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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당사자인 이보 포고렐리치와 마르타 아르헤리치.[1] |
1. 개요
1980년 제10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한 이보 포고렐리치가 결선 진출에 실패하자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이에 반발하며 심사위원단에서 사퇴하며 벌어진 일련의 논란을 의미한다.2. 사건의 진행
2.1. 배경
1980년 10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0회 프레데리크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지금의 쇼팽 콩쿠르의 위상이 그렇듯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큰 주목을 받던 대회였다. 이 대회는 특히 쇼팽의 음악 해석을 겨루는 가장 권위있는 무대로 알려져 있었고, 역대 콩쿠르에서는 심사 결과를 둘러싼 크고 작은 논란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실제로 1955년 콩쿠르 당시 거장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와 1960년 콩쿠르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심사 기준에 항의하며 사임하거나 강한 불만을 표시한 전례가 있었고, 직전인 1975년 대회에서도 관객상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던 참가자가 중도 탈락해 논쟁이 일어난 바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1980년 콩쿠르는 또 하나의 전설적인 스캔들을 낳게 된다. 그 중심에는 당시 22세의 유고슬라비아 출신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Ivo Pogorelić)와,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피아노 거장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가 있었다.이보 포고렐리치는 콩쿠르에 참가하기 전까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신예였지만, 뛰어난 기량과 개성적인 해석을 지닌 연주자였다. 한편 아르헤리치는 196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피아니스트로, 이번 대회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어 있었다. 1980년의 폴란드는 정치적으로도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콩쿠르 개막 한 달 전인 9월에 자유노조 운동이 공식 인정되는 등 사회 분위기가 뜨겁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포고렐리치의 등장은 단순한 음악 경쟁 이상의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2.2. 발단
제10회 쇼팽 콩쿠르 당시 쇼팽 프렐류드 Op. 28-24 연주. 지금 들어도 매우 저돌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포고렐리치는 예선 단계부터 비전통적이고 파격적인 해석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연주는 기존의 쇼팽 연주 관습을 깨는 독특한 것이었고, 이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실제로 심사 결과를 보면 절반의 심사위원은 그에게 최고점을 준 반면, 나머지 절반은 최저점을 주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극단적 득점 편차는 콩쿠르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고, “관객이 열광하는 연주자가 심사위원 절반에게는 낙제점을 받는” 상황을 만들었다.
심사위원들 사이의 의견 차이는 포고렐리치의 음악적 해석과 무대 매너에서 기인했다. 지지파들은 그의 연주가 전례 없이 창의적이고 강렬하다고 평가한 반면, 반대파들은 그것이 “과도한 극단으로 치닫아 음악을 훼손하고 연극적인 과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심사위원 유진 리스트(Eugene List)는 “포고렐리치가 매우 재능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그는 음악을 존중하지 않고 극단으로 몰고 가 왜곡시킨다. 마치 연극을 하는 것 같다”고 혹평했다. 이러한 보수 성향의 심사위원들은 “쇼팽 콩쿠르는 오직 쇼팽 음악만을 위한 대회인데, 포고렐리치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음악의 본령을 벗어난다”며 그의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편, 혁신을 긍정적으로 본 심사위원들은 그를 “예외적으로 독창적인 피아니스트”라고 여겨 높은 점수를 주었고, 이러한 평가의 균열은 대회 진행 내내 지속되었다.
