에 오르지 못했던 선비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참고 사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이준의 도재일기 외에도 이준의 재종손인 계일헌(戒逸軒) 이명룡(李命龍)이 계일헌일기를 저술했으며, 이 두 일기의 원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 제42집으로 발간하였다.
5. 외부 링크
[1] 이준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세대로 영남의 사족이었던 노상추(1746~1829)의 경우 본인이 형을 대신해 집안 생계를 책임지는 입장이라 문과만 쳐다보고 살 수 없어 일찌감치 문과가 아닌 무과로 전향했고, 그러고도 10년 동안 현재 시가로 5억 원에 달하는 집안 재산을 쏟아 부어가며 몇 번을 낙방한 뒤에야 1780년에 겨우 합격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도 영남 남인으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는 연줄이 없어 기껏 급제하고도 4년 동안 관직을 못 얻고 셋방살이를 전전해야 했다. 당시 무과가 '만과'라 불릴 정도로 급제자를 많이 뽑아 문제였음에도 이랬으니 문과에 매달린 이준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노상추는 선산에서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집안이었지만, 이준은 가족의 생계를 겨우 유지하면서 흉년 들면 관아에서 구휼미를 받아 먹어야 생활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준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동법 시행으로 인한 피해자(?)이기도 했는데 효종 9년(1658년)부터 전라도에서도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어쨌든 지주로서 땅을 소유하고 있던 이준도 소유한 토지에 맞춰서 대동미(1결당 12말)를 지급해야 했다. 이준 본인은 일기에서 대동미 운송 및 납부의 부담을 눈을 뽑고 못을 박는 느낌(경종 1년 4월 9일자)이라고 썼는데, 시니컬하게 생각하면 땅 한 뙈기 없는 일반 백성들에 비하면 엄살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이준 본인도 일기에서 자신이 본 일반 백성들의 관세 독촉으로 인한 고초들을 다 적어 뒀다.[2] 조선 후기에는 노비라고 해서 주인에게 고분고분하지도 않았다. 안석경(1718~1774)이 지은 한문소설에 보면 언양에서는 외거노비들이 상전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 스스로 군교니 서리니 자처하며 주인에게 외거노비가 바치게 되어 있는 신공도 제대로 바치지 않고 심지어 신공을 받으러 찾아온 상전을 쥐도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려고 들기도 했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3] 조선에서는 3대 안에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라 평민으로 취급되어 온갖 부역을 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