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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FC/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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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성남 FC
유소년 풍생고등학교 축구부
주요 인물 현재 선수단 | 최철우 감독대행 | 코칭 스태프
역대 역대 감독 | 역대 주장 | 레전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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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화 시절
1.1. 개요1.2. 시즌별 일람1.3. 변천사
1.3.1. 일화 천마 (1989~1995)1.3.2. 천안 일화 천마1.3.3. 성남 일화 천마1.3.4. 시민 구단 성남 FC로의 전환
1.4. 통일교와 일화 천마1.5. 여담
2. 우승 엠블럼

[clearfix]

1. 일화 시절

파일:성남 일화 천마 로고.svg
성남 일화 천마
SEONGNAM ILHWA CHUNMA
정식 명칭 성남 일화 천마 프로 축구단
영문 명칭 Seongnam Ilhwa Chunma Football Club
법인명 ㈜통일스포츠
소속 리그 K리그 클래식
구단 형태 기업 구단
창단 1989년 3월 18일([age(1989-03-18)]주년)
매각 2013년 12월 9일([age(2013-12-09)]주년)
최종 경기 2013년 11월 27일, 광양축구전용구장, vs 전남 드래곤즈
구단명 변천 일화 천마 (1989~1995)
천안 일화 천마 (1996~1999)
성남 일화 천마 (2000~2013)
연고지 변천 서울특별시 (1989~1995)
충청남도 천안시 (1996~1999)
경기도 성남시 (2000~2013)
홈구장 변천 동대문운동장 (1989~1995 / 22,706석)
천안오룡경기장 (1996~1999 / 20,000석)
성남종합운동장 (2000~2004, 2009 / 21,149석)[1]
탄천종합운동장 (2005~2008, 2010~2013 / 16,867석)[2]
상징색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매각 당시 주요 인물
구단주 문국진
단장 박규남
감독 안익수
우승 기록
K리그1
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
(7회)
1993, 1994, 1995, 2001, 2002, 2003, 2006
FA컵
파일:대한민국 FA컵 트로피.svg파일:대한민국 FA컵 트로피.svg
(2회)
1999, 2011
리그컵
(3회)
1992, 2002, 2004
슈퍼컵
(1회)
2002
AFC 챔피언스 리그
파일:ACL 트로피.svg파일:ACL 트로피.svg
(2회)
1995, 2010
아시안 슈퍼컵
(1회)
1996
아프로-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회)
1996
A3 챔피언스컵
(1회)
2004
홍콩 구정컵
(1회)
2012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1회)
1999

1.1. 개요

파일:BZlPNOECQAAi84U.jpg
1989년 통일교 교주 문선명에 의해 창단된 축구단이다. K리그1 두 번의 3연패와 7회의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한 리그 최고의 명문팀이었으나, 구단에 큰 애착을 보인 구단주 문선명이 사망하면서 2013년 말 성남시에 인수되어 시민구단으로 전환되었다.
일화 천마 프로축구단 20년사

1.2. 시즌별 일람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ffe462> 파일:성남 일화 천마 로고.svg성남 일화 천마
시즌별 일람
}}} ||
시즌 리그 FA컵 ACL CWC
디비전 리그 순위 경기 승점
1989 1부 한국프로축구대회 5 40 6 21 13 44 52 -8 33 - - -
1990 한국프로축구대회 6 30 7 10 13 28 40 -12 24 - - -
1991 한국프로축구대회 5 40 13 11 16 56 63 -7 37 - - -
1992 한국프로축구대회 2 30 10 14 6 27 21 +6 34 - - -
1993 한국프로축구대회 1 30 18 0 12 35 23 +12 68 - - -
1994 코리안리그 1 30 15 9 6 42 30 +12 54 - 4강 -
1995 코리안리그 1 28 13 9 6 36 25 +11 48 - 우승 -
1996 한국프로축구대회 8 32 8 8 16 52 63 -11 32 8강 준우승 -
1997 한국프로축구대회 8 18 2 7 9 19 31 -12 13 준우승 - -
1998 K-리그 10 18 5 0 13 17 32 -15 11 8강 - -
1999 K-리그 10 27 10 0 17 34 44 -10 23 우승 - -
2000 K-리그 3 29 19 0 10 47 38 +9 42 준우승 - -
2001 K-리그 1 27 11 12 4 35 20 +15 45 8강 - -
2002 K-리그 1 27 14 7 6 43 32 +11 49 4강 조별 리그 -
2003 K-리그 1 44 27 10 7 85 50 +35 91 16강 - -
2004 K-리그 9 24 7 8 9 23 28 -5 29 32강 준우승 -
2005 K-리그 3 25 12 7 6 41 26 +15 43 16강 - -
2006 K-리그 1 29 17 7 5 46 26 +20 49 32강 - -
2007 K-리그 2 28 16 7 5 44 22 +22 55 16강 4강 -
2008 K-리그 5 27 15 6 6 46 23 +23 51 8강 - -
2009 K-리그 2 33 16 7 10 44 38 +6 45 준우승 - -
2010 K리그 4 30 14 9 7 49 28 +21 48 8강 우승 4위
2011 K리그 10 30 9 8 13 43 47 -4 35 우승 - -
2012 K리그 12 44 14 10 20 47 56 -9 52 16강 16강 -
2013 K리그 클래식 8 38 17 9 12 51 42 +9 60 16강 - -

