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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식 전도

九八式軍刀

1. 개요2. 외장
2.1. 98식 군도 세부명칭2.2. 칼날(刀身)2.3. 도장구(刀裝具)2.4. 손잡이(柄)2.5. 칼집(鞘)2.6. 야전용가죽덮개(野戦用革覆い)
3. 실전에서의 활약4. 문제점5. 관련 문서

1. 개요

정식명칭은 쇼와13년제정육군제식군도(昭和13年制定陸軍制式軍刀) 통칭 98식. 구 일본군장교일본군도.

쇼와 9년(1934)에 제정된 육군제식군도 94식 군도는 정복/예복 규정에 맞추기 위해 탈착 가능한 2번째 패용 고리가 달려있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정복/예복은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따라서 예식용의 2번째 패용 고리를 폐지한 신제식이 1938년에 다시 채택되었다. 이것이 일본 군도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98식 군도이다. 패용 고리 1개가 제거된 것 이외에는 94식과 동일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외장과 도신에 차이가 생겼다. 기본적인 스타일은 94식과 다르지 않으며, 일본도 분류에서는 진타치(陣太刀) 즉 장식성이 강한 지위의 상징 역할을 하는 타치로 취급된다. 생산 시점에 따라 초기형, 중기형, 후기형으로 나뉘며, 구분 방법은 칼날과 도장구의 형태 차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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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령 제392호에 의한 육군장교용군도개정령에 의한 관보 쇼와 13년[1938] 6월 1일 3421호 수록 제식)

2. 외장

2.1. 98식 군도 세부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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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칼날(刀身)

98식 군도의 칼날은 초기형은 94식과 동일하게 골동품 일본도의 칼날을 전용하거나 장인들이 만든 칼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중일전쟁 개전(1937년) 이후 장교와 부사관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군도 자체의 수요가 폭증하게 되자 더이상 골동품이나 장인의 생산만으로는 수요량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고 이에 따라 여러 민간 기업들을 비롯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같은 대형 철강중공업체에서도 군도를 제조하여 양산에 나섰다. 또한 본래 도검착용이 규정된 부사관과 병, 즉 대도본분병들을 위한 칼날을 생산하던 육군조병창에서도 장교용 군도의 칼날 생산시스템을 갖추어 98식 전도의 칼날 보급에 나섰으며 이러한 칼들은 대체적으로 일본도의 특징인 하몬이 없고 슴베에도 장인의 이름보다는 공산품에 가까운 각인이 찍히거나 공장명, 제조년월일 등의 각인이 찍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칼날들은 성능은 오히려 2류, 3류 장인들의 작품이 많아 품질이 나빴던 골동품 일본도의 칼날들보다 훨씬 성능이 좋았고 내구성도 뛰어났지만, 공산품이며 일본도의 미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품 취급을 받았다.

2.3. 도장구(刀裝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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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98식은 94식 군도에서 고리만 빼놓은 것으로서 속이 비어 장식적인 스카시 쯔바를 비롯한 모든 요소가 공통되었다. 98식 전도의 입장에서는 초기형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일전쟁 개전으로 군도의 수요가 폭증함과 동시에 더이상 손이 많이가는 스카시 채색 쯔바와 총 8개에 달하는 셋빠를 그대로 유지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산성이 나빴으므로, 곧 스카시를 하지 않은 보통 쯔바로 교체된다. 더불어 두꺼웠던 초기형의 쯔바보다 얇아졌고, 고품질금형에서 일반금형으로 교체, 주물의 질이 조금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중기형 쯔바라고 부른다. 후기형은 큰 차이는 없지만, 일본의 생산사정이 악화되어 정규 칼집대신 약식칼집의 대체생산량이 많아지기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잠금 장치를 없애고 아예 똑딱이단추나 끈 등 다양한 고정장치를 달도록 고전 쯔바에서 볼 수 있는 구멍을 낸 것들도 있다. 쯔바는 기본적으로 철제 주물에 금도금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금도금 위에 색칠을 하거나, 아예 금도금을 하지 않고 금색 도료를 뿌린 금칠만 하고 마는 경우도 있었다. 골동품 98식은 이런 색칠이나 도금이 벗겨진 경우가 많다.

