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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고 전투 영어: Battle of Glasgow | |||
시기 | |||
1544년 3월 16일과 5월 24일 | |||
장소 | |||
글래스고 | |||
원인 | |||
헨리 8세와 손잡고 스코틀랜드 중앙 정부에 대립하는 지역 귀족에 대한 중앙 정부의 응징.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스코틀랜드 반란군 | |||
지휘관 | |||
결과 | |||
스코틀랜드 왕국군의 승리. |
1. 개요
1544년 3월 16일과 5월 24일, 스코틀랜드의 유아 여왕 메리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헨리 8세와 내통한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등과 맞붙은 전투.2. 상세
1543년 12월 15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장남인 에드워드 왕자와 메리 여왕의 결혼을 약조한 그리니치 조약을 파기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대표적인 친 잉글랜드파 인사인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제4대 클랜케언 백작 제임스 커닝햄은 에드워드 왕자와 메리 여왕의 결혼을 꿋꿋이 지지했다. 이에 의회는 두 사람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토벌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레녹스 백작은 1544년 3월 7일 메리 여왕의 어머니인 마리 드 기즈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무죄라고 호소하고 동료 귀족들이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하며 시간을 벌려 했지만, 섭정인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은 이미 토벌대를 이끌고 출진했다.1544년 3월 8일, 아란 백작은 보스웰 성에 포격을 가한 끝에 함락했다. 이에 레녹스 백작은 글래스고 시에서 동쪽으로 1마일 떨어진 글래스고 무어에서 군대를 집결해 맞서 싸울 태세를 갖췄다. 3월 16일, 아란 백작의 군대가 접근하자, 반란군은 역공에 나섰다. 전투는 처음에는 레녹스 백작 편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그의 병사 800명이 아란 백작의 군대를 거의 압도하는 듯 했고, 십지어 적의 대포를 탈취하기도 했다. 이때 토벌대에 함께 하던 킬마녹의 기사 로버트 보이드가 전장에 합류해 반격을 가하면서, 반란군은 패퇴했다. 이때 양측 모두 3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레녹스 백작은 덤버튼 성으로 피신했고, 아란 백작은 글래스고 시에 입성한 뒤 3월 26일 글래스고 주교의 성을 포위해 포격을 가했다. 이윽고 수비대가 항복하자, 글래스고에서 톨부스로 이어지는 길목에 저항군 지도자들을 교수형에 처하게 위한 교수대를 세웠다. 이후 전투의 승리를 이끈 로버트 보이드는 영지를 받고 보이드 가문의 작위 회복을 보상으로 받았다.
글래스고 전투 직후인 1544년 5월 7일, 초대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접수한 뒤 방화했다.(에든버러 방화) 1544년 5월 24일, 아란 백작은 글래스고 인근에서 글랜케언 백작 윌리엄 커닝햄과 또 다른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글렌케언 백작의 아들 앤드류 커닝햄과 캠버스키스의 기사 존 해밀턴이 전사했다. 그 후 레녹스 백작과 글랜케언 백작은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레녹스 백작 편에 선 자들은 반역자로 낙인찍혀 작위와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10년 후인 1554년 사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