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5 14:07:42

난리가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

1. 개요

亂離歌. 조선 영조 4년인 1728년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 당시 난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훈련도감 소속의 한 하급 기마병이 그 당시의 상황을 산문으로 기록한 한글일기.

2. 내용

이름을 알 수 없는 훈련도감 소속의 한 하급 군졸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기마병으로 진압군에 참전, 1728년 3월 17일부터 4월 19일까지 약 한달 동안 체험한 전장에서의 일을 수기의 형태로 기록한 한글 일기이다.

이인좌의 난 당시 서울,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이동하며 여러 전투에 직접 참여한 일반 군졸이 그 과정에서의 매일의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의 혼란상과 전쟁의 참상,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 반란군과의 전투 과정, 병사들이 받은 음식 대접, 오랜 행군에 지친 병사들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또한 전투 외에도 도시 하층민으로서 살아가던 훈련도감 소속 하급 병사들의 고단하고 힘겨운 군영 생활을 묘사하거나 무능한 지휘관의 행태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등 당시 하급 병사들의 정서와 의식을 여과없이 묘사하고 있다.[1]

한국의 현존하는 한글일기들이 대부분 높은 신분의 사대부층에 의해 창작된 것과 달리, 무신란에 직접 참전했던 낮은 신분의 하층 병사가 일상 구어체로 작성한 한글일기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으며, 이인좌의 난에 대한 연구 뿐만 아니라 1700년대 우리나라 군영 문화의 전반적인 이해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수백년 전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군대란 곳은 비슷한지 군필자들이 현대인의 시선으로 읽어도 공감가거나 실소가 나오는 기록이 다량 존재한다. 예를 들면 보급이 잘 안 나와서 병사들과 말들이 배고픔에 고통받고 주먹밥에 돌이 섞여 나오고 김치도 안줘서 먹기 싫어 죽겠다던지, 현대 군대로 따지면 보급관 지위의 상관이 군량을 계속 안줘서 곧 굶어 죽겠다고 욕하고 뒷담화를 하는 내용이 적혀있다던가, [2] 난을 피해 산으로 피난갔다가 군의 과잉 진압으로 억울하게 죽은 백성 1천명을 애도하고 애꿏은 백성들을 죽인 지휘관들의 잔인함을 지적하는 내용과[3] 승전하고 한양에 가서 임금님을 뵀는데 뭔가 불편한 점이 없었냐고 여쭤봤지만 사실대로 모두 말하면 한바탕 난리가 날까 그만두었다는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다. 물론 군대 욕만 써져있는건 아니고 상술했듯 온갖 갖가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그 중엔 출정하는 행렬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 부대원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강조하거나 부상당한 부대원들은 그냥 각 읍에 두고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전국각지에서 모인 우리 전우들을 어떻게 두고 갈 수가 있느냐는 전우애와 ‘우리 기병이 적 선봉을 박살냈다. 우리 군대는 강하다’[4]하는 내용 등 일개 병사가 군생활에서 전쟁을 겪으며 느낄만한 내용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3. 외부 링크



[1] 풍자 대상으로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이 된 권희학, 이익필, 박찬신 등의 장수들이 있는데, 중앙 조정에서의 상훈과 달리 일선 군인의 입장에서는 좋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라 양자 간의 인식 차이를 알 수 있다. 반대로 훗날 암행어사로 활약해 유명해지는 종사관 박문수는 '착하도다 종사관 박문수여 지략과 의기 좋을시고'라며 칭찬을 하고 있는데, 전국시대의 병법가이자 휘하 병사들의 고름을 손수 빨아 치료해 주면서 온 병졸들의 신망을 얻었던 인물인 오기에 비유할 만큼 높이 평가한다.[2] 4월 22일, 반군을 진압하고 복귀하던 중 전주에서 있었던 일인데 금위중군 박찬신은 병사들이 하루치 밥을 미리 타 먹었다고 트집을 잡아 부대에 배식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병사들이 서울 복귀하고 월급으로 갚겠다고 했지만 박찬신은 보란 듯이 생까버렸다.[3] 난리가의 화자를 비롯한 훈련도감의 병사들은 대부분 조선 사회의 하층민이었던 상민과 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회적 지위가 그들과 비슷한 백성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모습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 것이 당연지사.[4] 훈련도감은 조선의 최정예로, 실제로 센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