䢘 땅이름 수 | |||||||
부수 및 나머지 획수 | <colbgcolor=#fff,#1f2023> 辵, 6획 | 총 획수 | <colbgcolor=#fff,#1f2023> 10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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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음독 | - | ||||||
일본어 훈독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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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중국어 | - | ||||||
* 연한 빨간색으로 표기된 신자체는 본래 한자가 비상용한자임을 나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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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䢘는 '땅이름 수'라는 한자로, 뜻은 불명이다.2. 상세
한국에서만 쓰이는 고유한자이다.조선시대 지리서(地理類) 수성지(水城誌)에 따르면 운서(韻書)에는 없는 한자이며 세속에서 전하기를 '䢘'는 음과 뜻이 모두 '守'[1]와 같다라고 기록되어있다.
한국고유한자 䢘는 '守(울타리)+辶(邊,가장자리)'의 의미를 가진 회의자(會意字)라는 견해가 있다.[2]
고려사에는 가라(加羅)라는 고유어로 기록되어 있다.[3][4][5]
邊와 같은 의미의 한자라는 견해가 있었다.[6]
[1] 지킬 수[2] 韓國 固有漢字 구성요소 辶의 의미와 특수성 형성 배경, 이건식, 2013[3] 杆城縣本高句麗䢘城郡【一云加羅忽】, 新羅景德王, 改爲守城郡.
간성현(杆城縣)은 본래 고구려의 수성군(䢘城郡)【가라홀(加羅忽)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 수성군(守城郡)으로 고쳤다.
— 《고려사(1451)》 〈지리지〉 中 간성현 #[4] 신라의 지명표기 '豢猳縣'과 고구려의 지명표기 '猪䢘穴縣'의 대응에서 '豢=䢘, 猳=猪'등의 관계를 추출할 수 있다. 따라서 䢘는 '豢'의 의미, 즉 '가축을 기르다'의 의미가 될 것이다. - 중략 - 訓蒙字會에 나오는 어리圈는 '병아리 따위를 가두어 기르는 물건. 싸리나 가는 나무로 채를 엮어 둥글게 만든다.'는 뜻을 가진 것인데, 이 '어리'의 경상북도 방언이 표준국어대사전에 '가래'로 실려있는 것이 주목된다. 䢘城郡과 '加阿忽/加羅忽'의 대응에서 보여지는 '加阿忽/加羅忽'가 바로 현대의 경상북도 방언 '가래'의 선대형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살펴본다면, 한국 고유한자 䢘는 '단순히 지키다'의 의미를 표현하기보다는 '지키는 울타리' 정도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건식, 2013>[5] 일각에서는 경덕왕때 경계를 뜻하는 '辶'를 뺀 이유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었으나 삼국이 통일되고 나서는 이러한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6] 加阿(䢘) (중략) 중세한국어의 ᄀᆞᆺ(邊)이나 골디어의 kera(邊)과 유사. <이기문, 1981:78>
加阿는 중세어 'ᄀᆞ邊'가 소급할 어떤 어형이 될 것이므로 加阿忽은 (중략) '가사골, 갓골'형에 이어지는 지명이다. <송하진, 1993:67>
䢘는 守와 邊을 조합해서 만든 글자로 보인다. 곧 邊을 辶으로 간략화 한 것이다. <송하진, 1993:185>
邊을 생략해서 쓴 것이 䢘이고, 䢘를 다시 생획한 것이 过이다. 䢘는 '守辵'의 뜻을 가지는 會意자이다. <金沢庄三郞, 1994:62>
그러나 위 주장들은 '守'와 뜻이 통한다는 여러 사서의 기록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간성현(杆城縣)은 본래 고구려의 수성군(䢘城郡)【가라홀(加羅忽)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 수성군(守城郡)으로 고쳤다.
— 《고려사(1451)》 〈지리지〉 中 간성현 #[4] 신라의 지명표기 '豢猳縣'과 고구려의 지명표기 '猪䢘穴縣'의 대응에서 '豢=䢘, 猳=猪'등의 관계를 추출할 수 있다. 따라서 䢘는 '豢'의 의미, 즉 '가축을 기르다'의 의미가 될 것이다. - 중략 - 訓蒙字會에 나오는 어리圈는 '병아리 따위를 가두어 기르는 물건. 싸리나 가는 나무로 채를 엮어 둥글게 만든다.'는 뜻을 가진 것인데, 이 '어리'의 경상북도 방언이 표준국어대사전에 '가래'로 실려있는 것이 주목된다. 䢘城郡과 '加阿忽/加羅忽'의 대응에서 보여지는 '加阿忽/加羅忽'가 바로 현대의 경상북도 방언 '가래'의 선대형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살펴본다면, 한국 고유한자 䢘는 '단순히 지키다'의 의미를 표현하기보다는 '지키는 울타리' 정도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건식, 2013>[5] 일각에서는 경덕왕때 경계를 뜻하는 '辶'를 뺀 이유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었으나 삼국이 통일되고 나서는 이러한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6] 加阿(䢘) (중략) 중세한국어의 ᄀᆞᆺ(邊)이나 골디어의 kera(邊)과 유사. <이기문, 1981:78>
加阿는 중세어 'ᄀᆞ邊'가 소급할 어떤 어형이 될 것이므로 加阿忽은 (중략) '가사골, 갓골'형에 이어지는 지명이다. <송하진, 1993:67>
䢘는 守와 邊을 조합해서 만든 글자로 보인다. 곧 邊을 辶으로 간략화 한 것이다. <송하진, 1993:185>
邊을 생략해서 쓴 것이 䢘이고, 䢘를 다시 생획한 것이 过이다. 䢘는 '守辵'의 뜻을 가지는 會意자이다. <金沢庄三郞, 1994:62>
그러나 위 주장들은 '守'와 뜻이 통한다는 여러 사서의 기록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