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6년 9월 11일 |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송동리 | |
사망 | 1936년 9월 17일 |
평안남도 강서군 |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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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기팔은 1896년 9월 11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송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재학하던 의학생으로, 서창림(徐昌林), 김정현(金鼎鉉), 이정연(李鼎淵) 등과 만나 3월 8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3월 8일 정오경, 함종공립보통학교에 5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일장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을 인솔하여 시위 행진을 시작했다. 이에 군중들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그 수가 2천 명에 달했다.강기팔은 시위를 벌이기 전에 미리 헌병출장소장인 복영(福永) 상등병에게 시위 계획을 통고하여 무력으로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시위군중에게도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일관할 것을 호소했다. 일본 헌병들은 시위 행렬을 보고 무력으로 개입하지 않았지만 주동자의 명단을 작성했다. 군중이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마치고 해산한 뒤, 일본 헌병들은 미리 파악해둔 주동자를 체포되었다. 이때 강기팔도 가족들과 함께 헌병출장소로 연행되어 철야 신문을 받았다. <독립운동사자료집>에 따르면, 헌병 한 사람이 그의 머리에 오물을 퍼붓고 시계를 찼던 그의 왼손을 구둣발로 짓밟아, 깨진 시계유리 파편이 동맥을 파열시키는 바람에 그가 실신해버렸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그는 고등법원에 항소해 자신은 주모자가 아니며 선동한 사실도 없으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은 군중이 자신을 신지식인으로 보고 억지로 낭독하게 한 것이었다며, 이는 곽용학(郭用學)이 자신을 무고한 것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피고가 자기의 사실 이하 것을 변해하여 원심의 직권에 속하는 증거의 취사 판단 및 사실 인정을 비난하는 데에 귀착하므로 취할 것이 못된다."고 보고 이를 기각하고 형을 확정지었다. 강기팔은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다가 1936년 9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강기팔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