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Neues Kampfflugzeug1960~70년대 스위스의 공격기 도입 프로젝트.
2. 역사
2.1. 프로젝트의 시작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스위스 공군 전투기들의 노후화/구식화가 지적되기 시작했다. 구식 드 해빌랜드 베놈의 전투 능력은 타 전투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고, 호커 헌터의 무기 탑재량과 항속거리는 한계가 있었다. 공군에는 지상 공격기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에 1967년 1월, 연방 군부 산하 국방 위원회(KML)는 신형 공격기에 대한 대략적인 사양을 정의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대공 방어를 뜷고 지상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어야 함.
- 적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함.
- 더 느리고 약한 항공기를 엄호할 수 있어야 함.[1]
EMD의 장기 재정 계획의 일환으로 1970~74년 기간 동안 새 지상 공격기 도입에 13억 스위스 프랑이 배정되었다. 항공 및 방공군 사령관인 Eugen Studer 중장은 60대의 항공기를 요구했다.
2.2. 후보 선정
1966년 중반부터 전쟁기술부(KTA)의 전문가 그룹이 예비 평가 준비를 시작했고, 항공기 선발 과정이 1967년 봄에 시작되었다. 이 예비 평가의 일환으로 9가지 항공기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노스롭 F-5
가볍고 비교적 단순한 미국의 다목적 전투기이다. 1959년 7월 30일 처녀비행을 했고 총 2,238대가 제작되었다.[2] - SEPECAT 재규어
브레게와 BAC가 공동으로 개발한 폭격기다. 1968년 9월 8일 첫 비행을 했고, 총 651대의 항공기가 제작되었다. - 사브 AF-35 드라켄
스웨덴 초음속 전투기로, 이전 항공기 도입 사업에서 미라주 III에 패배한 SAAB 35H와 거의 동일하다. - 사브 AF-37 비겐
현대적인 스웨덴 초음속 다목적 전투기이다. SAAB 35의 후계기로, 1967년 2월 18일 첫 비행, 총 329대가 제작되었다. - 다쏘 미라주 5
미라주 III의 단순화된 공격기 버전이다. 밀란은 나중에 이 항공기를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 LTV A-7D 콜세어 II
Ling-Temco-Vought의 아음속 지상 공격기이다. 1967년 2월 1일 첫 비행, 미 공군과 미 해군에서 다양한 버전이 운용되었다. 총 1,569대의 항공기가 생산되었다. - 피아트 G.91Y
피아트 G.91R 전투기의 개량형인 이탈리아산 쌍발 엔진 전투기다. 1956년 8월 9일 첫 비행, 총 약 600대가 제작되어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공군에서 사용되었다. - A-4E 스카이호크
항공모함용으로 설계된 미국 해군의 단일 엔진 전투기이다. 1954년 6월 22일 첫 비행, 2,960대가 제작되었다. - FFA AR-7
1964년부터 AR-7이라는 이름으로 롤스로이스 2기통 엔진을 장착한 P-16의 변형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생산되지는 않았다.
1969년 위원회는 이탈리아의 피아트 G.91Y와 미국의 보우트 A-7D 콜세어 II를 최종 후보로 선정하지만, 1970년 7월, 연방 의회는 결정을 보류하고 연방 군부에 콜세어 II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는지를 다시 한번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목록은 피아트 G.91Y, 사브 105, A-4 스카이호크 및 밀란으로 결정되었고, 이후 현대화된 호커 헌터인 헌터-S가 추가되었다.