포고렐리치의 연주 스타일은 음량과 속도의 극단적인 대비, 그리고 곡 구조를 독자적으로 재해석하는 대담함으로 특징지어졌다. 예컨대, 그는 한 곡 내에서도 섬세한 피아니시모부터 유리창을 깨트릴 듯한 포르테까지 소리를 극적으로 오갔으며, 템포 선택에서도 통념을 깨는 과감성을 보였다. 이런 파격적 해석은 젊은 청중들에게는 신선하고 혁명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전통적인 쇼팽 해석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악보에 대한 불충실” 혹은 “곡예에 가까운 일탈”로 비춰졌다. 한 평론가는 “포고렐리치의 폭발적인 해석은 무엇보다도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고 있으며, 드물게 깊이 체험된 예술적 진실이 담겨 있다”고 옹호했지만, 다른 이는 “그의 해석은 퍼즐 조각 같아 전체를 산산조각낸다”고 혹평하는 등 평가는 양극으로 갈렸다. 결국 “중간이 없다”는 말처럼, 포고렐리치는 누군가에게는 천재적인 혁신가로, 또 다른 이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이단아로 여겨지게 되었다.#
2.3. 심사 과정의 전개와 논쟁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심사위원단 내부의 갈등도 서서히 표면화되었다. 예선 1차 무대부터 일부 심사위원들은 포고렐리치의 통과에 불만을 터뜨렸는데, 영국 출신의 원로 피아니스트 루이스 켄트너(Louis Kentner)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이 모두 탈락하고 정작 “포고렐리치 같은 연주자”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것에 항의하며 1차 심사 직후 곧바로 심사위원직을 사퇴했다. 그는 “포고렐리치 같은 사람이 2차에 올라가는 콩쿠르라면 더 이상 심사를 할 수 없다. 내 미학적 기준과 맞지 않는다”라고 밝히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는 향후 벌어질 더 큰 항명의 전조였다. 당시만 해도 켄트너의 행동은 자신의 제자가 떨어져서 화를 낸 것으로 치부되며 비교적 작은 해프닝으로 받아들여졌다.#
포고렐리치는 준결선에 해당하는 3차 무대까지 진출했는데, 이 무대에서 그의 반항적인 연출이 절정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콩쿠르 규정상 참가자는 정해진 순서대로 곡을 연주하고, 곡 사이에는 박수도 자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포고렐리치는 스스로 프로그램 순서를 바꾸는 대담한 행동을 감행했다. 원래는 마주르카 곡들을 먼저 치고 이어서 소나타를 연주해야 했으나, 그는 자신만의 “연출”에 따라 거꾸로 쇼팽 b♭단조 피아노 소나타를 첫 곡으로 연주했다. 소나타를 폭발적 에너지로 끝낸 그는 객석을 향해 자리에서 일어서 박수를 청하는 제스처를 취했고, 청중이 환호하자 아예 무대 밖으로 퇴장했다가 잠시 후 다시 등장하는 파격을 보였다. 이어 남은 마주르카들을 마치 “앙코르 곡”처럼 연주하며 그의 순서를 마무리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콩쿠르 무대에서는 금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를 지켜본 한 목격자는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엄숙한 형식에 따랐지만 포고렐리치는 철저히 계산된 쿠데타를 일으켰다. 관객이 열광하자 그는 이를 즐기며 마치 자신의 독주회처럼 행동했다”고 회고했다.#
포고렐리치의 무대 매너 역시 논쟁거리였다. 그는 전통적인 연미복 차림을 거부하고, 가죽 바지에 하얀 프릴 셔츠, 검은 끈타이라는 이색적인 복장을 하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어떤 평론가는 그 모습이 마치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왕자” 같았다고 묘사했을 정도였다. 당시 클래식 콩쿠르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차림새였기에,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에게는 이 또한 불편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발적 제스처는 오히려 젊은 관객들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포고렐리치가 나타날 때마다 객석에는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고, 일부 청중들은 그의 패션을 따라해 가죽 바지와 흰 셔츠 차림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콩쿠르 진행 중 이미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었다.
결국 3차 무대 연주 직후 진행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여전히 양극으로 갈렸고, 포고렐리치는 최종 결선 진출자 명단에 들지 못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았다. 절반의 심사위원들이 준결선에서 그의 탈락을 강력히 밀어붙였고, 나머지 심사위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사위원장 카지미에시 코르드는 내부 논의를 종합한 후 포고렐리치 탈락을 공식 발표했는데, 이때 니키타 마갈로프(Nikita Magaloff)와 폴 바두라-스코다(Paul Badura-Skoda) 등 일부 심사위원들은 “이런 예술가가 결선에 못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임까지 하지는 않았다. 이후 코르드 위원장은 외부에 “특정 심사위원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며 에둘러 아르헤리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심사위원단 내부의 갈등은 끝내 봉합되지 못한 채, 포고렐리치의 탈락이라는 결정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바로 그 순간 더 큰 사건의 방아쇠가 당겨지게 된다.
