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을산(乙山) |
본관 | 함평 노씨[1] |
출생 | 1909년 8월 19일 |
전라남도 무안부 금동면 장동 (현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 장동마을)[2] | |
사망 | 1992년 12월 20일[3] |
전라남도 함평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2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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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노근후는 1909년 8월 19일 전라남도 무안부 금동면 장동(현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 장동마을)에서 아버지 노인수(魯仁洙, 1875. 8. 28 ~ 1931. 11. 13)와 어머니 광산 김씨(1876. 11. 16 ~ 1954. 7. 8) 김영채(金永彩)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해남군 마산면 화내리로 이주하였다.그는 1929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었는데, 과거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28년 4월 학생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 발각되어 1929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투옥되어 7개월간 구금되었다가, 1930년 7월 26일[4]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고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 함평군에서 은거하다가, 8.15 광복 후 교사에 임용되어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리고 1973년 2월 학다리동국민학교[5] 교장을 끝으로 공로퇴직하였다.
1992년 12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노근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 10월 24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