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병장, 권기수
성명 | 권기수(權夔洙) |
생몰 | ? ~ 1896년 9월 1일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평안북도 강계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권기수는 1896년 1월 유인석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가담하여 중군장(中軍將)을 맡았으며, 전국 팔도에 격문을 전달하고 각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유인석이 관군의 추적을 피해 서간도로 이동할 때 동행했으나 요동에서 청나라 장수 왕무림(王茂林)의 압박이 심하자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로 돌아가려 했다. 이에 따라 이범직(李範稷) 등 동료 의병 11명과 함께 다시 강을 건너 귀국하다가 체포되어 1896년 9월 1일에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권기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권기수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권쌍라(權雙羅), 권쌍희(權雙喜), 권기수(權夔洙) |
자 / 호 | 성후(聖厚) / 청계(靑溪)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93년 1월 21일 |
충청도 은진현 대조곡면 용산리 (現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 |
사망 | 1922년 1월 9일 |
함흥형무소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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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수는 1893년 1월 21일 충청도 은진현 대조곡면 용산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에서 독립유공자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 때 활약한 아버지 권종해와 어머니 밀양 박씨 박기석(朴基錫)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을미의병을 일으킨 권인규의 손자이기도 하다. 출생 후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 권종룡(權鍾龍)에 입양되었다.
그는 권종해의 의병에 가담해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제 헌병대에게 잡혀 무수한 고통을 당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동지들과 함께 영월·평창·정선지역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게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1월 9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기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추밀공파 시창(始昌)계 3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