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達周宗
1796년 4월 9일 ~ 1809년 6월 3일
1. 생애
다테 지카무네는 다테 마사무네의 후손으로 센다이 번의 제 9대 번주이다. 태어난 직후 그의 생모는 용태가 악화되어 일주일만에 사망했고, 같은 해 조부이자 7대 번주였던 다테 시게무라에 이어 아버지인 다테 나리무라까지 사망하는 등 첫 돌도 지나지 않아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 다테 지카무네는 장남이긴 했지만 형제관계로 동갑내기 이복동생인 다테 나리무네[1]가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시점에서는 일단 외아들이었으므로 번주로 취임하긴 했으나... 갓난아기가 정무를 볼 수는 없으니 할 수 없이 홋타 마사아츠(堀田正敦)가 번주 대리임무로 센다이 번을 섭정하게 되었다.그러나 다테 지카무네의 생애는 불운 그 자체였는데 번주가 된 이듬해에 일본 역사상 최대의 잇키가 센다이 번에서 발생했다. 이것 때문에 센다이 번의 번주 가신단은 아주 제대로 곤욕을 치렀다. 1809년 1월, 치카무네(아직 성인이 되기 전이었기에 당시에는 아명인 마사치요라고 불렸다.) 본인이 천연두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이후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복동생 나리무네가 형을 대신해 외부 접대를 담당했다. 성인이 된 1810년부터 정식으로 치카무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와병한 지 3년 후인 1812년에도 천연두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복동생인 나리무네를 양자로 삼는 것과 동시에 은거하겠다는 청원을 막부에 제출했다. 원칙상 상경하여 쇼군을 알현하지 않은 다이묘의 은거 요청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 상식임에도 이례적으로 막부가 은거를 용인함으로 불과 17세의 나이로 가독을 이복동생 겸 양자인 나리무네에게 넘기고 은거를 시작했으며, 얼마 못 가 사망했다.
이상이 문헌상에 기록된 치카무네의 생애이지만 치카무네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도 존재한다.
2. 사망에 관한 다른 설
일설에 따르면 공식 기록과는 달리 다테 지카무네는 14살이 되던 1809년에 천연두의 악화로 인해 바로 사망했다는 다른 설도 있다. 이 설을 따를 경우 당시의 센다이 번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인데, 왜냐 하면 당시 규정이 만 17세가 되어야 양자를 들일 수 있고 번주가 그 이하의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하면 대를 이을 수 없어 폐번 조치되고 번의 영토는 막부 직할령으로 흡수 당하고 만다. 물론 가신단은 모조리 낭인행... 이 일로 인해 센다이 번에서는 보는 사람은 웃기지만 당사자들은 눈물겨운 일이 벌어진다.가신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사다요시는 가신들을 모아놓고 다테 지카무네의 사망을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했다. 다테 지카무네의 동갑내기 동생인 다테 나리무네가 3년 후면 다테 지카무네의 양자로 입적할 수가 있게 되고 그게 가능한 시기에 다테 나리무네를 다테 지카무네의 양자로 들이고 나서 다테 지카무네가 죽었다고 발표한 뒤 다테 나리무네에게 정식으로 번주 자리를 넘겨주면 만사가 형통한 상황이었다. 가신들은 나카무라 사다요시의 의견에 따라 기가 막히는 촌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신단의 의견(정확히는 나카무라 사다요시의 의견)에 따라 다테 나리무네는 그날부로 번주로서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단, 자기 형인 다테 지카무네의 이름으로. 둘의 아버지가 동일인물이고 나이까지 동갑내기라서 다테 지카무네로 사칭하기가 매우 쉬웠을 것이다. 결국 가신단은 막부를 상대로 속고 속이는 촌극을 벌이며 온갖 방법으로 다테 지카무네의 사망을 은폐한 뒤 1812년이 되자 다테 지카무네가 다테 나리무네를 양자로 삼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하고 다테 나리무네는 센다이 번의 번주로 정식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다테 나리무네도 얼마 못 가 1819년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막부에서 이미 다테 지카무네의 죽음을 눈치챘으나, 에도 시내에서 유통하는 쌀의 절반이 센다이 산지일 정도로 센다이 번이 워낙 거대한 번이다 보니 이 번을 폐번할 경우 발생하는 대량의 낭인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길이 막막해서 막부에서 알고도 속아넘어가 주었다는 의견이 있다.[4]
[1] 10월 15일 생으로 9월 13일에 아버지인 다테 나리무라가 사망한 고로 다테 나리무라의 유복자이다.[2] 불운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다이묘 가문조차 이런 식으로 줄초상이 나는 경우가 의외로 흔했다. 그 예로 고산케 필두인 오와리 도쿠가와의 경우 3대 츠나나리 사후 적남이었던 9남과 손자가 가독승계 후 연달아 요절하여 츠나나리의 11남이 가독을 이어받았으나 이 사람도 얼마 못가 사망한 탓에 결국 츠나나리의 아들 중 유일하게 장수한 19남 도쿠가와 무네하루에게까지 가독이 넘어왔다. 사족이지만 이 사람은 영민들에게는 평가가 좋은 영주님이었지만 순전히 당시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요시무네가 주인공인 유명 시대극 '아바렌보 쇼군'에서 요시무네를 해치려는 흑막으로 묘사되어 꾸준히 풍평피해를 받고 있는 중이다.[3] 센다이 번의 지번인 이치노세키 번주 타무라 가 출신이었지만. 혈통상으로는 5대 번주 요시무라의 증손자이다. 또한 타무라 가 자체가 다테 마사무네의 정실 메고히메의 친정으로 에도 시대에 들어 마사무네의 후손이 가문을 계승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다테의 분가 취급을 받았다. 다만 이 사람도 만 30세가 되기 직전의 젊은 나이에 3살짜리 아들을 남기고 죽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사위이자 양자인 나리쿠니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3살짜리 아들 요시쿠니를 나리쿠니의 양자로 들이는 형태로 가독을 승계했다. 가문 종특인지 나리쿠니 또한 친자식을 두지 못하고 20대에 사망하여 양자이자 나리요시의 친아들 요시쿠니가 12대 번주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다행히도(?) 요시쿠니는 50세까지 장수(?)해서 지긋지긋한 가문의 단명 징크스는 끊어냈다. 대신 보신 전쟁 당시 이 양반이 맹주였던 오우에츠 열번 동맹이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신정부군에게 박살난 탓에 가문이 쇠퇴해버렸지만...[4] 에도 막부는 낭인들이 일으키는 사회문제 때문에 중기부터 개역을 자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