1.3. 변천사

1975년, 문선명 통일그룹 총재는 축구단 창단을 구상한다. 이후 통일그룹은 1986년부터 공식적으로 프로축구단 창단 계획을 밝혔으며 그 당시 체육부가 1987년부터 8개팀의 프로리그를 실현시킨다는 방안을 검토할 무렵 충청도 연고 구단 물망에 올랐으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최순영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 후 1987년 11월 12일, 최순영 회장이 사퇴하고 이듬해 1월 27일 김우중 회장이 취임한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창단이 추진되었다. 일화 천마는 처음에는 당시 프로축구 붐조성을 위해 호남 연고 프로축구단으로 출범을 고려했으나, 호남 지역의 반대와 호남팀 창단의 가능성도 있기에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선택하였다.

1988년 9월 20일, 한국프로축구위원회는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일화 천마 프로축구단'(이하 일화 천마)의 창단을 인가했다. 같은해 11월 1일 일화 천마는 서울캐피탈호텔에서 곽정환(당시 세계일보 사장)을 구단주로, 박종환을 감독으로 하여 공식 창단을 발표했다. 그 후 선수단을 모아 12월 4일부터 동계훈련을 실시한 일화 천마는 1989년 3월 18일에 쉐라톤 워커힐에서 창단식을 거행하고 정식출범했다.#

리그에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탄생한 서울 연고 축구단이었으며 동대문운동장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홈 경기장으로 번갈아 사용했다. 창단 당시부터 대한민국의 월드컵 유치에 이바지하겠다며 서울에 15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축구전용경기장을 건설하겠다는 호언과 함께 막대한 투자를 예고했다.

1.3.1. 일화 천마 (1989~1995)

파일:일화 천마 엠블럼 (1989~1999).svg
일화 천마 시절 엠블럼

파일:K리그 로고(흰색).svg K리그 역대 왕조팀
★★★
1993~1995
파일:일화 천마 엠블럼 (1989~1999).svg 일화 천마
★★★
2001~2003
파일:성남 일화 천마 엠블럼 (2000-2005).svg 성남 일화 천마
★★★★★
2017~2021
파일:전북 현대 모터스 엠블럼.svg 전북 현대 모터스

(전북 왕조)
K리그1 기록만 서술하며, 왕조를 달성한 당시 구단명과 엠블럼으로 서술함
다른 틀 둘러보기: 한국프로야구 역대 왕조팀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역대 왕조팀 ·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왕조팀

파일:일화 천마 3연패 신문 광고.jpg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4강으로 이미 국민적 영웅이던 박종환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원흥재 코치, 이장수 트레이너로 코치진을 구축했다.

또한 유공 코끼리에서 공격수 김용세, 수비수 김경범과 방인웅을, 골키퍼 김영호, 현대 호랑이에서 백종철을 영입하는 등 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또한 첫 드래프트인 1989 드래프트에서 신생팀 우대를 받아 당시 대학 무대 정상급 공격수들인 고정운, 유승관, 김이주 등을 지명했고, 실업 축구에서 안익수를 데려오는 등 전력을 구축했다.

비록 창단 첫 3년까지는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며 만년 하위권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래도 이 시기 이상윤과 조우석을 드래프트에서 지명하고 이종화를 현대에서 데려오는 등 계속해서 전력을 꾸려나갔다.

