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04 18:24:31

남상순(1878)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의령 남씨[1]
출생 1878년 7월 21일
경상도 의령현 일정동면 성황동
(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성황리)[2]
사망 1949년 2월 5일
경상남도 의령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27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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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남상순은 1878년 5월 23일 경상도 의령현 일정동면 성황동(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성황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곡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1914년 8월 일제가 정곡면 죽전리, 성황리, 예리, 중교리 등 4개 마을의 주민들이 경작해오던 정곡면 중교리 동쪽 일대의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하고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한 뒤 임시토지조사국원을 파견해 해당 지역의 측량을 감행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허용한다면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하다고 보고 전중진, 남병우, 이진우 등과 함께 토지측량을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1914년 8월 26일과 27일, 그는 700명의 주민을 집결한 뒤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朴璂陽)을 구타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부산감옥 진주분감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에 2년 3개월형으로 감형받았으며, 1916년 3월 19일 가출옥하였다. 가출옥한 후에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9년 2월 5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남상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1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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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4세 상(相) 항렬.[2] 의령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병우·남종우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