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원제: Котлован(구덩이)[1]안드레이 플라토노프(Андрей Платонов, 1899-1951)가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집필한 디스토피아적 정치 풍자 소설이다. 스탈린 시대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며 산업화와 농업의 집산화가 강제적으로 추진되던 시절을 배경으로, 소련의 현실을 날카롭고도 그로테스크한 비유와 함께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공동 주택을 짓기 위해 거대한 구덩이를 파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와 인근 마을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농업 집산화 과정이 교차되어 서술되며,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거창한 이념이 어떻게 개인의 삶과 영혼을 파괴하는지를 독특한 언어와 암울한 상징을 통해 고발한다.
작가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으며, 1969년 서독에서 먼저 간행된 뒤 1987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시행된 이후에야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출간될 수 있었다.
2. 개요
Не расти, девочка, затоскуешь.
자라지 말거라, 애야, 그럼 슬퍼만 질 테니.
"노동의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사색에 잠겼다", 즉 툭하면 멍을 때린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 보셰프는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아 헤맨다. 그는 곧 '전(全) 프롤레타리아의 집'(общепролетарский дом)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 즉 거대한 '구덩이'를 파는 건설 현장에 도착하여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자라지 말거라, 애야, 그럼 슬퍼만 질 테니.
노동자들은 맹목적인 열정으로 땅을 파지만, 그들의 노동은 점차 의미를 잃고 공허한 행위로 변질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고아 소녀 나스탸를 발견하고, 이 소녀를 미래의 행복한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여기며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인근 마을의 콜호스(집단농장) 설립 과정으로 넘어가면서 더욱 잔혹해진다. '부농(쿨라크) 계급의 절멸'이라는 구호 아래, 농민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 이주당하며 무자비하게 제거된다.
결국, 노동자들이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던 소녀 나스탸마저 병으로 죽게 된다. 미래의 상징이 사라지자, 그들이 파던 거대한 구덩이는 더 이상 새로운 삶의 터전이 아닌, 죽은 소녀를 위한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버린다. 소설은 노동자들이 절망 속에서 소녀의 무덤을 더욱 깊게 파내려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3. 등장인물
- 보셰프 (Вощев): 소설의 주인공. "실존의 의미"와 "진리"를 찾는 지식인 노동자. 집단주의적 광기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소외된 개인의 양심을 대변한다. 보셰프의 여정은 이데올로기가 답해주지 못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 치클린 (Чиклин): 강력한 육체를 지닌 원초적인 프롤레타리아. 말보다 행동이 앞서며, 구덩이를 파는 데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고아 소녀 나스탸를 발견한 장본인이면서 동시에 농업 집산화 과정에서는 폭력의 집행자가 되기도 한다. 혁명의 순수한 힘과 그것이 변질될 때의 파괴력을 동시에 상징한다.
- 나스탸 (Настя)[2]: 부르주아 모친을 둔 고아 소녀. 노동자들이 건설하려는 유토피아, 즉 공산주의의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어른들에게 배운 공산주의 구호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자신의 모친마저 부르주아였으니 잘 죽었다고 평가하는 모습을 보이나, 결국 병으로 죽고 만다. 나스탸의 죽음은 체제가 약속한 미래의 허구성과 프로젝트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한다.
- 프루셰프스키 (Прушевский): '전 프롤레타리아의 집'을 설계한 기사(엔지니어). 자신의 추상적인 설계가 빚어내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죄책감과 절망을 느낀다. 지식이 비인간적인 목적에 동원되는 상황 속 지식인 계층의 비극을 상징한다.
- 자체프 (Жачев):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 수레를 타고 다니며 사회에 대한 냉소와 분노를 쏟아낸다. 혁명으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의 원한과 절망을 대변하는 목소리다.
- 사프로노프 (Сафронов): 당의 노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활동가. 공허한 당의 구호와 관료주의적 언어를 남발하며 이데올로기의 화신처럼 행동하지만, 결국 숙청의 대상이 되어 제거된다.
