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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40000><colcolor=#ffffff>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피에로 소데리니 Piero Soderini | |
출생 | 1451년 3월 17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사망 | 1522년 6월 13일 (향년 71세) 로마 교황령 |
재임 |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
1498년 5월 ~ 1512년 8월 31일 | |
아버지 | 토마소 디 로렌초 소데리니 |
어머니 | 디아노라 토르나부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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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보나롤라의 처형 이후 또 다시 거대한 권력의 빈자리가 생기자 시뇨리아 정청은 온건하며 당파성도 적고 원로 정치인이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피에로 소데리니를 1502년 9월 22일 결선 투표를 통해 종신 정의의 곤팔로니에레로 선출했다.[1]사실 피에로가 종신 곤팔로니에레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따로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대단한 인맥이었다. 당장 동생이 볼테라 대주교였고, 프랑스의 왕, 로마의 교황, 체사레 보르자 등 당대의 실권자들과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을 정도로 두터운 사이였기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선출이 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1512년 8월 29일 프라토에서 프랑스 군대와 스페인 군대가 만나 싸움이 일어나면서 그의 권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라토 전투는 율리오 2세에게는 이탈리아 땅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프랑스를 몰아내겠다는 사명을 실현할 기회였고 그는 즉각 나폴리 총독에게 스페인 군대를 출동시켜 프랑스 군대를 치라고 명령했다. 이때 나폴리-스페인 진영에 미래의 레오 10세가 될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 추기경이 있었는데 그는 메디치 가문의 복귀를 노리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피에로 소데리니의 종신직에 반감을 품은 피렌체의 많은 유력 인사들인 그란디[2]들은 조반니 추기경을 환영하는 입장이였고 그들의 지지에 힘입어 조반니는 피렌체로 돌아와 메디치 가문의 복귀를 알렸다. 피에로 소데리니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달마티아에서 시간을 보내다 레오 10세의 호의로 남은 여생을 로마에서 보냈고 사후에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묻혔다.
2. 여담
니콜로 마키아벨리와도 연관이 있는데 당시 서기장이었던 그에게 내무, 외무, 국방장관직을 맡기며 예우해 주었던 것. 그랬기에 마키아벨리는 처음에는 피에로 소데리니가 선출되었을 때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중책을 맡겨주자 좋아하며 그를 충실히 보좌했다. 그러나 1512년 피에로 소데리니가 몰락하며 마키아벨리 역시 피렌체에서 쫓겨났고 이후 다시 한 번 관직에 복귀하기 위해 그 유명한 군주론을 쓰게 된다.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베키오 궁에서의 그림 배틀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다. 둘 다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해 배틀은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의 코가 높은 것 같다고 지적하는 일화에 등장하는 높으신 분도 이 사람이다. 우르비노 공작 가문은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공부하기 위해 떠나자 소데리니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