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2:23:18

장 자크 데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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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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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장자크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
생몰년도 1758년 9월 20일~ 1806년 10월 17일 (48세)
재위기간 1804년 9월 2일 ~ 1806년 10월 17일
출생지 생도맹그 그랑드리비에노르
사망지 아이티 제국 포르토프랭스 퐁라르나주

1. 개요2. 생애
2.1. 혁명 지도자로2.2. 황제 자크 1세로의 즉위 후 폭정과 죽음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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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티의 독립 영웅이자 지도자.

2. 생애

생도맹그노예로 태어났다.

이후 농장 노동자가 되었고, 결국적으로 감독의 역할까지 올랐다.

30세 경에 그는 드살린으로 불린 자유 흑인 남성에게 팔려 그의 성을 다시 바꾸었다.

2.1. 혁명 지도자로

1791년 생도맹그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나다 데살린은 농장을 탈출했으며 반란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에게 동조했다. 읽고 쓸 줄 몰랐어도 빠르게 공부해서 루베르튀르의 보좌까지 상승했으며 전투에서도 사나움으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793년 프랑스 제1공화국은 프랑스 전체의 식민지들의 노예제 종말을 선언하였고, 이후 루베르튀르와 데살린은 스페인영국에 대항하는 데 프랑스에 충성을 바쳤다.

이후 유럽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인해 일시적으로 빗나가면서 노예 반란은 내란으로 변하자 루베르튀르와 데살린은 섬의 통치를 위해경쟁자와 노예 주인들 같은 자들을 부수었다. 1801년까지 루베르튀르는 아이티의 총독으로 지냈으며, 데살린은 부사령관이었다.

와중에 생도맹그에서 많은 백인과 물라토들은 노예제를 부활시키라며 프랑스에 압력을 가하였고, 나폴레옹은 섬에 프랑스의 지배를 복원시킬 목적으로 군대를 보냈다. 루베르튀르와 데살린은 크레트아피에로 전투에서 점령군을 격퇴하였으나 후에 데살린은 루베르튀르의 리더십과 환멸을 느꼈고 잠시 프랑스 편을 들어 1802년 루베르튀르를 생포, 체포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노예제를 회복시키려는 의도했던 것이 명확해질 때 데살린은 다시 편을 바꾸어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반란군들을 지휘하였다. 데살린의 흑인과 물라토들의 연합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섬을 떠났다.

이로써 1804년 아이티는 세계에서 흑인 근대 국가가 되었다.

2.2. 황제 자크 1세로의 즉위 후 폭정과 죽음

이후 데살린은 나폴레옹을 따라해서 칭제하고 아이티 제1제국을 수립했다.

아이티가 생존 경제로 회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제 노동을 실시했으며, 백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대지를 모두 몰수한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아이티의 백인들을 없앨려는 목적으로 1804년 2월과 4월 사이에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대략 3000명부터 5000명의 백인들을 살해했다.

또 해외 무역을 엄격히 규제했으며 프랑스 대신 영국, 미국과 주로 교류하려 했다.

결국 1806년 10월 17일 그는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배후로 이후에 아이티를 둘로 갈라서 지배한 앙리 크리스토프알렉상드르 페시옹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3. 평가

말년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에서는 그를 독립영웅으로 높이 평가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그가 사망한 날은 아이티의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아이티의 국가 데살린의 노래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일:attachment/아이티 구르드/haiti105.jpg
아이티 250구르드 지폐의 인물로도 들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