1991년 11월 12일 구단주 곽정환이 통일그룹 재단 이사장이 되면서, 이틀 후 11월 14일 워싱턴 타임스 회장이었던 박보희가 새로 구단주에 취임했다. 그리고 새로운 구단주 아래 일화는 '제2의 창단'을 모토로 팀의 재건을 시작했다. 우선 창단 당시 팀의 기둥이던 김용세와 김영호를 은퇴시켰고 2년 간 주전으로 활약했던 루마니아 골키퍼 마르첼 러저레아누를 계약만료로 보냈다. 또한 원흥재 코치를 떠나보내고 이장수 트레이너를 코치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1992 드래프트에서 클럽의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본래 1라운드에서 김정혁을 지명했으나 그를 탐낸 대우 로얄즈가 자신들이 지명한 신태용과 이태홍을 1대2 맞트레이드 교환을 제시하고 일화 천마가 12월 3일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태용은 일화 축구단을 넘어 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까지 K리그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며 일화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 됐다. 참고로 신태용과 함께 일화에 입단한 이태홍도 은퇴한 김용세의 공백을 메우는 장신 공격수로 활약할 수 있는 쏠쏠한 자원이었다. 또한 소련 리그에서 올해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한 사리체프를 주전 골리로 데려왔고, 현대에서 박광현을 데려오며 전력 보강을 마쳤다.

그리고 1992시즌 아디다스컵을 들어올리며 창단 첫 우승을 기록했고 리그도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본격적으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태용은 고정운, 조우석에 이어 일화 역대 3번째 신인왕을 차지했다. 시즌 종료 후 1993 드래프트에서 박남열, 이기범, 박동우 등을 지명했다. 또한 백종철을 코치로 영입했다.

그렇게 구축된 전력으로 리그 최초 3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3연패를 하는 동안 이상윤, 고정운, 신태용이 차례로 리그 MVP를 수상했고 박종환 감독은 역시 리그 최초인 3년 연속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 개인 타이틀은 94년 고정운의 도움왕 이외에 없을 정도로 뚜렷하게 한 선수의 득점력에 의존하지 않고 팀 전체의 조직력을 앞세워 대업을 이룩한 것이다.

물론 당시 사리체프는 너무나도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다른 팀들도 골키퍼 포지션에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외국인 골키퍼의 활약이 국내 골키퍼의 성장에 장애물이 된다고 여겨, 골키퍼 포지션에 외국인 선수를 기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사리체프 이외에도 당대 최고의 외국인 수비수라 평가 받은 겐나디, 홍명보를 괴롭혔던 란코비치 등 외국 용병들의 활약도 쏠쏠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일화는 꾸준히 드래프트에서 성공적으로 선수를 지명했다. 향후 팀의 미래가 될 이영진, 한정국, 황연석 등을 지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1995시즌 리그 종료 후 열린 1995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마저 막대한 오일달러를 앞세운 이란의 사이파와 사우디의 알 나사르를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하며 아시아 최고의 팀으로 도약했다.

당시 전 선수단 상대 12박 13일 유럽4개국 여행을 우승 보너스로 지급할 정도로 엄청난 투자도 3연패에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1.3.2. 천안 일화 천마

파일:일화 천마 엠블럼 (1989~1999).svg
천안 일화 천마 시절 엠블럼
1996년 일화 천마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서울 연고의 3구단(유공 코끼리, LG 치타스, 일화 천마)에게 서울 연고를 떠나 지방으로 새 연고지를 정하라는 서울연고공동화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결국 일화 천마는 통일교 계열 선문대학교가 있고, 일화의 청주 공장이 있는데다, 2001년까지 천안오룡경기장을 축구전용구장으로 변환하고 천안시 백석동에 또다른 종합 스포츠센터를 지어주겠다던 충청남도 천안시의 제안을 받아들여 천안으로의 이전을 결정했다.# 또한 완전연고제 시행의 일환으로 클럽 이름도 천안일화 천마프로축구단(이하 천안일화)으로 변경하였다.

1996년 4월 시즌 첫 경기를 앞두고 박종환 감독이 박규남 단장과 다툰 뒤 전격 사임했고 이장수 감독 체제로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천안시대의 막을 열었다. 드래프트에선 김해운을 지명했다. 전기리그 꼴찌 등 리그에선 부진했지만 지난 시즌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1996년 아시안 슈퍼컵, 아프로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서 모두 우승을 거머쥐었다. 또한 1996-1997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결승까지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이장수 감독이 사임하며 창단부터 함께 해 온 모든 코칭스태프가 팀을 떠났다.