칼자루와 칼집에 들어가는 여러 부품들도 똑같은 패턴을 밟았는데, 초기형에서는 두텁고 정밀한 주물로 모양새가 고급스러웠지만 중기형에 가서는 물자 절약을 위해 두께가 얇아지고 주물의 품질도 초기형에 비해 떨어지다가, 후기형 가서는 숫제 프레스 가공으로 만든 조악한 도장구를 가져다 끼우기 시작한다. 3식 군도의 간단하기 짝이 없는 도장구와 디자인의 배경에는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실전성 이외에 이러한 현실적인 사정이 배경에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2.4. 손잡이(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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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식 전도의 손잡이(츠카)는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후기형에서는 잠금장치가 삭제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처음에는 X자 감기로 알려진 히네리마키로 끈을 감았으나, 군도의 사용을 보통 한손으로 한다는 경험과, 끈이 밀리는 문제가 있다는 점 때문에 보다 튼튼하고 한손으로 쓰기 좋은 카타테마키(片手卷)방식으로 바뀌었다. 98식의 후속인 3식 군도는 이러한 점을 미리 적용하여 기본 감기가 카타테마키라는 점이 특징이다. 일본군에서는 잇칸마키(一貫卷)라고 불렀다. 기존과 비교해 보면 칼자루 끝을 보강하는 카시라가네를 끈으로 따로 묶지 않다가, 후기형에서는 함께 묶는 것이 보이는데, 카시라가네가 자꾸 빠진다는 실전에서의 경험을 통한 보강책이다.

2.5. 칼집(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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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집은 철제, 알루미늄, 그리고 목제칼집에 가죽씌운 것, 특별주문품 중에서는 나무칼집에 어피를 감아 마무리한 최고급품까지 존재하는데, 대부분의 칼집은 철제와 알루미늄이었으며, 목제칼집에 가죽을 씌운 것은 칼집의 손상을 우려해 처음부터 저가의 나무칼집을 만들고는 그 위에 가죽을 씌워 칼집 외장 보호용의 야전용가죽덮기(野戦用革覆い)를 흉내낸 약식칼집이다. 철제와 알루미늄 칼집은 칼날의 보호를 위해 내부에 목제 속집을 넣어놓으며, 이는 유럽 세이버들도 마찬가지.금속제 칼집을 사용하는 것은 유럽 세이버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써, 튼튼해서 전쟁터에서 파손될 우려가 적은 것이 장점이다.

금속제 칼집에는 색칠이 되어있는데, 구군도 시절만 하더라도 칼집은 크롬도금을 한 은색의 반짝반짝 빛나는 칼집이었지만, 항공기가 등장하고 기도비닉이 중요해진 1차대전 이후에 이르러 빛나는 칼집은 적에게 발견되기 쉽다는 문제점 때문에 칼집을 모두 색칠하게 되었다. 물론 녹을 방지하겠다는 이유도 존재한다. 칼집의 색깔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데, 대체적으로 98식의 경우 국방색과 녹색, 갈색의 3색의 이시메(石目)[1] 방식의 반광택채색으로 되어 있다. 초기형은 빨간색과 녹색의 광택 채색으로 되어 있는데 94식 칼집 채색의 연장선상에 있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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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금장치의 고정부도 칼집마다 다른데, 금속제 칼집은 칼집 입구쪽에 사각형의 구멍이 나 있어서 이곳으로 고정장치의 갈고리가 들어간다. 이 부분은 칼집 입구의 장식(구치가네:口金)으로 가려지게 된다. 특주품 칼집과 같이 목제칼집인 경우는 구치가네에 갈고리가 걸리는 부분이 있고, 아예 염가의 약식칼집을 사용하는 경우는 잠금장치가 걸리는 부분을 파내서 잠금장치가 있으나마나하게 한 후, 약식 쯔바를 장착하여 똑딱이단추로 고정시키거나, 벨트버클, 끈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고정시킨다. 후기형에는 아예 잠금장치가 없는 것도 있다.