2.4.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사임과 발언
포고렐리치 탈락 발표 직후, 심사위원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즉각적인 항의의 표시로 심사위원직 사임을 선언했다. 그녀는 결과에 불복하며 현장을 박차고 나갔고, 곧이어 열린 즉석 기자회견에서 사임의 이유를 밝히면서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르헤리치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보 포고렐리치는 천재(genius)이며, 내 동료 심사위원들은 뿌리박힌 보수성 때문에 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런 결과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며 심사위원단과 콩쿠르 운영에 강한 불신과 실망을 표현했다. 그녀의 이러한 발언은 곧 전세계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었고, 쇼팽 콩쿠르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아르헤리치의 행동은 앞서 켄트너가 사임했던 경우와 표면상 비슷해 보였지만, 그 파급력은 비교할 수 없이 컸다. 먼저 아르헤리치는 당대 최고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자 과거 이 콩쿠르의 우승자였기에 발언의 권위와 신뢰성이 높았다. 또한 그녀의 사임 시점이 결선을 눈앞에 둔 3차 종료 후였던 덕분에, 이미 많은 관객들이 포고렐리치의 탈락에 감정이 이입된 상태였다. 아르헤리치가 입장을 밝히자 “마르타도 우리와 같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며 청중과 평론가들이 크게 호응했고, 그녀의 비판은 정당한 예술적 양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켄트너의 경우 1차 때라 대중의 관심이 덜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제자가 떨어져서 토라진 것”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금세 여론의 지지를 잃었던 바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르헤리치의 항의는 “예술을 위한 양심적 결단”으로 미화되며 지지를 받았다.
물론 모든 이들이 아르헤리치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심사위원장 코르드는 그녀의 돌발행동을 “지나치다”고 지적했고, 일부에서는 그녀의 사퇴로 콩쿠르의 권위가 훼손되었다는 우려도 표했다. 그러나 아르헤리치는 이러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르샤바를 떠났으며, 이후 폴란드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 대신 그녀는 고국 제네바로 돌아간 뒤, 콩쿠르 최종 결과가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우승자인 당 타이 선(Đặng Thái Sơn)을 축하하는 공개 전문(電文)을 바르샤바 콩쿠르 조직위에 보내는 품위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르헤리치가 혹시 베트남 출신 우승자인 당 타이 선에 대한 반발로 사임한 것 아닌가 오해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이 축하 전문 덕분에 “아르헤리치의 항의는 특정 우승자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순수히 예술적 소신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르헤리치의 사임은 결국 “포고렐리치 논란”을 대회 내부 문제에서 국제적 이슈로 비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심사위원이 콩쿠르 결과에 항명하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뉴스를 타전했고, 음악계의 수많은 거장들도 이에 대한 의견을 쏟아냈다. 아르헤리치는 후일 한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포고렐리치는 진정 특별한 예술가였다. 내가 한 행동은 그에 대한 예의이자, 예술에 대한 예의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러한 드라마틱한 퇴장은 훗날까지 회자되며, 콩쿠르와 예술의 본질에 대한 많은 담론을 불러일으켰다.