1997년 레네 드자이에르가 구단 첫 외국인 감독으로 임명됐다. 유럽 스타일의 자율축구를 구사하였고 이는 전임 감독들의 합숙훈련 스타일과 정반대였다. 게다가 외국인 골키퍼 출전 금지 조항이 생기며 사리체프의 출전 빈도가 줄었고, 일화의 왕조를 세웠던 이종화, 고정운, 안익수, 하성준, 방인웅, 겐나디, 이태홍 등 팀의 중심축을 이루던 주축들이 모두 팀을 떠났으며, 박남열, 한정국, 이영진 등의 군입대 등 전력 누수가 막심했다. 일화 선수단에게 갑작스런 자율은 방종과 일탈로 치닫고, 이렇게 나태해진 선수단을 단합시키지 못해 천안 일화의 성적은 동대문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급전직하하고 말았다. 그나마 1997년 대한민국 FA컵에서 준우승을 거두긴 했다.

결국 1998년 9월 레네 감독이 사임하고 차경복 당시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을 4대 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김학범 코치도 함께 합류했다. 그럼에도 1998 시즌과 1999 시즌 두 시즌 연속으로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고 만다. 1999년 중반, 차경복감독이 자진사퇴를 고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안 시절 마지막 드래프트인 1999 드래프트에서 김영철, 권찬수, 김우재, 김상식 등 향후 성남 시절에서 또 다른 왕조를 함께할 인물들을 대거 지명했다.

또한 1999년 10월 13일, 정규리그를 꼴찌로 보낸 후 천안일화 전 선수단은 휴가를 반납하고 3주 간 합숙훈련을 실시했다. 곧 1999년 11월 11일부터 시작될 FA컵에서 부진한 리그 성적을 만회해 보려는 선수들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트로이카'인 신태용, 박남열 그리고 이상윤을 앞세워 제주종합경기장에서 열린 1999년 FA컵 결승에서 전북 현대 다이노스를 3-0으로 꺾고 창단 첫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기가 일화의 천안 소속으로서 마지막 경기가 됐고 나름의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천안 일화 천마는 천안오룡경기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했는데, 이 경기장은 조명탑이 없어서 해가 지고 나면 경기 진행이 불가능하여 제비뽑기를 시행했을 만큼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이렇듯 열악한 인프라와 함께 서울 연고 때와 달리 구단 성적이 전혀 나오질 않자, 구단 수뇌부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연고 이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안시는 천안오룡경기장의 부실한 시설을 개선하는 대신 1998년 12월 천안종합운동장 착공에 들어갔으나,# 이미 축구전용경기장에 대한 약속을 믿고 있다가 뒷통수를 맞은 구단 측은 천안시를 믿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연고 이전의 주된 원인은 인프라 문제였지만, 천안시에 대한 구단의 신뢰 상실도 원인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천안시는 천안오룡경기장 대신 천안종합운동장이 건설 중이니 완공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 요청하며, 이듬해 조명탑 설치를 위한 예산까지 편성한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떠나간 구단의 마음을 되돌리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당시 천안종합운동장이 건설 중이므로 조금만 기다리면 연고 이전 없이 인프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있지만, 천안종합운동장은 조금만 기다리면 되기는 커녕 구단이 떠나고 한참 뒤인 2001년 7월에야 완공되었다.# 게다가 천안시는 천안오룡경기장을 축구전용구장으로 리모델링 해주겠다는 약속도 일방적으로 저버렸기 때문에, 이미 구단의 신뢰를 상실한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 천안 팬들은 이에 상당히 반발이 거셌음을 알 수 있다.#

1.3.3. 성남 일화 천마

파일:성남 일화 천마 엠블럼 (2000-2005).svg
파일:성남 일화 천마 로고.svg
성남 일화 천마 시절 엠블럼
(2000~05)
성남 일화 천마 시절 엠블럼
(2006~13)

파일:K리그 로고(흰색).svg K리그 역대 왕조팀
★★★
1993~1995
파일:일화 천마 엠블럼 (1989~1999).svg 일화 천마
★★★
2001~2003
파일:성남 일화 천마 엠블럼 (2000-2005).svg 성남 일화 천마
★★★★★
2017~2021
파일:전북 현대 모터스 엠블럼.svg 전북 현대 모터스

(전북 왕조)
K리그1 기록만 서술하며, 왕조를 달성한 당시 구단명과 엠블럼으로 서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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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27일, 일화천마축구단은 성남을 새 연고지로 확정, 한국프로축구연맹에 승인을 요청했다. # 물론 이 과정에서 성남의 일부 개신교 단체들은 천안일화의 모기업인 통일교 산하의 일화에 대해 반발하여 퇴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당시 김병량 성남시장과 이인우 성남시 축구협회장의 환영 속에 무난히 2000시즌부터 성남을 연고지로 새 터를 잡게 되었다. 조명탑이 없었던 천안오룡경기장과 달리 조명탑이 있는 성남종합운동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했다.

