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3 04:06:19

헨리 시즈윅

<colbgcolor=#000><colcolor=#fff> 헨리 시즈윅
Henry Sidgwick
출생 1838년 5월 31일
영국 요크셔 스킵턴
사망 1900년 8월 28일 (향년 62세)
영국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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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철학자, 경제학자
모교 트리니티 칼리지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직관주의적 공리주의3.2. 밀교적 도덕성3.3. 형이상학
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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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철학자경제학자. 제러미 벤담존 스튜어트 밀을 비판적 계승하면서 직관적 공리주의를 주장하였다.

2. 생애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의 스킵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어미스티드 문법 학교의 교장이었다. 트리니티 칼리지에 재학 중에는 케임브리지 사도회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1859년에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회에 선출되었고, 33번째 논쟁자에 등극하였다. 곧이어 고전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으나, 10년 뒤에 도덕 강사로 전과하였다. 1874년에는 '윤리학의 방법'이라는 도서를 출판하였다. 1875년에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도덕학 및 정치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883년에는 나이트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선출되었다. 1886년 이후에는 자유연합당(영국)에 입당하여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 사상

3.1. 직관주의적 공리주의

시즈윅의 윤리학은 공리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공리주의를 방어하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자세를 보였다. 시즈윅은 공리주의의 핵심 원리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도덕적 판단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단순한 경험적 원리로 보지 않고, 직관적으로 자명한 도덕적 진리로 간주했다. 그는 공리주의가 경험적 데이터에 의존하면서도, 이를 초월해 도덕적 직관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즈윅은 쾌락(행복)을 양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인식하며, 공리주의 원리를 현실에서 적용할 때 직면하는 문제들을 깊이 탐구했다.

3.2. 밀교적 도덕성

시즈윅은 도덕적 행동의 실제적 적용에서 일반 대중과 도덕 철학자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시즈윅은 특정 상황에서, 일반 대중이 알 필요가 없는 도덕적 진리를 전문가들만 알고 있을 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밀교적 도덕성"이라고 불린다. 공리주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항상 대중적 교육이나 일반적 도덕 규칙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도덕적 가르침이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조정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도덕적 엘리트주의"로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시즈윅은 이를 공리주의의 실천적 한계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안했다.

3.3. 형이상학

시즈윅의 형이상학은 그의 윤리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인간의 이성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포함한다. 그는 이성이 도덕적 판단의 기초라고 보았으며, 도덕적 직관이 궁극적으로 존재의 본질적 질서에 뿌리를 둔다고 믿었다. 시즈윅은 유물론적 세계관에 회의적이었으며, 인간 의식의 본질과 세계의 목적론적 질서를 탐구했다. 그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탐구하며, 인간 경험의 도덕적, 형이상학적 측면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4. 저서

  • The Methods of Ethnics(윤리학의 방법)
  • The Progress of the Women's Suffrage Movement(여성 참정권 운동의 진전)
  • Outlines of the History of Ethnics(윤리학 역사의 윤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