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토크 Gangto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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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ffffff> 시기 | 문장 | ||||
| <colbgcolor=#DC143C> 국가 | <colbgcolor=#fff,#191919> | ||||
| 주 | 시킴 | ||||
| 면적 | 19.3㎢ | ||||
| 인구 | 100,290명[A] | ||||
| 시간대 | UTC+5:30 | ||||
1. 개요
인도 시킴주의 주도로 히말라야 의 높은 봉우리에 위치하고 일년 내내 온화한 온대 기후를 지니고 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칸첸중가가 강토크 서쪽에 위치해 있다.2. 어원
"Gangtok"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대부분은 시킴어로 "언덕 꼭대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3. 역사
시킴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토크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다만 강토크와 주변 지역은 소규모 부족과 토착 왕국들이 있었다고만 전해져 있다. 1642년 바부르 왕조 계열의 천체 지도자 푼초그 남걀이 시킴 왕국을 창건했다. 강토크는 당시 중심 거점은 아니었지만 점차 행정적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8세기 이후 시킴 왕국에도 영국의 마수가 뻗어오기 시작하였다. 영국이 티베트를 패배시킨 후, 강토크은 19세기 말 티베트와 영국령 인도 간 무역의 주요 중간 기착지가 되었다.1947년 인도가 독립 한 후, 시킴은 강토크를 수도로 하는 민족 국가가 되었다. 시킴은 초걀과 당시 인도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독립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인도의 종주권 하에 놓였다. 이 시기에도 영국 식민지 시절과 마찬가지로 인도와 티베트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나 1959년 중국의 티베트 탄압으로 무역이 감소했고 1962년 중인전쟁 이후 무역로는 봉쇄되었다. 1950~1970년대 민주주의 요구와 지역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발생하였고 1975년 국민투표를 통해 시킴이 인도에 합병되면서 강토크는 공식적으로 주도로 지정되어 정치적, 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4. 경제
강토크의 경제는 대규모 제조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시계 제조, 국산 알코올 및 수공예품 분야에서 번창하는 가내 산업을 가지고 있다.5. 관광
- 룸텍 사원 (རུམ་ཐེག་དགོན་པ) : 원래 룸텍 수도원은 티베트 카르마파 전통의 주요 수도원 중 하나로, 티베트 내에 있었으나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 달라이 라마와 함께 많은 승려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현재의 시킴 강토크에 재건되었다. 수도원 내부는 법당, 승려 거주 공간, 명상실, 도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티베트 불교 경전과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 반자크리 폭포와 에너지 파크 (Banjhakri Falls and Energy Park) : ‘Ban Jhakri’는 티베트어 및 나가르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숲의 주술사'를 의미한다. 폭포 주변은 자연 정원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강토크 방문객에게 휴식과 명상 공간 제공하고 있다.
- 엔체이 사원 (Enchey Monastery) : 1909년, 닙마파 승려 부드히케 소속 고승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킴 왕국의 수도 강토크 주변의 불교 수행과 의식을 위해 세워졌으며, 왕실의 후원 아래 성장했다.
[A] 2011년 1월 1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