2000시즌 개막에 앞서 드래프트에서 올림픽 대표 김대의, 대우에서 김현수, 교토에서 재일교포 박강조를 영입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수단 리빌딩에 들어갔다. 대한화재컵 및 정규리그 3위, FA컵 및 아디다스컵 준우승으로 일약 우승 후보군에 들어갔다.

2001시즌을 앞두고 드래프트에서 김용희를 지명했고, 수원에서 샤샤박충균을 데려오는 데 성공한 성남은 안양과 수원의 추격을 뿌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6년 만에 리그 우승에 성공한다.

그리고 2003년에는 샤샤의 고령화를 고려해 리그 최고의 스트라이커 김도훈을 영입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이성남, 이기형, 윤정환, 싸빅 등 등 공.수에서 K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들을 시즌 전부터 싹쓸이해 전력 강화에 나섰다. 이들의 영입에만 시민구단 1년 예산과 맞먹는 무려 70억원의 돈이 들었고 이러한 성남을 언론에서는 레알 성남이라 불렀다. 그렇게 2003년까지 또 다시 리그 3연패를 차지하며 화려한 부활에 성공했다. 특히 2003년 K리그 사상 단일 시즌 역대 최다 득점인 28득점을 기록한 득점왕 김도훈[3]을 비롯해 여러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며 훌륭한 스쿼드를 꾸렸다. K리그 올드 팬들 사이에서는 2003년 성남 일화 천마의 스쿼드를 K리그 역대 최강 스쿼드 중 하나로 꼽는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김현수, 김대의, 박남열, 황연석, 권찬수, 김우재, 윤정환, 전재호, 박충균, 김용희 등 3연패 업적을 세운 선수들을 떠나보내며 대대적인 선수단 물갈이를 시작했다. 대신 연습생 신분으로 장학영, 김철호를 건졌다.

2004년 개막 전 슈퍼컵에서 전북에 패배했고, 리그 통합 8위로 부진했으나 리그컵인 삼성 하우젠컵과 A3 챔피언스컵 우승으로 더블을 차지했다. 하지만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 1차전 원정의 불리함을 딛고 3-1로 승리했기에 2차전 홈에서 손쉬운 경기를 하며 우승할 거라 확신했으나, 2차전 홈에서 상대에게 0-5 완패하며 합계 점수 3-6으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이 충격으로 차경복 감독이 사임했다. 2004년 12월 FA컵부터 김학범이 일화의 5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5년을 앞두고 레전드이자 주장단인 신태용과 이영진을 떠나보냈고 이기형, 이성남, 이싸빅 등도 팀을 떠났다. 대신 김영철과 김상식이 군대에서 전역했으며, 유스라고 볼 수 있는 풍생고에서 김태윤을 데려왔다. 또한 지난 시즌 여름에 합류한 두두를 비롯해 2005년 겨울에 합류한 우성용남기일, 그리고 여름에 합류한 김두현, 박진섭, 손대호, 모따, 조병국레알 성남다운 전력 보강을 이어갔다. 후기 리그 우승에 성공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이천수가 미처 날뛰던 울산에 패하며 또 다시 우승에 실패했다. 시즌 종료 후 주장 김도훈이 은퇴를 선언했다.

한편 2005년 9월, 새 유니폼과 엠블럼을 공모하여,# 2006년 3월, '비상하는 천마, 비전과 미래'란 의미를 내포한 새 엠블럼을 발표하였다.#

2006년에도 겨울에 김용대, 여름에 이따마르, 네아가 등 어김없이 최고의 선수들을 데려왔고, K-리그 최초의 7번째 우승을 차지하는 대업을 달성했다. 김학범 감독은 감독상, 김두현은 MVP를 차지했다. 특히 김학범은 당시 K-리그에서도 혁신적인 전술을 선보이며 학범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7년을 앞두고 최성국을 데려왔고 우성용을 떠나보냈다.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2007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조별 예선과 8강전을 무난하게 통과하였으나 4강에서 일본의 우라와 레드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였고, 정규 리그에서 4점 차이로 1위를 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포항에게 패하며 안타깝게 우승을 빼앗겼다.

