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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d5f7e><colcolor=#fff>발생일시 (현지 시각) | 1909년 1월 23일 오전 2시 48분경 | |
진앙 | 북위 33.0도, 동경 53.0도 | |
진원의 깊이 | 불명 | |
규모 | Ms 7.3 | |
최대진도[1] | IX(Violent) | |
피해상황 (최종) | 사망자 | 6000~8000명 |
재산피해 | 60~130개의 마을 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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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월 23일 이란 카자르주의 실라코르 평야[2]에서 발생한 지진. 일어난 곳이 실라코르 평야이기 때문에 실라코르 지진이라고도 한다. 규모 7.3의 지진으로 인해 약 6,000~ 8,000명이 사망했다. 지진 이후 6개월 동안 여진이 계속되었다. 이 단층에서 파열된 부분은 2006년 보루제르드 지진[3]의 주요 파열대와 동일했다.2. 지진
지진으로 인해 40km의 가시적인 표면 단층이 생성됐다. 단층 경사면에 대한 동시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변위량은 알 수 없지만 수직 변위는 1m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진과 관련된 주향 이동 변위의 가능성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지진으로 주요 최근 단층의 지류가 파열되었다. 이 지진은 북서쪽으로 향하는 오른쪽 측면 주향 이동이 특징이다. 이 지진 동안 도루드에서 보루제르드까지의 주요 최근 단층의 남부 구역이 파열되었다.3. 피해
이 지역 내 60개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고 130개 이상의 마을이 피해를 보게 됐다. 허나 피해는 40,000제곱킬로미터 지역 내에 국한되었다. 이 구역에서 6,000에서 8,000명이 사망했고 수천 마리의 동물도 사망하게 됐다. 피해는 진원지 실라코르와 국내 부족이 거주하는 주변 계곡에서 가장 심했다. 진원지에서 남동쪽으로 20~30킬로미터(12~19마일) 떨어진 곳에서 지반 붕괴와 산사태의 징후가 포착 되기도 했다.전국에 혼란과 혼돈을 가져온 이란 입헌 혁명이 지진이 발생했을 때 진행 중이었다. 1908년 쿠데타 이후 거의 모든 언론사는 검열을 받았고, 운영이 허용된 언론사는 월별 또는 분기별 간격으로 기사를 게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란 언론은 1909년 4월 말에야 지진을 보도했다. 지진이 코카서스, 터키, 바그다드에서 느껴질 정도로 광범위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유럽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진원지 지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보는 딱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