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커먼 증기기관의 도식 | |
이름 |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 |
출생 | 1663년 2월, 다트머스 |
사망 | 1729년 8월 5일, 런던 |
1. 개요
토머스 뉴커먼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유명한 영국의 공학자이자 발명가다.2. 생애
영국 다트머스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가업을 이어받아 일찌감치 대장간의 직공으로 일했다. 당시 영국은 산업이 발전하면서 광산 채굴이 활발해졌는데 그가 일하던 사업체는 주로 광산업을 위한 도구를 만들고 파는 곳이었다. 당시 영국의 광산(특히 석탄과 주석 광산)들은 채굴량이 증가함에 따라 배수문제가 심각했는데[1]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머스 세이버리(Thomas Savery)의 증기 기관이 발명되었다. 이 세이버리 기관은 배수작업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나 효율이 낮고 고장이 잦았기 때문에 자주 가동이 중단되는 문제가 있었다.당시 뉴커먼은 이 세이버리 기관의 설치 및 수리작업을 담당했는데, 딱히 학교 교육을 받거나 과학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눈썰미가 좋았던 그는 1712년에 토마스 세이버리의 발명품을 보완한 보다 효율적인 증기기관을 내놓았는데 이 것이 바로 뉴커먼 증기기관이다. 이 뉴커먼 기관은 영국 산업혁명의 초석을 놓게 된다.
다만 뉴커먼의 기관은 특허를 얻지 못했는데 기존 세이버리 기관의 특허를 침해하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뉴커먼과 세이버리 두 사람은 1712년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세이버리의 특허가 적용되는 뉴커먼 기관을 판매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광산업자나 공장주에게 뉴커먼 기관을 팔고 기관 1기당 연간 300파운드의 특허료를 받았는데 이 액수는 당시 근로자 연봉의 10배에 달하는 고액이었다.
세이버리가 1715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후에는 뉴커먼이 기관의 제작과 수입을 독점했으며 뉴커먼은 1729년에 사망했다. 뉴커먼 기관은 특허가 만료되는 1733년까지 100여대가 설치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속 제작되어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19세기 초까지도 쓰였다.
3. 뉴커먼 기관
뉴커먼 기관의 모식도는 위의 그림과 같은데, 밸브가 닫힌 상태에서 물을 끓여서 발생한 수증기(그림상의 분홍색 영역)가 밸브를 열고 실린더 안으로 들어가 피스톤을 밀어올린다. 피스톤이 끝까지 올라간 후 다시 밸브를 닫고 이 번에는 실린더 안으로 냉각수를 뿌려 실린더 내의 수증기를 액화시키면 피스톤이 내려온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피스톤이 상하 왕복운동을 하게 된다.
이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냉각수가 실린더 전체를 냉각하기 때문에 다시 가열을 해주어야 하며 이 때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점이었다. 이 에너지 손실이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뉴커먼 기관의 효율은 0.5%를 넘지 못했고,[2] 이로 인해 석탄광산 같이 에너지원이 엄청 싼 곳이 아니면 제대로 쓸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효율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력이나 가축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100년 가까이 광산과 산업현장에서 사용되었다.
뉴커먼 기관의 문제는 제임스 와트가 냉각수를 실린더로 직접 분사하는 대신 실린더 외부에 별도의 응축기를 만들어서 해결한다.
[1] 채굴 깊이가 증가함에 따라 쏟아지는 물의 양도 증가해서 많은 광산에서 채굴보다 물을 퍼내는 일에 인력을 더 많이 투입해야 할 정도였다.[2] 제임스 와트의 개량된 증기기관의 효율이 최대 3%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