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30 19:40:34

기욤 2세 드 나르본

이름 기욤 2세 드 나르본
Guillaume II de Narbonne
출생 미상
프랑스 왕국 나르본
사망 1424년 8월 17일
프랑스 왕국 베르뇌유
아버지 기욤 1세 드 나르본
어머니 게린 드 보포르
형제 아이머리
아내 마르그리트 다르마냐크
직위 나르본 자작, 아르보레 판사, 프랑스 기병대장
1. 개요2. 행적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아르마냑파의 일원으로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을 암살했다. 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했다.

2. 행적

나르본 자작인 기욤 1세 드 나르본과 카니약과 카트린 도베르뉴 영주의 딸인 게린 드 보포르의 장남이다. 형제로 아이머리[1]가 있었다. 아버지가 1397년 8월 17일에 사망했을 때,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릴 자작 피에르 드 페누이레와 사촌이자 피투의 영주인 장 드 송, 삼촌인 레이몽 드 카스카스텔의 후견을 받았다. 어머니는 기욤 1세 사후에 오베르뉴의 마르도뉴 영주인 기욤 드 티니에르와 재혼하여 피에르와 마르그리트를 낳았다.

1407년 사르데냐의 아르보레 판사인 사촌 마리아노 5세 드 아르보레가 사망했다. 그는 즉각 아르보레 판사 직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 당시 시칠리아 국왕으로서 사르데냐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마르티누 1세와 경쟁했다. 1408년 10월 6일, 마르티누 1세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칼리아리에 상륙한 뒤 기욤 2세의 사절인 레오나르도 카펠로와 협상했다. 그러나 기욤 2세는 12월 8일 군대를 이끌고 사르데냐에 도착한 뒤 협상을 중단했고, 1409년 1월 13일 오리스타노에서 아르보레 판사로 취임했다.

그는 아라곤 왕국의 국왕 마르틴 1세의 지원을 받은 마르티누 1세에 대적하기 위해 제노바 총독인 장 2세 르 맹그르, 일명 '부시코 원수'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1409년 7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아라곤 왕국의 항의를 받고 부시코에게 프랑스와 아라곤 왕국이 동맹을 맺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사르데냐를 지원하는 모든 작전을 취소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지원이 끊긴 그는 6월 30일 산루리 전투에서 참패하고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마르티누 1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해 7월 25일 칼리아리에서 사망했다.

이후 그는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귀환했고, 레오나르도 카펠로가 자신을 대신해 재판관을 맡게 했다. 레오나르도 카펠로는 1410년 3월 30일에 아라곤군의 압박을 받고 항복했지만, 그해 5월 31일 아라곤 국왕 마르틴 1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급사하면서 아라곤 왕위가 비어버렸고, 샤르데냐에 주둔했던 아라곤군은 급히 철수했다. 기욤 2세는 같은 해 말에 사르데냐로 돌아와서 시사리 주변의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러나 랑그독 보안관인 베리 공작 장 드 베리가 1410년 7월 7일 툴루즈, 카르카손, 보케르의 세네샬들에게 서신을 보내 나르본 자작의 사르데냐 원정을 돕지 말라고 명령하는 등, 프랑스 왕실에서는 아라곤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흔들어버린 그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이 무렵, 프랑스 왕국은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아르마냑파의 일원이 되었고, 1416년 잉글랜드군의 유일한 노르망디 거점이었던 아르플뢰르의 해상 봉쇄를 수행했지만 1416년 8월 15일 셰프드코 해전에서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패퇴했다. 이후 1418년부터 1420년까지 도팽 샤를의 부르주 정부에 참여했다. 1419년 7월 도팽 샤를의 고문으로서 부르고뉴 진영과 양자간의 전쟁을 중지하고 잉글랜드의 침략에 공동으로 맞서자는 내용의 푸이르포르 조약을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419년 9월 10일 몽뜨흐 다리에서 도팽 샤를과 부르고뉴 공장 용맹공 장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을 때, 그는 타네기 3세 뒤 샤스텔과 함께 부르고뉴 측을 습격해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를 살해했다. 이로 인해 한때 아르마냑파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의 침략에 공동으로 맞서 싸우려 했던 부르고뉴파는 완전히 등을 돌려 잉글랜드와 손잡았고, 프랑스의 운명은 암울해졌다.

1420년 8월 17일, 기욤 2세는 아르보레 판사직을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5세에게 100,000 플로린에 판매했다. 1422년 베르네에서 장 7세 다르쿠르와 함께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뒤 도팽 샤를로부터 세세농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1424년 초, 샤리테 쉬르 루아르와 코스네를 점령했다. 그러나 1424년 8월 17일 프랑스 기병대를 이끌고 베르뇌유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그의 유해를 발견한 잉글랜드군은 몽뜨흐 다리에서 용맹공 장 1세를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며, 그의 몸을 4개로 분할하고 교수대에 매달았다. 유해는 나중에 수습되어 나르본 자작 가문의 전통적인 매장지인 폰트프라이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기욤 2세는 생전에 아르마냐크 백작 장 3세 다르마냐크의 딸이자 아르마냑 파의 지도자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의 조카인 마르그리트 다르마냐크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사후 이복 형제인 피에르 드 티니에르가 나르본 자작에 선임되었는데, 그는 1447년에 나르본 자작령을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에게 매각했다.


[1] 1387 ~ 1414, 1414년 시사리 주민들에 의해 아르보레 판사로 선출되었지만 얼마안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