3. 사건 이후의 여파
포고렐리치의 탈락과 아르헤리치의 사임으로 촉발된 파장은 콩쿠르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우선 포고렐리치 본인은 공식 입상자 명단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여러 특별한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폴란드 음악계는 그의 탈락이 발표되자 자체적으로 “구원(救援) 조치”에 나섰는데, 바르샤바 음악협회 회장이던 소프라노 스테파니아 보이토비치는 사비를 털어 5만 즈워티(당시 약 1,650달러 상당)의 특별상을 그의 “탁월하게 독창적인 피아니즘”에 대한 보상으로 수여했다. 또 폴란드의 저명 배우 이레나 에이흘레로브나는 콩쿠르 시상식에서 자신이 쇼팽 서한 낭독자로 받을 예정이던 출연료 2만 즈워티(약 660달러)를 포고렐리치에게 양도해달라고 요청했다. 현장에서 취재하던 폴란드의 20여 명 음악 평론가들도 한 목소리로 “그는 콩쿠르 역사상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은 피아니스트”라고 선언하며 기자단 이름으로 별도의 상을 마련해 그에게 수여했다. 심지어 바르샤바 국립음악원의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이보 포고렐리치 – 우리의 우승자”라는 문구를 적은 증서를 만들어 그에게 헌정했고, 음악원 원장은 “콩쿠르에서 못 들려준 연주를 들려달라”며 학교 관현악단과 협연하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연주회를 제안했다. 이렇듯 공식 결과와 무관하게 포고렐리치는 사실상의 ‘챔피언’ 대우를 받으며 콩쿠르를 떠났다. 더욱이 세계적인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DG)이 그에게 전속 녹음 계약을 제의하여, 보통 우승자만이 얻기 힘든 기회를 그는 바로 거머쥐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비록 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누구보다도 승리한 승자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들이었다.#
국제 무대에서 포고렐리치의 커리어도 이 논란을 계기로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탈락 다음 해인 1981년, 그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화려한 데뷔 독주회를 열었고 곧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하는 등 정상급 연주자로 발돋움했다. 언론은 포고렐리치에게 “콩쿠르가 만들어낸 스타”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그의 이름은 당대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뜨겁게 회자되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 관객들은 그의 반항적인 이미지와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 스타일에 열광하여, 공연장마다 ‘락스타’를 방불케 하는 환호가 이어졌다. 실제로 콩쿠르 직후 바르샤바에서 열린 포고렐리치의 갈라 콘서트에는 1천 석 공연장에 3천 명이 몰려들어 입장권을 얻지 못한 청중들이 아우성을 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수백 명의 음악원 학생들이 문 앞을 가로막고 표 가진 이들의 입장을 저지했으며, 어떤 뒷문은 아예 부서져 100여 명이 무단으로 밀고 들어가는 등, 그 광경은 마치 록 콘서트장의 열광적인 군중과 같았다. 무대에 등장한 포고렐리치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악마적 후광을 두른 모습”이었고, 관객들은 미친 듯이 “이보! 이보!”를 연호하며 열광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이런 폭발적 인기 덕에 포고렐리치의 음반은 이례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그는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드물게 대중적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의 이면에는 과도한 신화화의 부담도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영국의 피아니스트 피터 도노호(Peter Donohoe)는 “1980년, 마케팅 업계와 평단, 매스미디어, 그리고 수천 명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한 재능 있는 연주자에게 예술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포고렐리치에 대한 열광과 기대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이후 그의 행보는 끊임없는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 그의 스승이자 아내였던 알리자 케제라제(Aliza Kezeradze)의 사망으로 포고렐리치는 몇 년간 활동을 중단하며 슬럼프를 겪었고, 2000년대에 복귀한 후에는 이전보다 더 기이하고 파격적인 해석을 선보여 다시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각에서는 그의 연주가 “이상하다 못해 이해 불가능하다”는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시대를 앞서가는 예언자적 예술가”라는 극찬이 공존했다. 이렇듯 포고렐리치는 논란으로 시작된 커리어를 논란과 함께 지속해왔고, 시간이 흘러도 그에 대한 열띤 찬반 논쟁은 식지 않았다. 심지어 2015년 그가 오랜만에 런던 무대에 섰을 때에도 혹평을 계기로 “당시 심사위원단의 판단이 옳았던 것 아니냐”는 담론이 온라인에서 재점화되어 수십 개의 댓글 토론을 낳았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1980년의 사건은 포고렐리치 개인의 인생은 물론 콩쿠르의 역사와 경연 문화 전반에 길이 남을 영향을 미쳤다.