연방각의가 명령한 이 추가 평가는 1971년 초에 완료되었다. 1971년 3월 30일, 연방 군부는 모든 관련 위원회 및 군사 당국과 합의하여 연방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이 보고서에서 주요 기종과 가능한 대체 기종을 제안했다. 1971년 6월 21일 연방 의회는 G.91, 사브 105, A-4, 헌터-S를 제외하고 콜세어 II와 밀란 두 항공기중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평가 결과 | |||
순위 | 기종 | 점수 | 수량(13억 CHF) |
1 | A-7D 콜세어 II | 100 | 63 |
2 | A-4S 스카이호크 | 72 | 75 |
3 | 밀란 S | 59 | 70 |
4 | G.91Y | 56 | 90 |
5 | 사브 105XH | 26 | 120 |
6 | 슈퍼 헌터 | 26 | 80 |
2.3. 밀란 vs 콜세어
최종 평가에서는 밀란과 콜세어 II의 시험비행이 이루어졌다. Emmen 비행장을 기지로 했고, 지하 격납고에 대한 적합성 평가는 Turtmann 기지에서 이루어졌다.[3] 무장 테스트를 위해 Neuchâtel 호수, Gibloux, Axalp 및 Forel 사격장에는 측정 장치가 설치되었다.1971년 12월 22일 참모총장은 공군 및 방공군 사령부에 1972년 4~5월 중 A-7D Corsair II와 Dassault Milan 두 기종에 대한 테스트를 계획할 것을 지시했다. 테스트는 비행 성능, 무기 사용 및 항법장치에 중점을 두었고, 부차적으로 물류 및 동굴에 대한 적합성을 보았다. 계획에는 A-7D와 밀란의 각각 24/21회의 시험비행이 포함되었다.
2.3.1. 조종사 훈련
▲ 왼쪽부터 E. Gmünder 대위, H. Stauffer 중령, J. Brunner 소령
비행 테스트에 참가한 조종사 3명은 미국 Davis Monthan 공군기지에서 A-7D로의 전환훈련을 마쳤다. Hans Stauffer 중령, Jean Brunner 소령 및 Ernst Gmünder 대위는 아래의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Gmünder 기장은 A-7D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행 측면에서 호커 헌터와 매우 유사하며, 특히 이륙, 일반 비행 및 착륙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HUD는 매우 훌륭하며, 광범위한 항공전자공학은 현재 스위스군의 항공기보다 훨씬 더 발전되어 있다. 플랫폼, 레이더, 도플러, 내비게이션 및 무장 컴퓨터부터 개별 폭탄 파일런까지 모든 것을 사용하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게다가 엄청나게 많은 비상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엔진 고장이 발생할 경우 RAT가 전기 및 유압 장치 공급을 대신했다.
밀란에 대한 전환훈련은 Villaroche 비행장에서 이루어졌다. 세 명의 조종사 모두 Mirage IIIS를 조종한 경험이 있었던 덕에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훈련만으로 충분했다.[6]
2.3.2. OMBRA
밀란과 콜세어 II의 비행에는 헌터가 동행해야 했는데, 밀란과 콜세어 II에는 UHF 무전기 2대만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VHF 및 UHF 대역의 라디오가 있는 헌터를 라디오 중계 목적으로 사용했다. 이 호커 헌터는 이탈리아어로 그림자를 뜻하는 OMBRA라는 이름이 붙었다.Beat "Bobby" Schär 대위와 Rudolf "Tüzi" Wicki 대위가 임무에 배정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측면으로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 전반에 걸쳐 모든 비행의 준비, 실행 및 평가에 전적으로 참여했다.
여담으로 밀란과 헌터 간의 모의 공중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Neuchâtel 호수의 Forel 사격장에서 Emmen까지의 비행에서 밀란 테스트 조종사 Guy Mitaux-Maurouard[7]는 Rudolf Wicki 대위에게 즉흥적으로 Entlebuch에서 1 대 1 모의 공중전을 해보자고 제안했는데, 약 5분간의 공중전 후 그들은 연료가 부족하여 공중전을 중단해야 했고, 양측은 무승부에 동의했다.
2.3.3. 시험 비행
▲ 미군 소속 A-7D №710294
1972년 4월 12일, 11시간 30분의 비행 후, 두 대의 미 공군 소속 A-7D (710294 및 710303)가 텍사스 달라스에서 출발, 아조레스 제도에 경유하여 Emmen 비행장에 착륙했다. 조종사는 Jim Read와 Bob Dewey였다. 710294는 스위스 공군이 요구한 "Helvetisierung(스위스화)" 요구 사항을 대부분 충족시켰다. 두 번째는 예비용 및 예비 부품 수급용으로 사용되었다.