2.6. 야전용가죽덮개(野戦用革覆い)

94식 전도, 98식 전도의 칼집 모두 금속제 칼집과 장식을 달고 있었으므로 튼튼하기는 하되 돌이나 흙바닥 등에서 기스가 쉽게 나고 장식이 금방 망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칼집을 가죽으로 덮어 보호하는 풍토가 이미 유럽 세이버에서부터 존재하여 구군도에서도 간혹 쓰였고, 98식에서도 대중적으로 쓰였는데 그것이 바로 野戦用革覆い(야센요오가와오오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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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전용가죽덮개는 2가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원래 98식의 칼집을 가죽으로 덮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예 처음부터 나무로 칼집을 깎은 뒤 그 위에 가죽을 덮어서 대용 칼집으로 쓰는 것이다. 이것을 약식칼집이라고 한다. 약식칼집이나 정규칼집이나 모두 야전용가죽덮게는 탈착가능하게 만들어지나, 간혹 완전박음질되어 탈착불가하게 나오는 것도 있다.

3. 실전에서의 활약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실전 투입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중일전쟁 당시 북지나방면군에 파견된 나루세 칸지의 군도수리반이 처리한 1681자루의 군도 중 실전손상은 3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군도라는 것은 장교라면 의무적으로 구입하여 소지해야만 했던 물건이었으며, 일선 장교들뿐만 아니라 참모나 보급과 같은 비전투임무에서 일하는 장교들도 모두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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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사변미담 - 나점령 적진공략때의 30인베기 신화의 현장)

그외에 일선에서는 돌격을 선도하는 장교의 지휘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초급장교의 경우 이 과정에서 적과 군도로 교전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칼대 칼의 싸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일방적으로 베거나, 총검과의 교전이었고, 교전 과정에서 힘이 너무 들어가 베고 돌까지 친다던지, 철모를 때린다던가, 총의 기관부에 맞아 칼날이 손상되거나 이때의 충격으로 손잡이가 파괴되는 경우도 있었다.[2] 이런 경우는 수를 다 셀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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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국 뉴올리언즈 국립 2차대전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1942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해병대 대위 월터 스토퍼 매킬헤니(Walter Stauffer McIlhenny)[3]가 일본군 장교가 휘두른 칼에 철모를 맞았으나 사살하고 노획한 전리품이다. 사진의 군도는 약식칼집으로 패용고리와 가죽덮개는 망실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육군 토야마학교에서 내놓은 군도의 조법 교범에서도 철모는 때리지 말라고 실려 있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심리적으로 굉장한 압박감과 공포를 느꼈고, 미군에서도 이에 대비해 커틀러스검술을 적용하여 정글도를 사용하는 검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외에는 주민친화와 위력과시를 이유로 점령지의 마을 유력자나 시민들을 초대하여 베기 시범을 보여주기도 하는 데 쓰였고, 칼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안 잡혀있던 장교부사관철조망을 끊는 데 쓰기도 했다. 나쁜 쪽으로도 쓰였는데 포로 또는 민간인 처형, 할복을 할 때 배를 가르는 데도 쓰기도 했고 할복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쳐주는 데에도 쓰였다. 아무튼 근본은 지휘도로써의 요소가 크고, 실전에서는 그렇게 화려하거나 대단한 활약까진 안했다. 때로는 미군의 손에 의해 일본군을 베는데 쓰였다는 일화도 있는데, 일본군이 칼을 뽑아들고 달려오자 미 해병대원이 이걸 잡아 뺏고서는 그 군도로 일본군을 오히려 베어버렸다는 일화.[4] 그 해병대원은 손을 크게 다치고 말았지만, 좋은 검을 빼았아 냈다며 즐거워했다고 한다.[5] 역사의 아이러니.