4. 줄거리
주인공 보셰프는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후, 거대한 구덩이를 파는 노동 현장에 합류한다. 그곳에는 치클린, 자체프 등 다양한 노동자들이 오직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맹목적으로 땅을 파고 있다. 기술자인 프루셰프스키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과 인간적 비용에 대해 회의한다. 어느 날, 치클린은 버려진 타일 공장에서 죽어가는 여성의 딸인 고아 나스탸를 발견해 데려온다. 노동자들은 이 아이를 미래 세대의 상징으로 여기고 그녀를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일한다.치클린을 포함한 노동자 파견대가 인근 마을의 농업 집산화를 돕기 위해 파견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쿨리크(부농) 절멸'이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농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저항하는 이들을 가차없이 처리한다. 소설은 부농으로 지목된 가족들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뗏목에 실려 바다로 떠내려가는 장면을 무미건조하게 묘사하며 시대의 잔혹성을 극대화한다. 이 과정에서 이념을 외치던 활동가 사프로노프도 제거되는 등, 혁명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삼킨다.
집산화 작업을 마치고 구덩이로 돌아온 노동자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이었던 나스탸는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을 맞는다. 소녀의 죽음으로 '전 프롤레타리아의 집' 건설이라는 목표는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치클린은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을 깨고 나스탸를 구덩이의 한쪽에 묻는다. 그리고 그는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소녀의 무덤을 더욱 깊고 넓게 파내려간다. 유토피아를 위한 기초 공사는 결국 거대한 무덤 파기로 귀결된다.
5. 평가
그 내용으로 인해 소련 시절 러시아에서는 금서 처분을 받았으나, 오늘날에는 20세기 소련 문학에 있어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제목인 '구덩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상징이며,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이라는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구덩이의 시작은 거창했지만, 그 끝은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공허함과 죽음뿐이다. 즉, 구덩이를 파는 행위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무한히 파괴하는 행위의 허무함을 상징한다. 등장인물들[3]은 끊임없이 '진리', '의미', '물질의 영혼'을 찾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깊은 실존적 공허함(пустота)과 우울함은 이데올로기가 앗아간 자리에 남은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형상화한다.
플라토노프의 문체는 이 소설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다. 그는 관료주의적인 공문서 속 언어, 정치 구호, 시골 방언, 철학적 사유를 기괴하게 뒤섞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 문법적으로 어색하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이 언어는, 이데올로기가 현실과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왜곡하고 파괴하는지를 언어 자체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플라토노프 식 언어의 파괴와 창조는 "구덩이"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며 문학 평론가들은 이를 '소외(estrangement)' 기법의 극치라고 평가한다.
소설 "구덩이"는 단순한 정치 풍자를 넘어 유토피아를 향한 전체주의적 기획 자체의 본질을 파헤친다. 노벨상 수상 작가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는 플라토노프를 "카프카나 조이스를 능가하는 20세기 최고의 작가"라고 극찬하며, 그의 작품이 "전체주의가 인간의 영혼에 가한 영향을 가장 심오하게 그려냈다"고 평가했다.[4][5]
6. 여담
- 작품은 1930년에 완성되었으나, 그 내용 때문에 출판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플라토노프는 이 작품으로 인해 당국의 감시와 비판에 시달렸으며, 그의 다른 작품들도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다.
- 플라토노프는 원래 기사였으며 토지 개간 전문가로 일했다. 플라토노프는 소련 전역을 다니며 관개 및 전기화 사업에 참여했고, 이때의 경험은 소설 속 대규모 프로젝트의 사실적 묘사에 기여했다. 혁명의 이상을 믿었음에도 그 이상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끔찍한 방식을 목격하며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플라토노프는 이 시절부터 인간 개개인이 집단 속으로 잠식되는 모습을 꿰뚫어보았고, 이는 "구덩이"에 반영되었다.
[1] 코틀로반(котлован)은 정확히 말하자면 건물을 짓기 위해 토대를 다지고자 깊이 판 구덩이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두더지 구멍 같은 일반적인 작은 구멍/구덩이는 야마(яма)라고 한다. 영어판 제목도 'the Foundation Pit'이다.[2] 나탈리야(Наталья)의 애칭.[3] 플라토노프의 인물들은 전형적인 성격보다는 특정 사상이나 계층을 상징하는 경향이 있다.[4] 출처: Less Than One: Selected Essays by Joseph Brodsky[5] 여담으로 플라토노프는 정치적 글쓰기, 반 전체주의적 태도, 소련에 대한 기대 이후 실망 등 여러 점에서 조지 오웰과 닮았기에 여러 서구 비평가들은 플라토노프를 "소련의 조지 오웰"이라 부르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두 사람 모두 폐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