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3 14:06:01

고려혁명군의 러시아 농민 살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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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러시아인 살해 사건2.2. 장쭤린의 봉천군벌에 의한 무장해제
3. 파장4. 관련 문서

1. 개요

김규식의 고려혁명군이 러시아 농민들을 살해하고 만주로 도망간 사건. 이들은 곧 장쭤린봉천군벌에게 무장해제됐다. 도망간 부대들은 김좌진과 연계된 부대로 알려졌으나 윤상원의 논문에 의하면 이 점은 확실하지 않다.

2. 상세

2.1. 러시아인 살해 사건

1922년 11월 15일경 김규식의 부하들에 의해 러시아 농민 4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됐다. 이 사건에 의해 김규식의 고려혁명군은 적군에게 무장해제될 예정이었으나 이에 거부하고 만주로 도망갔다.

러시아인 살해 사건에 대해선 일본의 기밀자료와 독립유공자 김규면의 기록이 존재한다.
연해주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김규식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부대원을 이끌고 중국령으로 넘어갔다. 김규식은 연해주해방전쟁이 끝나가던 1922년 11월 15일경 수이푼 재피거우에서 부하 군인이 러시아인 4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적군의 반감을 사서 무장해제를 강제당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마침내 부하군인을 이끌고 서간도 안도현 방면으로 출발했다
일본 기밀자료 요약[1]
김규식은 로씨야농민 네사람을 총살하면서 성명하기를 우리는 붉은 주권을 반대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총살한다고 하고 그 즉시로 군대를다리고 중국 땅으로 넘어서 도주하였다
김규면의 기록[2]

2.2. 장쭤린의 봉천군벌에 의한 무장해제

일본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김규식은 김좌진과 합류하여 중국 목능현 팔점(八站, 馬橋河)에 도착했다고 한다. 윤상원은 이에 대해 김좌진이 김규식 부대에 합류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김규식이 원래 군정서군(軍政署軍)의 장교였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중국에서 김좌진과 연계하여 활동하려 한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3] 하지만 김규식의 군대는 장쭤린봉천군벌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金佐鎭과 金圭植이 이끄는 약 400명의 부대는 1922년 12월 상순 露領 松田關으로부터 서간도로 이동할 목적으로 穆陵縣 八站子 부근을 통과할 때 그 지역 中國б衛團으로부터 김좌진과 김규식은 보위단내에, 기타는 부근 부락에 억류되었다. 수일후 하얼빈 방면으로부터 다수의 군대가 철도열차로 八站에 도착하자 동부대로부터 다시 정식으로 무장해제를 명령받았는데, 김좌진 이하 간부는 무장해제의 면제와 중국령 행동의 묵인에 관해 극력 의뢰하여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중국군대에서는 오직 보위단에 편입하여 국경경비에 종사하는 경우에만 특별히 채용하할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무력으로 무장을 해제한다고 엄령을 내렸다. 그러나 보위단에 입단을 희망하는 자가 없어 마침내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 전부를 인도했다. 인도할 때에는 무기 전부를 한 무더기로 하고 거기에 中韓 兩國旗를 세워 빈손의 선인부대는 그 후방에, 중국군대는 전면에 열석하여 선인은 총기와 중국군대에 대한 경례를 하는 인도식을 거행했다. 무기의 수량은 장총 약 400정, 권총 30정, 폭탄 약 300개, 기관총 3정, 군도 30본, 소총탄 약 1만6천발, 기관총탄약 1만발이었다. 무기 인도 후 김좌진은 부하 전부를 한 곳에 집합시켜 “露支領 어디에서도 무장행위를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의 추세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차제에 해산하고 금후의 행동은 각자의 자유에 맡긴다. 그럼에도 종래의 행동을 돌아보아 고향으로 귀향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는 최근 조직된 연해주한족노동회에 입회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는 것이 가하다. 또한 장래 기회가 있을 때 결속하여 국사에 분주할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고별사를 하고 해산에 이르게 되었다. 약 400명 중 250명은 연해주노동회 혹은 추풍지방에서 농업 기타에 종사하고 약 50명은 목릉현 八面通 지방에 들어가 농가의 고용이되고, 약 100명은 간도지방의 家鄕으로 귀환하여 생업에 나섰다. 12월 중순 삼삼오오 이산한 김좌진과 김규식 기타 중요한 간부는 연해주노동회에 들어간다고 하며노령으로 향했다고 한다.[4]

3. 파장

연해주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부대를 이끌고 중국령으로 달아났다가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뿔뿔이 흩어진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사회주의적 빨치산들에게는 더 이상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다. 이후 그들에게 민족주의자는 반혁명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소비에트 적군 당국으로서는 이제 강압적으로라도 한인 빨치산부대에 대한 무장해제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임병극 부대와 강국모 부대가 소비에트 적군에 의해 강압적으로 무장해제되었다.[5]

4. 관련 문서



[1] 윤상원. (2011). 시베리아내전 종결과 한인빨치산부대의 해산. 역사연구, (20), 165#[2] 윤상원. (2011). 시베리아내전 종결과 한인빨치산부대의 해산. 역사연구, (20), 166#[3] 윤상원. (2011). 시베리아내전 종결과 한인빨치산부대의 해산. 역사연구, (20), 165~166#[4] 윤상원. (2011). 시베리아내전 종결과 한인빨치산부대의 해산. 역사연구, (20), 166#[5] 윤상원. (2011). 시베리아내전 종결과 한인빨치산부대의 해산. 역사연구, (20),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