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풍종호의 무협소설 『지존록(至尊錄)』에서도 오랜 옛날[1]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등선지로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와 가족을 이루고 자손을 남긴 뒤에 그 일생을 마친 기인(奇人)이 있으니, 그가 바로 남천화(南天華)이다.그는 당시 천하를 유린(蹂躪)하여 피폐하게 한 군마루(群魔樓)라는 마도방파를 무찌르기 위해 혹독하고 긴 수련을 하였다. 그런데 정작 싸울 수 있게 되었을 때, 군마루는 이미 마교(魔敎)에 붕괴당한 뒤였다. 마교는 천하제패나 지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싸워야 할 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천화는 세간의 일에 인연을 끊고 본격적으로 선도를 추구한다. 그러다 긴 세월을 넘어 군마루의 뿌리가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교의 초대 천마(天魔)인 성존(聖尊)이 군마루를 파괴할 때까지의 짧지 않은 세월, 천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설혹 하늘의 뜻이라 하더라도 그 고통을 조금은 덜어낼 방법을 찾던 이가 남천화였다. 그렇기에 먼 앞날에 일어날 일이라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는 뜻을 잇는 후손들을 남긴다. 때로는 난세를 평정하려는 제왕의 재목을 돕고, 때로는 치세(治世)의 왕도(王道)를 더욱 널리 퍼뜨리려는 천자를 돕는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렵다 하더라도 누대에 걸쳐 힘을 갖춘 가문의 힘이라면, 더욱더 많은 이의 고통을 덜어줄 수가 있는 법··· 그것이 남천화 시조가 가문에 남긴 당부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가문을 이루었으며, 힘을 남겼다. 그리고 남(南), 천(天), 화(華)라는 세 가지 성을 수 대에 걸쳐 순환하여 사용하게 해 가문이 그의 유지를 전승하면서 오래 이어지도록 한다.
2. 행적
아래는 작가의 여러 소설에서 밝혀진 남천화 가문의 흐름이다.- 《3,700여 년 전》 남천화 시조 → 남씨 가문 15대 → 화씨 가문 13대 → 천씨 가문 19대······.
- 《900여 년 전》 남궁인호(南宮仁豪)가 탈혼마제(奪魂魔帝)가 되고, 남궁천린(南宮天麟)이 암천향(暗天香)이 된다.[2]
- 《400여 년 전》 천씨의 마지막 후손이 모용가의 검객에게 죽는다.[3]
- 《호접몽(胡蝶夢)》 육대세가(六大勢家) 중 하나가 남궁세가(南宮勢家)이다. 화씨로의 변성을 준비 중이라 무림에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모용세가(慕容勢家)의 해체가 예상되는 논검회(論劍會)에는 소가주 남궁기와 묘산반(妙算盤) 남궁덕이 참가한다.
- 《100여 년 후》 화씨 가문의 사람으로 화진무(華鎭武)와 화진명(華眞明)이 나온다. 마도(魔道)의 무리와 가문의 싸움이 치열했는지 전대 가주는 실종된 상태라 출가한 화진명이 조카인 신임 가주 화진무와 함께 여행하면서 여러 가르침을 주고 있다.
3. 무공
무공절기도 세 가지를 남겨 각 가문마다 하나씩만 사용하도록 한다.[4]- 남씨, 천기심법(天機心法): 암천향의 고백으로 옥형천기신공(玉衡天機神功)임이 밝혀졌다. 총 구단결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 천씨, 천절도법(天絶刀法)
- 화씨, 화운검법(華雲劍法)
4. 기타
- 『호접몽』과 『화정냉월(花情冷月)』 사이의 시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거리가 좀 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화정냉월』이 『호접몽』의 뒤편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비호도(飛虎刀) 육풍목이 섭혼도법(攝魂刀法)의 비급을 태워버리고 가문을 버린 후가 『광혼록(狂魂錄)』 때이다. 그 후로 육씨세가(陸氏勢家)는 절기를 다시 찾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화정냉월』에서 지난 100여 년 사이에 섭혼도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항선의 말을 비추어 볼때 『화정냉월』을 『광혼록』 바로 뒤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화정냉월』의 화진무가 화씨세가의 주인임이 개방(丐幇)의 방주 풍개(瘋丐)에 의해 드러나 『호접몽』의 뒤가 『화정냉월』이 되는 것이 맞다. 『호접몽』에서 남궁세가가 화씨로의 변성을 준비한다고 하였으니 그 이후가 된다. 그러면 사항선의 얘기를 여기에 접목해 보자. 결국, 『호접몽』에서 적어도 10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다.[5]
[1] 천마성존과 동시대로 『지존록』에서 3,000여 년 전이다.[2] 전대 남씨 가문의 방계가 세를 이루고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남궁'이라는 복성을 사용했다.[3] 난곡의 모용세가가 세워지기 이전이다.[4] 남궁천린이 군마천루(群魔天樓)의 유적이 있는 섬에서 싸울 때, 이 세 가지 절기를 모두 사용하며 버텼다고 한다. 그러므로 절기는 모두 전승이 되지만, 각 가문에 맞춰서 한 가지씩만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5] 그럼 100여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남궁세가는 『호접몽』의 시기에 육대세가의 하나인 만큼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성의 시기가 왔다면 그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가문을 조금 더 유지하면서 사파(邪派)를 견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변성할 시 준비 기간으로 50~100년을 가진다는 점을 참고해보면, 남궁세가는 가문의 힘을 빠르게 소진하며 변성했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호접몽』의 육씨세가의 가주인 육모화는 『광혼록』의 육풍목 이후로 섭혼도법을 완성할만한 고수였다. 그는 섭혼도의 문제점을 몸소 느끼고 있어서 그 문제의 해답인 유마구절도법(幽魔九絶刀法)에서 배우고자 하는 중이었다. 그러면 왜 섭혼도는 사라지게 된 걸까? 육모화가 결국 실패하여 섭혼도의 폐해가 사달을 일으킨 걸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미 같은 문제의 답을 육풍목이 고민하여 해결하고 유마도를 남긴 것이므로, 육모화가 실패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고로 100여 년 전에··· 그러니까 『호접몽』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마도 무림에 대형사건이 터진 게 아닐까? 즉, 남궁세가가 힘을 빠르게 소진해야 했으며, 육씨세가가 몰락해야만 했을 정도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