2008년을 앞두고 김두현을 떠나보냈으나 정성룡김정우를 데려왔고 드래프트에서 조동건을 지명했다. 역시 호기롭게 우승을 노렸으나 수원과 서울에 밀려 3위로 포스트시즌에 들어갔고 6위 전북에게 이변의 희생양이 되며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고 김학범 감독이 그대로 사임하고 만다. 다만 일각에서는 여름에 이동국의 영입과정에서 성남 구단 고위 관계자와 마찰을 빚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2009시즌을 앞두고 성남의 레전드 신태용을 감독 대행에 선임하고 박규남 단장 아래 또 한 번 대대적인 방출 작업이 시작됐다. 성남의 차기 레전드였던 김상식, 김영철을 비롯해 모따, 두두, 남기일, 이동국, 손대호, 박진섭, 이정열 등 파격적인 방출작업에 나섰다. 대신 이호, 라돈치치, 사샤, 김진용을 영입하긴 했으나 성남답지 못한 이적시장을 보냈다.

그렇지만 신태용 감독은 성남의 돌풍을 이끌었고, 여름에 몰리나라는 성남 역대급 선수를 영입,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이듬해인 2010년, 구단 창단 두 번째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거둔다. 당시 사샤, 조병국, 이호, 조동건, 라돈치치, 몰리나, 정성룡, 김철호, 김태윤, 남궁도 등 기존 선수단에 김성환 조재철, 박진포, 홍철, 윤영선, 장석원, 용현진, 고재성, 송호영, 정호정 등 신태용 감독이 발굴한 신인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며 ACL 우승이라는 대업을 거뒀다. 그리고 2011년, 숙적 수원을 꺾고 두 번째 FA컵을 들어올렸다. 신태용이라는 초짜 감독이 일화의 3번째이자 마지막 전성기를 그려낸 순간들이다.

이에 고무되어 2012년을 앞두고 문선명이 구단에 많은 투자를 했고 시즌 개막 전 홍콩 구정컵 우승을 거두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한요윤으로 대표되는 성남의 2012시즌 겨울 이적시장은 대실패로 돌아갔고, ACL 16강 이외에 리그 12위 등 또 다시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만다. 그렇게 신태용 체제가 막을 내린다. 이와 함께 일화 축구단의 마지막 전성기가 너무나도 짧게 끝이나고 만다. 이후 많은 선수가 다른 팀으로 유출됐다.

2013년에는 구단 존속에 대한 구단 내외의 산만한 이야기 속에 또 다른 레전드 출신이자 부산의 감독이던 안익수를 데려와 전남과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2년 연속 하위 스플릿이자 리그 8위를 달성했다.

1.3.4. 시민 구단 성남 FC로의 전환

2012년 9월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사망하면서, 성남 일화 천마에 미칠 영향에 대해 많은 K리그 팬들이 우려했다. 축구에 애정을 쏟았던 문선명과 달리, 부인 한학자와 통일그룹의 실권을 쥔 4남 문국진은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문선명의 와병 이후, 통일교가 축구단 운영에서 손을 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이미 K리그 팬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통일그룹은 수익성 성장성이 떨어지는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문선명 외 나머지 가족들은 축구단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축구단에서 손을 뗄 것이 거의 확실시 됐다. 심지어 4남은 야구에 관심이 많았고 그로 인하여 당시 넥센 히어로즈 관련되어서 구단 인수 설이 돌았다.

그리고 문선명이 사망하면서, 축구 팬들이 우려했던 일들이 하나씩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2년 10월 WK리그에 참가하던 충남 일화 천마가 해체되었고, 피스컵마저 폐지되면서 성남 일화 천마도 해체될지 모르는다는 우려 섞인 이야기가 나왔다.

