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기반 피라미드 |
1. 개요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이란 개별 환자의 진료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현재 최선의 증거를 양심적으로 명시적이고 신중하게 사용해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치료법이 사용되기 위해선 통계적 검증이 필수라는 것으로 현대 의학 그 자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20세기 중후반까지의 의료행위는 과학적인 근거가 매우 빈약했다는 비평에 근거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 끝에, 근거중심의학은 근거중심의학이 대두되기 전에 매우 높은 권위를 가졌던 '전문가 의견'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등 근거의 질과 등급을 메겨 어떤 치료법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를 누구나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적용할 수 있게 하였다.EBM은 이상적인 최고의 의료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의료를 추구한다. 만약 어떤 신약 A가 나왔고, 이론적으론 이 약이 완벽해 보이고 동물실험, 시험관 시험에서의 성적도 매우 좋았다고 쳐보자. 당연히 그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은 얼른 이 기적의 신약을 복용하고 병을 치료하길 원할 것이다. 이 약이 "정말" 효과가 있고, 바로 환자들에게 지급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 임상에선 다르게 나타난다. 대규모 임상시험을 해봤더니 효과가 없다 나타날 수도 있고, 소규모 임상에선 문제가 없었고 효과가 좋았는데 대규모로 환자에게 적용했더니 드물지만 매우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으며, 효과가 있긴 하지만 더 저렴하고 오랜 세월 검증된 기존 치료제 B보다 효과가 낫다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다시 더 대규모로 연구하고, 더 정교한 연구를 실행하고, 더 큰 데이터가 누적되고 보니 또다시 "사실 A가 더 좋았네"로 뒤바뀔 수도 있다. 의사는 전능한 신이라면 A라는 약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환자에게 쓸 수 있겠지만 의사는 신이 아니다. 또 신이 아니기 때문에 온갖 위험부담-신약의 부작용, 신약 도입이 늦을 경우의 환자들의 기회비용, 나을게 없는데 더 비싼 약을 써서 가중되는 의료비-를 안게 된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결국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가용한 최선의 근거"를 기반으로 "최선의 진료"를 하는 것이다. 설사 나중에 더 최신의 근거가 기존의 근거를 뒤엎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2. 근거 수준
근거중심의학은 임상시험을 통한 통계적 유의성의 검증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잘 수행된 무작위 임상 연구를 종합해서 분석하는 메타 분석이나 체계적문헌고찰을 최고 수준의 근거로[1] 인정하고, 여러 논문과 연구를 종합했지만 시스템화된 분석을 하진 않은 문헌고찰을 그 바로 아랫 순위로 둔다. 다음은 잘 설계된 무작위 배정 임상 시험으로 근거 중심 의학의 핵심이며 대규모 코호트 연구, 환자-대조군 연구, 증례 연구, 증례 보고 등의 논문들이 뒤를 잇는다. 아이디어, 배경지식, 전문가 의견은 가장 낮은 수준의 근거이며 툭 하면 'XX 치료법 발견, 신약 개발은 언제?' 하면서 언론을 타고 마케팅에 써먹는 동물 연구, 시험관 연구 등은 그보다도 아래인, 사실상 근거로 쳐주지도 않는 수준이다.3. 근거중심의학의 영향
EBM이 도입되고 난 후 현대의학이 겪은 변화는 엄청나서 이전까지 멀쩡히 사용되어오던 수많은 치료법들이 근거 분석 결과 효과가 없거나 매우 떨어진다는 것이 드러나 폐기 수순을 밟는 등 의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비과학성을 최대한 떨쳐내고 명확하고 객관적인 원칙을 확립해낸 결과, 실험실이 아닌 실제 필드에서 적용된다는 의학의 특수성에도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며 일정한 질을 담보하는 표준화된 의학을 바로세울 수 있었다.이론적으로 완벽한 치료법, 또는 약물이라 하더라도 실제 적용을 했을 경우에는 효과가 미진하거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단계별 검증을 통하여 효과 및 부작용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사는 전지의 신이 아니므로 완전무결한 진료를 할 수 없다. 현대의 첨단 의학으로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의사가 모든 의학 지식을 전부 섭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리된 최신의 근거를 기반으로, 최선의 진료를, 모든 환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근거중심의학의 목표이다. 근거중심의학의 이론상 이상적으론 대학병원의 교수나, 동네 앞의 의원이나 같은 수준의 진료가 이루어진다. 최신의 근거를 기반으로 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진료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의사는 표준화된 진료를 제공하고 환자는 "과연 이 의사가 돌팔이는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론 의사간에 실력과 지식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 근거중심의학에 기반한 의사라면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다" 란 영역에선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특정 증상으로 내원한 환자에 대해선 대학병원이나 의원이나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고, 문진과 검사를 진행하고, 같은 치료를 하며 이론상 진료의 결과와 결론도 같다. 이론적으론 대학병원과 의원의 차이는 의사의 실력이 아니라 단순히 얼마만큼 의료 환경이 제공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기존에 경험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사용해 오던 치료법들도 모두 검증을 거친 후 통계적 유의성을 보인 치료법들만이 살아남았으며,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된 경우에는 위약, 기존의 치료법들과 효과 및 부작용을 비교하고 의미가 있는 경우에만 공인받게 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각 의학 교과서에는 각 질환의 증상이 나타나는 비율, 치료법에 따른 치료율, 이환율, 사망율, 유의한 수준으로 나타나는 부작용과 그 비율이 대부분 기재되어 있고, 지속적인 업데이트, 즉 논문을 통해 수정해 나간다. 이에 대한 예시를 각각 들어 보겠다. 기존에 사용하던 치료법 A가 있다고 하자. A는 기존에 사용해 오던 치료법으로,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해 오면서 효과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 오던 방법이다. 하지만 A가 효과를 보이던 병에 걸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별과 연령, 기타 질환 및 상태 등의 조건을 동등하게 맞춘 상태에서, 절반은 A를, 절반은 똑같이 생긴 위약(placebo, 가짜약)을 누구한테 뭘 주었는지 치료자도, 환자도 치료 과정 중에는 모르게 주고, 그 과정을 모두 기록한 다음 정리했다고 하자. 이것을 수치화시켜 통계를 돌렸을 때 '유의하지 못하다', 즉 차이가 없다는 결과가 나오고, 이 연구가 사람들이 신뢰하는 학술지에 실리며, 동일한 연구가 재생산되었을 경우, A는 퇴출된다. 오랜 경험과 믿음과 역사가 통계를 이기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2]
[1] 이런 문헌 고찰을 종합하는 진료지침을 더 상위의 근거로 두기도 한다.[2] 치료법이 있는 질병에 대해 위약을 주는 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위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A약 이전에 가장 높은 효과로 알려진 약물을 대신 처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