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세이키 くろだせいき | 黒田清輝 | Kuroda Seiki | |
출생 | 1866년 8월 9일,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히가시센고쿠쵸우 |
사망 | 1924년 7월 15일 (향년 57세), 도쿄부 도쿄시 |
국적 | 일본 |
직업 | 화가 |
학력 | 동경미술학교 교수 |
관직 | 종3위, 자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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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서양화가, 정치인. 일본에 서양의 미술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하였기에 ‘일본 근대미술의 아버지’, ‘일본 근대미술사의 빛나는 거장’으로 불린다.2. 생애
1866년 가고시마에서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 초반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였으며, 1884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도중에 공부를 포기하고 인상주의 화가 '라파엘 콜랭(Raphael Collin) 스튜디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1893년, 9년에 걸친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쿠로다는 일본식 인상주의 화풍인 외광파(外光派)[1]를 들여와 일본 서양화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쿠로다를 중심으로 한 외광파 그룹은 기성 서양화 흐름에 도전하는 ‘신파(新派)’로 불리며 급격하게 성장했고 마침내 화단의 주도권을 잡았다.
쿠로다는 1896년 메이지 미술회의에서 ‘구파(舊派)’와 결별해 '백마회(白馬會)'를 결성하고, 그 해 동경미술학교의 서양화과 개설과 함께 교수로 취임함으로써 메이지 중기 이후 일본 서양화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지(智), 감(感), 정(情)〉 3부작을 출품하여 은메달을 받았으며, 또한 1907년에 창설된 문부성미술전람회와 그 후신인 제국미술원전람회의 심사위원을 맡는가 하면, 1913년 국민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22년에는 제국미술원 원장에 취임하고, 1923년에는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말년까지 꾸준하게 미술계 지도자로 활동했다.
3. 작품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은메달을 획득한, 차례대로 〈지(智), 감(感), 정(情)〉 3부작. |
호반 [2] |
4. 여담
-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미술을 배우러 간 한국의 유학생들은 대부분 동경미술학교에 다녔었는데, 이 당시 구로다 세이키가 동경미술학교 교수로 있었기에 그곳으로 서양화를 배우러 온 한국 유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미술계의 요직에 자리잡고,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심사위원이 되어서 당시 한국미술계를 장악했으니, 근대 초기 한국미술을 얘기함에 있어 구로다의 영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