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W. 로턴 H. W. Lawton | |
본명 | 헨리 웨어 로턴 Henry Ware Lawton |
출생 | 1843년 3월 17일 |
미국 오하이오주 머미 | |
사망 | 1899년 12월 19일 (향년 56세) |
스페인령 필리핀 마닐라 산마테오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소장 |
복무 기간 | 18641~1865 1866 ~ 1899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오하이오주 머미에서 방앗간 노동자인 조지 W. 로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디애나주 아버지는 인디애나 준주 포트웨인으로 이주해 방앗간 노동자로 일하다가 골드 러시당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금광에서 일했다. 어머니 캐롤린이 사망하자 오하이오주 샌더스키로 돌아와 성장했다. 또 다시 인디애나 준주 포트웨인으로 이주했고 남북전쟁이 발생했다.제9인대애나의용보병연대 E중대 소속 소총수로 입대했고 필리피, 로렐힐, 코릭스포드 전투에 참전했다. 3개월만에 부대가 해체되었고 이후 제30인디애나보병연대가 재편성되고 나서 복귀했다. 돈 카를로스 뷰얼이 이끄는 오하이오군에 편성되었고 테네시로 이동해 샤일로 전투, 코린트 공방전에 참가했다. 스톤리버, 치카무가 전투에도 참가했고 애틀랜타 전역 당시 과감한 돌격으로 공을 세워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고 전시계급 대령으로 진급했다.
종전 후 전역했으며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서 공부 후 졸업해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장교로 복귀하길 원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윌리엄 테쿰세 셔먼, 필립 셰리든의 도움으로 소위로 복귀하게 되었다. 래널드 S. 매켄지 휘하 제41보병연대 소속으로 원주민들과 전투를 치렀다.
1883년 윌리엄 F. 터커 소령과 함께 주니족 영역이였던 땅을 빼앗고 모두 소 목장으로 바꿨다. 애리조나 준주에 배치되어 넬슨 마일스와 함께 고야슬레를 생포하는데 공을 세웠다.
1889년 중령으로 진급했고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전시계급 준장으로 진급해 제5군단[1] 제2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쿠바로 향했다. 라스과시마스 전투 당시 조셉 휠러를 구원해 스페인군을 격파했으며 엘카네이 전투에서 많은 피해[2]를 입었으나 승리를 거뒀으며 산후안 언덕 전투, 산티아고 전투에서 다른 예하부대가 승리를 거두는데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많은 비전투 손실이 발생했고 미군만으로 치안유지가 힘들어 스페인군 포로, 쿠바인들을 경찰로 채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도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고생했고 회복했으나 미국으로 복귀해 필리핀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제8군단 제1보병사단장으로 산타크루스, 사포테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고 하지만 마닐라 인근 산마테오에서의 전투에서 지휘하다가 필리핀 저항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미국-스페인, 미국-필리핀 전쟁 당시 전사한 최고위급 계급이였으며 시신은 마닐라 파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알링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3. 여담
- 미국 포병의 중심기지 포트 스틸이 위치한 오클라호마주 로턴이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1] 군단장은 윌리엄 R. 섀프터.[2] 사상자 1,3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