한편 통일교가 축구판에서 완전히 손을 떼면 구단을 다른 기업에서 인수하거나 성남시에서 인수하여 시민구단으로 전환시키면 어떤가 하는 이야기들이 K리그 팬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런데 성남시에서는 성남 일화 천마의 위기설 한참 이전에 시민프로축구단 창단 모임이 발족됐고, 거기에 이재명 성남시장이 해체된 성남시청 체육단을 재창단하며 축구단도 함께 창단하겠다는 얘기를 하면서 전혀 다른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후 통일교가 성남 일화 천마의 정리 수순을 밟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성남시에서 2013년 6월까지 시민구단 창단 타당성 조사 연구용역을 완료하기로 하였지만, 성남시에서 용역 결과를 공개하지 않자, 성남시가 성남 일화 천마를 인수하지 않고 자체 시민구단을 창단하기 위해 불리한 연구용역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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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일화 천마 연고이전 반대 규탄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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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일화 천마 연고이전 반대 궐기대회
그러던 2013년 8월 23일, 중앙일보에서 성남 일화 천마가 안산시로 연고지를 이전한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통일그룹이 구단을 안산시에 매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안산시가 구단 운영자금을 지원할 스폰서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통일그룹과 안산시 간의 인수협상이 지지부진해졌다. 이에 성남을 사수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성남 팬, 성남 지역 스포츠 관계자 그리고 K리그 각 구단의 팬들은 성남 연고이전 반대 및 성남시민축구단 창단 촉구 궐기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성남 팬과 성남 지역 스포츠 관계자, 각계 축구 팬들의 요구에 성남 연고 국회의원과 성남시의회가 동조하자, 다시 성남시에서 구단 인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2013년 10월 2일 이재명 성남시장이 성남 일화 천마 인수 및 시민구단화를 발표한다. 이로 인해 성남 일화 천마는 다행히 해체의 위기를 넘어 성남시에 인수되면서 시민구단으로 전환되었다.

1.4. 통일교와 일화 천마

구단의 정식 명칭에 들어간 기업명 일화는 명목상의 모기업이었을 뿐, 구단의 법인명은 ㈜통일스포츠였다.[4]

때문에 가톨릭, 개신교계로부터 줄곧 공격당했고, 문선명의 사돈이자 통일교 핵심 간부였던 곽정환이 프로축구연맹 회장이었을 당시 개신교계는 K리그 시청 거부 운동까지 벌였다. 천안 연고 시절에도 종교 문제로 홀대 받았지만, 성남 연고로 이전한 후에는 성남이 개신교 신자 비율이 많은 도시였기 때문에 성남시 내 여러 교회에서 반대 성명을 냈다. 게다가 당시 김병량 성남시장은 분당의 모 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던지라 교회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남 일화 천마는 소속 선수 및 스태프들에게 어떠한 종교 행위도 강요하지 않았으며, 구단 내에도 통일교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신교 구단인 안산 할렐루야야말로 가장 종교구단스런 행보를 보였던 바가 있으니, 성남 일화 천마를 향한 맹목적 비난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이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성남을 맹비난하면서 안산 할렐루야를 K리그로 진출시키려는 개신교계의 움직임은 당시 유니텔이나 넷츠고, 하이텔, 나우누리 등 국내축구 게시판의 축구 팬들에게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다고 성남 일화 천마에 통일교 색깔이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구단 엠블럼의 원형 테두리 좌우 양쪽에 새겨진 표식은 통일교 엠블럼에서 따온 것이다. 이 표식은 성남의 엠블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교 계열의 여러 단체 로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남 일화 천마가 종교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통일교를 전면에 내세우며 포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등장한 안산 할렐루야와 비교해 보았을 때 명확하게 드러나는 차이점이다.

재밌는 점은 성남의 주요 경기에서 통일교 신자들이 단체 관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03년 일본에서 치러진 A3 챔피언스컵에서 일본 내 통일교 신자들이 대거 입장하여 일본 클럽에 맞서 성남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 도쿄에서 열린 AFC 챔피언스 리그 조브 아한과의 결승전에는 총 2만여 명의 관중이 입장했는데, 관중석에는 노란 물결이 넘실거렸다. 이 관중들이 전부 한국에서 응원하러 간 성남 팬일리는 없으니, 일본에 있는 통일교 신자들이 그만큼 참석했다는 뜻이다.

선수들의 골 세리머니 또한 통일교 관련 종교 의식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각자의 종교에 대해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성남에서 선수로 뛴 신태용은 독실한 불교 신자이며,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최성국은 골을 넣고 기도 세리머니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참고로 종교적인 축구 클럽이면서 더비가 유명한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셀틱 FC레인저스 FC가 있다. 이들의 더비를 올드펌 더비라고 부른다.# 애초에 축구 클럽에는 종교가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축구단 창단의 가장 큰 갈래들은 교회 및 마스지드, 학교, 군대, 노동자 단체 등이다. 당장 "유나이티드"라는 팀명만 보더라도, 많은 팀들이 이합집산 하면서 본래의 색깔이 빠진 경우도 많다.[5]

따라서 성남 일화 천마가 딱히 포교를 위해 운영되었다기보다는, 축구를 좋아했던 문선명 총재의 취향을 위해서 운영되었다고 봐야하며, 구단을 운영하는 겸 통일그룹의 주요 회사인 일화의 상표를 넣은 것이라고 볼수있다.