밀란은 1972년 5월 2일 Guy Mitaux-Maurouard가 조종간을 잡은 가운데 Villaroche에서 이륙하여 Emmen에 착륙했다.
A-7D 콜세어 II는 31번의 비행에서 44시간 동안 비행한 반면 밀란은 23번의 비행에서 18시간밖에 비행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밀란의 기술적인 불완전함 때문이다.
항법 및 사격 통제 시스템의 성능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모든 테스트 비행은 민간용(Skyguide) 및 군용(Florida) 레이더를 사용하여 측정되었다. 또한 두 항공기의 조종석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비행 중 및 무기가 발사되는 순간의 항법 및 사격 통제 시스템 사인을 기록했다.
모든 항공기는 1972년 5월 30일에 원래 국가로 돌아갔다.
2.3.3.1. 콜세어 II
▲ (위) Gesero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A-7D
ㅤ (아래) Forel에서 야간 폭격 테스트 중 20m 표적에 적중하는 폭탄
콜세어 II의 비행은 다소 약한 브레이크 시스템으로 인해 두 번의 타이어 파열이 발생한 것을 빼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8] 지하 격납고에 대한 적합성 또한 Turtmann 지하 격납고에서 입증되었다. 450kg 폭탄 10개를 장착한 콜세어 II는 외부 무장이 없는 헌터와 거의 동일한 성능을 발휘했다. 또한 콜세어 II는 폭탄 투하 테스트에서 전탄 명중을 기록하며 항전장비 성능의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2.3.3.2. 밀란
▲ 격납고 옆에 주기되어 있는 밀란 S 01. 뒤에 A-7D가 보인다.
밀란의 비행 중에 여러 구성 요소가 아직 "시제품" 단계에 있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났다. 처음 8개의 임무 중 2개가 기술적인 이유로 취소되어야 했고, 9번째 비행에서는 연습용 35kg 폭탄 5개 중 1개만 투하됐다. 사통장치는 한 번 고장이 나서 수리를 위해 프랑스로 날아가야 했고, HUD는 아직 작동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조종사가 레이저 거리 측정기의 조준선을 목표물에 고정하는 것이 어려워 일부 폭탄이 잘못 투하되었다.[9] 도플러 항법 장치[10]는 호수 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2.4. 프로젝트 취소
1972년 7월 10일, 연방군부는 항공기 평가 결과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연방 의회에 제출했다. 연방 의회는 여러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1972년 8월과 9월에는 프랑스 제조업체인 다쏘와 심지어 프랑스 정부까지 개입해 밀란이 비행 평가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1972년 9월 9일, 정부는 두 항공기 모두를 구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제로 디시전(Zero Decision)'이 현실이 된 것이다. 연방 의회의 장문의 정치 및 금융 정책 성명에서는 프로젝트 취소를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이 결정으로 인해 1972년 9월 30일 Heiner P. Schulthess 군수사령관이 사임했고, 그해 11월 14일 공군 및 방공군 사령관 Eugen Studer 중장이 조기 퇴역을 선언했다. 1973년 1월 Amstutz 교수가 이끄는 군용기 위원회를 해산하며 프로젝트는 완전히 종결되었고, 2년 반 후인 1975년 8월 27일, 연방 의회는 F-5E 66대와 F-5F 6대 도입을 선언하며 승자는 콜세어 II도, 밀란도 아닌 F-5가 되었다.
3. 프로젝트를 둘러싼 논란
제네바 일간지 La Suisse 에서는 평가 과정이 미라주 반대파들의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앞서 나온 2,3번 기준이 의도적으로 무시당했다는 것이었다. 콜세어 II는 밀란의 2배[11]에 가까운 폭장량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주/야간 지상 공격용 포드를 가지고 있어 지상공격에는 확실히 적합했다. 하지만 아음속기인데다가 구형 기종이라 생산이 종료될 수 있다는 리스크[12], 월남전에서 엔진 문제로 운용이 중단된 전적 등 여러 단점들도 가지고 있었다.반면 밀란의 경우에는 하지만 음속의 2배로 비행할 수 있어 생존성이 우수했고, 스위스에서 이미 운용중이던 미라주 III와 유사한 기종이기에 조종사 훈련과 유지 보수에서도 이점이 있었다. 또한 최신 기종임에도 불구하고 콜세어 II보다 저렴했다.
