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후음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2. 작중 행적
남양군 완성에 살던 인물. 조위의 무자비한 착취 아래 황폐해진 완의 상황에 절망하며 평화로웠던 유표 시절과 마지막까지 남양 백성들을 챙겨 떠나려 했던 유비를 그리워한다. 본인의 회상에 따르면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해서 조조군이 남하했을 당시 서주와 중원에서 조조군의 학살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은 조조군에게 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짐 싸고 유비를 따라 도망쳤고, 과거의 경험 때문에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고 경고해서 일부 현지 주민들은 따라갔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시대상 고향을 버리고 난민이 되는 것이 주저되어 가지 않았다가 결국 조조군의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며 후회하게 되었다고 한다.대대로 물려온 토지를 팔고 굶어 죽는 것과 봉기하여 창칼에 죽는 것 중 후자를 택해 원 역사대로 거병한다. 본래는 그저 앉아서 죽진 않겠다는 오기와, 10년 전 유비를 따르지 않은 일의 후회로 인한 결정이었으나 후음과 500명의 거병에 남양군민 수만 명이 합류하면서 쉽사리 완성을 점령한다.[1]
때마침 남양에 들어서던 유비군 선봉장 황권은 후음을 진압하겠다고 남양 외곽 조조군이 빠져버린 덕에 간단히 남양 외곽 무당현에 군영을 설치할 수 있었다.
본래는 동리곤을 처단하려 했으나 남양의 명사 호족인 종자경이 한나라 관리인 동리곤을 죽이면 안되고, 자신이 호족들의 협력을 얻어보겠다고 구슬리자 속아서 이 둘이 도망치게 두고 만다. 본래라면 이 둘이 남양 각지의 둔전병을 모아와 완성을 포위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사이 조인이 이끄는 원군이 도착해 토벌 당하나, 후음의 거병 소식을 들은 유비가 황권 쪽에서 마련해 둔 군수물자를 전달하고, 마초가 이끄는 기병 5천기를 급파해 동리곤과 종자경을 생포하고 외곽에서 지원하게 한 덕에 한결 여유롭게 수성전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완성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유비군이 중과부적으로 물러나자 잠시 괜히 일어났나 고민하지만 처음 봉기 했을때의 절박함, 죽더라도 세끼 밥 배불리 먹고 죽고 싶었던 때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실제로 완성에 쌓여있던 위군의 군량미가 넉넉했고 마초와 황권이 지원해준 식량도 있어 한동안 밥 먹을 걱정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원 역사보다 훨씬 긴 9개월, 즉 219년 대홍수까지 버티는데 성공한다. 물론 조조군이 전력으로 몰아쳤는데 막힌 건 아니고 한 번 패한 병력을 더 소모시키는 대신 조조의 지구전 전략에 맞춰 천천히 물자를 소진시켜 반군을 말려 죽이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완성의 식량도 떨어져 가는 219년 가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2] 유비군 본대가 풍등을 통해 홍수로 인한 양번 포위와 우금군의 괴멸, 그리고 유비군의 완성 구원전 시작을 알리자 환호한다.
완성 농민들이 나가서 유비군에게 호응하자고 말하지만 자신들의 실력으론 오히려 성을 빼앗길 수도 있다며 거부하고 유비군의 승리를 간절히 기도하며, 결국 유비군이 승리하자 기뻐하며 이들을 맞이한다. 이후 유비가 남겨둔 위연, 왕평과 협조하며 완성을 지키고 있다.
그 후에도 양번 대전 중에도 왕평과 같이 성을 지켰으나, 조조가 남양군민들을 학살하며 납치하자 분노해 왕평한테 구하자고 청한다. 그러나 완성에는 정병이 거의 없어서 불가능했고 대신에 완성으로 도망치는 난민들을 받아들여 돕기로 한다. 그러나 후음의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난민들이 몰려와서 성이 기능상실에 빠질 지경이 되자 후회하는데, 다행히 유비가 결전에서 이기고 돌아오면서 마침내 진정한 구원을 얻게 된다.
3. 기타
원 역사에서는 후음이 참수된 후에도 그를 따르던 무리가 상당한 규모(기록상 수천)로 남아있었고 조조 영역 내부에서 외부 지원 없이 3개월 가량 버티는 등 명망과 군재가 상당한 인사였는데 출신 성분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는 점에서 허저와 유사점이 있다. 군소 호족이었을 거란 주장도 있고 임협집단 우두머리였을 거란 추정도 있다.다만 작중에서는 그런 것 없이 세금을 내기 위해선 아버지가 물려준 밭을 팔아야 할 정도로 여유롭지 않은 일개 백성이라고만 나온다. 물론 처음 봉기 때 장정 5백 명이 그와 함께 하고[3] 문지기들과도 친하다는 걸 보면 나름 완성 내에서 인망은 있는 듯하다. 능력도 평범한 농민이라기엔 상당히 좋아서 유비한테 많은 도움이 되고, 초반에 같이 싸운 황권과 마초, 완성 구원전 이후 같이 완성에 있던 위연이나 왕평 같은 촉한군 제장들과의 갈등도 겪지 않았다.
[1] 본래 조조는 양번과 완성을 핵심으로 대군을 배치했으나, 유비군이 한수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하자 외곽으로 병력을 뺀 상황이었다. 후음의 반란 자체는 원 역사와 같은 시기에 일어났으나, 유비의 북벌이 앞당겨지면서 더 유리한 조건이 된 것.[2] 이 시점에서는 어차피 조조가 완성에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버티고 있을 뿐, 만약 우두머리만 죽이고 농민들은 살려준다면 후음은 자기 목이 날아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3] 하룻밤 만에 모인 인원이라는 걸 보면 결코 적은 인원은 아니다. 대한민국 육군 병력 편제로 따지면 즉흥적인 거병에 대대 하나 정도는 모였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