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6년 6월 초,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부주석 김동규가 김정일의 후계세습 구도에 반기를 들었다고 알려진 사건.2. 분석
2.1. 박병엽의 설명
김동규는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정치인으로, 1960년대부터 급부상하여 국제비서, 국제부장 등을 역임하여 1974년에는 국가부주석에 오르는 등 70년대 김일성 정권의 최대 실세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돌연 부주석에서 탈락,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그가 숙청되었다는 것까진 알았으나 왜 숙청되었는지까지는 이유를 가늠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그런데 조선로동당 대외조사부[1] 부부장을 하다가 1980년에 대만에서 체포되어 전향 후 한국에 귀순한 공작원 박병엽이 김동규 사건에 대한 증언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1976년 6월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에서 김동규가 간부사업[2]지도서 문제를 토의하던 중 "혁명열사 가족만 지나치게 내세우지 말라. 노동계급 가족의 불만이 크다"라면서 빨치산 자제들에 대한 특별 대우를 비판하고 노동계급 우선을 주장했으며 또한, 노간부들에게 노쇠 딱지를 붙여 후퇴시키고 청년간부들을 등용한 간부청년화 정책 역시 비판했다고 한다. 그리고 월남자 가족, 복잡계층, 월북자들이 소외를 당하고 있으니 그들과의 단결을 위해 계급정책을 개선할 것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것까지는 옳으나 후계자 부각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면서 인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교양을 해야 한다고 폭탄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총정치국장 리용무, 사회안전 담당 비서 류장식이 동조하고 나서고 지경수, 지병학은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김동규에게 기울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반면 부주석 김일,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최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김정일의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최종적으로 간부정책에 오류가 있다고 시정을 지시하면서도 문제가 있으면 그때그때 처리해야지 왜 뒤늦게서야 호들갑을 떠냐고 김동규를 비판하였고, 며칠 후에 다시 열린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일, 최현, 박성철 등이 김동규를 설득하려 했으나 김동규는 김정일 후계구도에 반대하진 않으나 김정일의 간부정책이 당의 통일단결을 해치고 있다고 꿋꿋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김동규, 리용무, 류장식, 지경수, 지병학이 모두 보위부로 끌려갔고, 사석에서 김동규가 옳다고 동조한 장정환도 체포되었다고 한다. 김동규와 류장식은 수용소로 끌려갔고 장정환은 철직되어 유배되었으며 당증교환사업을 실시하여 일반 당원과 주민들 중에서 10대원칙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시에서 추방하고 그중에서도 반체제 요소가 있다고 평가된 사람들을 함경북도와 량강도의 오지로 추방하여 총 30만명의 당원이 제명되고 70만명이 새로 보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일 역시 한발 물러서서 자신에 대한 숭배를 중단하고 몸을 사렸다고 한다.
2.2. 의문점
김동규가 숙청되었으며 70년대 후반 김정일 숭배가 위축되는 등 수상쩍은 정황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동유럽 외교문서들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박병엽의 설명과 다른 부분이 많이 관측되며 박병엽의 설명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1. 김동규가 1976년 6월에 체포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김동규는 1977년 10월까지도 정상적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 2. 리용무는 김정일 반대파가 아니라 오히려 김정일에게 지나치게 아부하고 그를 등에 업고 부화방탕하게 놀아서 오진우를 비롯한 김일성의 측근들의 미움을 받고 있던 사람이다. 이는 최주활, 이한영, 강명도 등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김정일 후계구도에 시비를 걸었다던 리용무는 1990년대에 복권되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냈고 김정은 정권 내내 원로로 대우받다가 2022년에야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었다.
- 3. 지병학은 사망 시점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을 잃은 상황이었고, 오진우, 서철 등이 김정일 숭배글을 많이 쓰는 동안 자신은 참여하지 않은 수상쩍은 정황이 있다. 마찬가지로 지경수 역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자리를 사망 시점에서 잃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병학과 지경수 모두 죽자마자 부고가 발표되었으며, 대성산혁명렬사릉과 애국렬사릉에 각각 안장되었으며 훗날 지경수도 대성산혁명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 이 두명은 조선대백과사전에도 등재가 되는 등 김정일의 예우를 받았다. 심지어 지병학은 국장까지 치러줄 정도였다. 이들이 보위부 조사, 당 검열을 받다가 죽었다면 이러한 예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 90년대 심화조 사건 때 죽었다가 복권된 문성술, 김기선, 피창린 등은 부고는커녕 화환을 보내줬단 뉴스 하나 없었으며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는 소식만 전해졌을뿐이다. 그리고 지경수에 대해서 자꾸 당검열위원장을 지냈다고 하는데 지경수는 호위총국 부국장이었다.
- 4. 장정환의 경우에는 북한에서도 그가 1977년 7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소환되었으며 함경북도로 좌천된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김정일의 최측근인 장성택의 삼촌이라는 말이 있는데 왜 김정일을 공격했는지 의문이며 나중에 복권되어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고 조선대백과사전에도 등재가 되었다. 김정일 승계에 시비를 건 인물이라면 김정일이 복권을 시켜줄 이유가 없다.