콜세어 II 도입 반대 단체에서는 콜세어 II는 생존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임무 수행 전에 파괴될 가능성이 높고, 차라리 밀란을 도입하는 것이 더 적은 양의 무장을 사용하더라도 조종사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으니 더 낫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술적 요인이 아닌 감정적인 요인도 조달에 영향을 끼쳤다. 많은 공군 장교들은 미라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전에 도입한 미라주 IIIS의 도입 과정에서 있었던 스캔들 때문이었다. 또한 반프랑스 또는 친미 감정도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문화적인 이유로 인해 독일어를 사용하는 장교들 사이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대표적인 콜세어 옹호자이자 무기 공급 부문 책임자였던 Heiner Schulltess는 수년간 미국 항공우주 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했었다. La Suisse의 기사에 따르면, 미국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고, 때문에 선택 과정에서 감정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못했다. 경쟁자 밀란의 가장 확고한 지지자 중 한 명으로 Nello Celio가 있다. 그의 이유는 확실히 정치적인데, 그 이유는 유럽 국가에서 대량 주문을 요청하는 것은 스위스-EEC 협력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는게 그 이유였다.
4. 갤러리
▲ 밀란 S 01 앞에 선 "Bobby" Schär 대위(Ombra), "Aschi" Gmünder 대위(Milan), "Tüzi" Wicki 대위(Ombra)
▲ Turtmann 기지에서 지하 격납고 적합성 테스트 중인 A-7G
▲ OMBRA 조종사 Beat "Bobby" Schär 대위가 그린 '스위스 공군을 위한 최적의 지상 공격기(Das optimale Erdkampfflugzeug für die Schweizer Luftwaffe)'
▲ 그리고 밀란-콜세어 주제에 대한 새로운 것 - 연방 의회의 무서운 결정 속도에 더 이상 대처할 수 없었던 군수 책임자는 적시에 과감히 과속하는 평가 열차에서 뛰어내렸다.[13]
5. 출처
- Rudolf Wicki, «Nullentscheid» bei der Flugzeug-Evaluation Milan – Corsair 1972, gazette-online (2022.08.03)
- 미상, THE MILAN-CORSAIR DOSSIER, The Swiss Observer (1972.06.23)
- Gilsi, René, Nebelspalter : das Humor- und Satire-Magazin, Band 98 (1972)
[1] 이 요구 사항은 나중에 삭제되었다[2] 스위스 공군은 나중에 총 110대의 F-5E/F를 조달했다.[3] 대체 비행장은 Payerne이었다.[4] 각 1시간 30분[5] 총 8시간 20분[6] 카나드, 항법 장비, 무기 시스템, 레이더 및 레이저 거리 측정 장치를 갖춘 항공 전자 장치의 작동에 대한 훈련이 이루어졌다.[7] 프랑스 테스트 파일럿으로, 미라주 시리즈 중 다수의 테스트 비행을 맡았다.[8] 바퀴가 파열되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콜세어 II는 최대 하중 착륙에 대한 승인을 유지했다.[9] 이로 인해 Gibloux 사격장(Bulle에서 북서쪽으로 약 6km)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폭탄이 목표물에서 1km 이상 떨어진 곳에 낙하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안타깝게도 들판에서 소 한 마리가 35kg짜리 플라스틱 폭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연방 의회는 이에 대해 배상해야 했다.[10] 원래 관성항법장치가 장착되어야 했으나 아직 기술적으로 불완전했던 탓에 임시로 도플러 항법 장치를 장착했다.[11] 콜세어 II는 약 5톤, 밀란은 약 2.9톤[12] 콜세어 II는 실제로 1973년 생산을 종료했다[13] 1972년 군수사령관의 사임과 관련해 프로젝트를 풍자하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