이외에도 통일교 재단의 주최로 여러 대회를 개최했는데 피스컵이 대표적이며 피스컵이 생기기전에는 과거 1991년 서울의 지역 축구꿈나무 육성을 위해 일화 천마컵국교 축구대회를 창설해 서울지역 36개팀이 참가한 제1회 대회를 12월 2일부터 12월 6일까지 효창운동장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1.5. 여담

  • 모기업 일화의 음료 맥콜이 프린팅된 유니폼은 한 때 선수 이름 대신 상표명을 표기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맥콜 팀의 삼정톤 선수 참 잘한다"는 드립은 이 무렵에 나온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성남 FC/유니폼 문서 참고.
  • 성남시절 일화 천마는 화려한 우승 이력이나 좋은 성적과 다르게 인기가 적은 구단이었다. 2012년 어린이날을 맞아 돌(Dole) 코리아에서 탄천종합운동장을 방문하는 관객 5,000명에게 선착순으로 과일을 증정하는 행사를 했다. 그리고 이날 관중수는 4,543명이었다. 그나마 이 관중수는 개막전 이후 최대 관중이었다. 그래서 다른 팀 팬들에게 인기없는 성남 일화 천마가 자꾸 우승해서 리그 인기가 떨어진다는 웃지 못할 소리를 듣기도 했다. 또한 성남의 주 경기장인 탄천종합운동장의 관리 상태가 안좋아 상대팀의 원성이 있기도 했다.[6]
  • 성남은 리그 성적은 매우 좋았지만, 관중은 그에 비해 너무 적었다. 이러한 저조한 인기는 무엇보다 구단의 저조한 마케팅 의식과 홍보 능력에 기인했다. 그리고 천안 연고에서 성남 연고로 이전할 당시, 프로축구단 유치를 추진하던 성남시에서 성남 개신교도들의 반대로 인해 갑자기 말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성남 연고 정착에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화려한 우승 이력에도 불구하고 비인기팀으로 남게 됐다.

2. 우승 엠블럼

우승 엠블럼 일람
연도 엠블럼 우승 엠블럼 우승 횟수
1989 파일:일화 천마 엠블럼 (1989~1999).svg
1990
1991
1992
1993 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
V1
1994 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
V2
1995 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
V3
1996
1997
1998
1999
2000 파일:성남 일화 천마 엠블럼 (2000-2005).svg 파일:성남 일화 천마 엠블럼 (3성).svg
2001 파일:성남 일화 천마 엠블럼 (4성).svg 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
V4
2002 파일:성남 일화 천마 엠블럼 (5성).svg 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
V5
2003 파일:성남 일화 천마 엠블럼 (6성).svg 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
V6
2004
2005
2006 파일:성남 일화 천마 로고.svg 파일:성남 일화 천마 (7성) 엠블럼.svg 파일:K리그 트로피 아이콘.svg
V7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1] 지금은 성남 FC의 보조 경기장으로 알려진 구장이지만, 성남종합운동장은 과거 한국 하키계의 성지였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 하키 국가대표팀이 은메달을 차지한 곳이어서 경기장을 축구장으로 개조할 당시 하키계의 반발이 심했다.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면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야구장으로 개조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사건은 성남시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어야 했는데, 축구계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하여 대한체육회에서 축구계의 입지가 곤란해진 적이 있었다. 이 사달을 치러놓고 고작 4년만 사용한 후 탄천으로 주 경기장을 옮겼다는 것도 큰 문제가 됐다.[2] 파일:external/file2.instiz.net/d57c18544ab042b389c5fc156442df09.jpg
탄천종합운동장의 애칭은 탄천요새다. 16,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이지만, 골대 뒤에 가변석을 설치하면서 현재는 사실상 14,000여 명만 수용 가능하다.
[3] 이 기록은 2012년 데얀이 31득점을 기록하며 깨지고 만다. 다만, 국내 선수 한정으론 2024년 여전히 단일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이다.[4] 일화통일교(통일그룹) 산하의 자회사다.[5] 무언가 있어보인다는 이유로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을 쓰는 구단이 많기 때문에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예로 제주 유나이티드가 있다.[6] 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윤성효 감독은 성남과의 경기에서 패한 이유로 경기장의 잔디 상태를 첫 번째로 꼽았다가 윤잔디라는 별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