- 5. 김동규 본인부터가 반 김정일이었는가? 오히려 김동규는 1970년대 근로자 기고를 통해서 유일사상화 정책을 지지하면서 당중앙이란 호칭도 썼던 인물이다. 후계구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던 갑산파, 허봉학, 김창봉, 김광협 등이 줄줄이 숙청당하는 것을 봤으며 김일성 1인체제 공고화에 잘만 협조해오던 그가 갑자기 김정일을 들이박았다는 것 역시 이상하다.
- 6. 김정일 숭배 후퇴는 김동규 사건 이전부터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박병엽은 분명히 70년대 이전 조선로동당 내부 정보에 대한 많은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긴 하였으나 이너써클에 대한 그의 정보는 부정확한 것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가령 그는 김정일의 성혜림, 고용희의 관계를 부정하였고 김정철의 존재도 거짓말이며 김정남의 해외유학 역시 모략이라고 주장하며 이한영이 김정일의 처조카가 아니라고 봤으나 정작 이한영의 증언이 더 정확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박병엽의 증언은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2.3. 진상은?
강명도는 김동규 사건에 대해서 재밌는 증언을 제공하였다. 그에 따르면, 김동규가 1976년 6월에 김정일 후계구도를 너무 서두른다고 비판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김일성, 김정일이 다른 항일 빨치산 1세대들의 이목을 의식하여 일단 문제를 덮어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7년, 김정일을 등에 엎고 설치던 총정치국장 리용무와 총참모장 오진우의 갈등이 심해지자 김정일이 리용무를 팽하고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오진우를 강력 추천하여 오진우와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김동규의 과거 경력을 조작하여 1978년에 그를 숙청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1977년에 총정치국장에 임명된 것이 오진우가 아니라 서철이며 오진우가 2년 후인 1979년에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는 점, 김동규는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주석단에서 탈락해서 1977년에 이미 숙청당했다는 점[3] 등 약간의 오류를 제외하면 그의 설명은 그럴듯해보인다. 리용무의 전횡과 오진우와의 갈등에 대해서는 최주활, 김현식 역시 증언하고 있다.[4]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박병엽이 1970년대 후반에 숙청되거나 사망한 인물의 자세한 사정까진 모르고 그냥 뭉뚱그려서 설명한 것으로 보이며 김동규의 숙청과 리용무의 숙청 등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명균은 2017년의 논문을 통해서 흥미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김동규는 김일성의 충실한 심복이었고, 그가 김정일을 공격한 이유는 다름아닌 김일성의 의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1970년대 수차례 교시를 통해서 당집행기관의 행정대행주의, 행정식방법, 당세도 등을 비판하면서 김정일에게 갑자기 권력이 쏠리는 현상에 대해서 경계를 드러냈고, 김정일 역시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인정하면서 기민하게 대응했다. 김동규가 김정일을 공격한 것은 김일성의 이러한 불편한 심기, 1976년에 신설된 보위부의 가혹한 국내 탄압으로 인한 민심 이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의 김정일에 대한 악재들이 종합해서 벌어진 일종의 친위 쿠데타이며 김일성이 김동규가 1년 이상 계속 중용한 것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리용무의 숙청 역시 단순히 리용무의 개인 전횡의 문제가 아니라 김일성이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김동규를 토사구팽함으로 김정일이 후계자라는 것 자체는 확고히 하였다.
3. 결과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김동규는 지방으로 하방되었다가 거기서도 호화롭게 사는 것이 김일성에게 걸리는 바람에 대노한 김일성이 수용소에 처넣어서 1984년에 영양실조와 홧병이 겁쳐 죽었다고 한다. 물론 진실은 조선로동당 문서고 안에나 있을 것이다.어쨌거나 김정일은 일시적 위기를 맞이했지만 자신을 낮추면서 일시후퇴를 하였고, 간부정책에 대해서도 1977년 4월 14일, "각계각층과의 군중사업을 더욱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란 문건을 발표하면서 기존의 좌경적 오류를 비판했다. 다시 자신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굳히면서 1978년 말부터 김정일을 의미하는 당중앙, 유일적 지도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에 선출되면서 대외적으로도 후계자임이 공표되었다.
4. 참고문헌
- 강명도,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서울: 중앙일보사, 1995).
- 고명균(2017), 김정일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후계체제의 위기. 현대북한연구, 20(1).
-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 전쟁(서울: 명지출판사, 2000).
- 스즈키 마사유키,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서울: 중앙일보사, 1994).
- 정영철, 김정일 리더십 연구(서울: 선인, 2005).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한반도 절반의 상속인 김정일(서울: 중앙일보사, 1994).
[1] 조선로동당 직할 정보기관. 현재는 정찰총국으로 통합되었다.[2] 북의 간부사업이란 '인사정책'을 의미한다[3] 김중생 역시 김동규가 1978년에 숙청당했다고 주장했다.[4] 다만 김현식의 경우에는 오진우와 김정일이 1980년대 중반까진 좀 껄끄러웠다가 1987년 오진우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좋아졌다고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