4. 문제점

98식 군도는 본래 험악한 환경에서 마구 굴러다니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장교의 지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복잡한 장식들은 실전에서는 문제를 일으켰다. 애초에 장식성이 강한 진타치(陣太刀)에 해당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점이 더욱 강했는데, 구체적인 문제라면 접착된 칼자루 끝부분의 가부토가네가 빠진다던가, 칼집의 장식이 이탈하는 문제, 전통 일본도에서도 존재하던 츠카마키(손잡이 끈)이 밀리는 문제, 칼날을 칼자루에 고정하는 대나무못(메쿠기)가 1개밖에 없어 사용하다 부러져 칼날이 뽑혀 날아가는 문제, 마찬가지로 손잡이가 갈라지거나 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또 알미늄/황동 주물로 만들어진 장식이 쉽게 긁히고 손상되는 등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사안이었다.

이 점은 사실 전통 일본도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던 문제점으로, 세이버 외장을 가진 구군도에서는 발생률이 현저하게 적은 사안이었다. 특히 골동품 칼날을 가져다 쓴 경우 슴베가 짧은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물건들은 손잡이가 부러지는 문제(슴베가 들어있지 않으므로)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에 비해 알미늄 통짜 주물로 손잡이를 만든 95식 부사관도는 금속 손잡이였으므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충분히 감안하여 새롭게 등장한 3식 군도에서는 츠카마키의 변경, 대나무못을 2개로 추가, 장식의 단순화 및 슴베의 길이 연장 등의 조치를 취해서 전체적으로 튼튼한 내구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 장교들은 겉보기에 화려한 98식 전도만 계속 썼잖아? 안될거야 아마

5. 관련 문서


[1] 이시메란 일본도의 칼집이 쪼개지거나 터지는 일을 막기 위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칠을 올린 것을 말한다. 보통 일본도의 칼집은 저렴한 것은 나무 속을 깎고 그대로 접착하고 색칠하는데, 사용하다 보면 쪼개지거나 터지는 일이 생긴다. 비슷한 강화책으로 어피를 칼집 전체에 감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해버린다는 것이 단점.[2]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당시의 일본군 장교나 사병, 부사관 모두 검술을 제대로 수련한 자는 매우 적었으며, 검도는 진검 사용시의 기세와 특성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의 군도술을 가르치는 군도의 조법 과목이 신설된 것이었지만, 일주일 속성교육이 그렇게 큰 효과를 내기도 그렇고, 정신 하나도 없는 실전에서 냉정한 마음가짐으로 검술을 쓸 만큼의 역량을 길러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조차도 전군 보급은 1940년이 되어서였으니, 가진 거라곤 혈기와 힘과 기세뿐인 젋은 장교나 부사관들이 힘과 악으로 칼을 다루다 망가트리는 일은 자주 생기는 일이었다. 특히 전통 방식으로 만든 98식 전도가 이런 손잡이 파손이 많았고, 전통 장인의 검날을 쓴 경우 이러다 휘어지기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루세 군도수리반이 학을 뗀 것이 첫번째로는 손잡이 파괴 문제였고, 둘째로는 칼날 휘어짐 문제였다고 한다.[3] 타바스코 소스를 만든 매킬헤니가 사람으로 훗날 타바스코 3대 사장이 되었다. 종군 경험을 살려 베트남전 때 타바스코 소스가 군납품목이 되게 만들었다.[4] 실제로 스포츠 과학이 발전하면서 근래에 들어서야 인종적인 피지컬 차이를 극복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거지 동양인과 서양인의 육체적 포텐셜 차이는 매우 크다(...) 특히 당시 미국 군인은 아프리카부터 동남아 전선까지 빵빵한 보급라인을 자랑해서 열악할 지언정 굶고 다니진 않았지만 일본은 전쟁 초기부터 극심한 보급난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나무껍질을 삶아먹거나 심지어 식인행위까지 일어났을 정도로 막장인 동네였다.[5] 전리품 중에서 가장 선호되었고 지금도 경매시에 가치가 높은 전리품은 고급 장교들이 주로 패용하던 권총, 시계, (장식용)도검이다. 이 중 도검은 가끔 더 오래전에 만들어진 진짜 문화재가 거래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