4. 반응
폴란드 현지 언론들은 포고렐리치의 탈락을 두고 “쇼팽과 ‘쇼팽 콩쿠르’를 둘러싼 거대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보도했고, 대회 기간 내내 폴란드의 음악 잡지와 신문들은 이 논란을 연일 다뤘다. 폴란드의 평론가들은 대체로 포고렐리치 편에 서서 심사 결과를 비판했는데, 20명의 현장 취재 음악평론가 전원이 그를 “가장 부당하게 대우받은 참가자”로 선정해 상까지 수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평론가 요제프 칸스키(Józef Kański)는 “이런 칼리버의 예술적 개성을 지닌 피아니스트를 결선에서 배제한 것은 명백한 실수”라고 단언했고, 타데우시 카치친스키(Tadeusz Kaczyński)는 “나이가 지긋한 심사위원에겐 불편했던 것이 젊은 심사위원 눈에는 오히려 장점으로 비쳤다”며 세대 차이에 주목했다. 실제로 폴란드 언론은 아르헤리치(당시 39세)와 켄트너(당시 70대 후반)의 나이 차이를 거론하며, “음악적 미학의 세대 교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평했다. 젊은 청중들의 열광에 대해서도 단순한 “청춘의 반항”으로 치부하지 않고, “현대 시대의 불안과 격동을 포고렐리치가 음악으로 대변했고, 젊은 세대는 그 진정성을 꿰뚫어본 것”이라는 긍정적인 해석을 내놓는 평론도 있었다. 한 평론가는 “요즘 젊은이는 진실과 거짓에 매우 민감하다. 포고렐리치의 해석이 무엇을 말하든, 그 폭발성 속에는 논리와 설득력이 있으며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실성이 있다. 포고렐리치는 현대 시대의 진실을 쇼팽을 통해 보여주는 듯하다”고 평해, 이 논쟁을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시대정신의 반영으로까지 격상시켰다.국제 언론 역시 이번 사태를 크게 다루었다. 뉴욕 타임스는 현장 르포를 통해 바르샤바의 포고렐리치 열풍을 상세히 전하며, “콩쿠르 사상 유례없는 청중의 폭동과 스타 탄생”이라는 극적인 어조로 보도했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세계 각지의 신문과 음악 잡지들도 “심사위원 대중반란”, “쇼팽 콩쿠르의 이변” 등의 헤드라인을 뽑으며 앞다투어 이 이야기를 실었다. 많은 외신들이 특히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이름에 주목하여, 그녀의 항의를 “예술을 위한 결투”나 “콩쿠르 판정에 대한 양심 선언”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보도를 통해 포고렐리치 사건은 폴란드 국내 문제를 넘어 국제적 담론으로 비화되었고,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콩쿠르의 공정성, 해석의 자유, 전통 대 혁신 등의 주제가 활발히 토론되었다. 세계적인 거장 피아니스트들과 지휘자들 역시 인터뷰를 통해 각자의 견해를 밝혔는데, 대체로 “콩쿠르 심사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예술의 다양성을 포용해야 한다”며 포고렐리치의 독창성을 옹호하거나, “대회는 규율과 형평성을 지켜야 한다”며 심사위원단을 두둔하는 식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한편, 이번 스캔들은 쇼팽 콩쿠르라는 브랜드에도 아이러니한 영향을 주었다. 폴란드 국민들은 “우리 콩쿠르가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고, 콩쿠르 조직위 역시 지나친 논란임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대회의 위상이 오히려 강화되는 결과를 얻었다. 훗날 많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1980년의 전설”을 동경하여 쇼팽 콩쿠르에 도전하게 되었고, 이 대회는 “논란까지도 역사의 일부가 되는 무대”로서 독특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러한 평가는 논란이 반복되면 문제가 되지만, 한 번 터진 스캔들은 오히려 대회를 차별화된 신화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시각이었다. 결국 음악계 내부에서도 1980년 사건을 두고 “예술적 기준의 충돌이 빚은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성찰과 함께, “콩쿠르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 값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5. 음모론과 소문들
이보 포고렐리치 논란과 관련하여 당시부터 현재까지 여러 루머와 뒷이야기들이 회자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콩쿠르 결과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는 소문이다. 포고렐리치 본인이 1993년 LA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제기한 주장에 따르면, “소련 블록 당국자들이 대회 몇 달 전부터 북베트남 출신 우승자가 나오도록 정치적으로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이번 쇼팽 콩쿠르에는 나오지 말고 1년 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나가면 우승을 보장해주겠다”는 제안을 들었다고 폭로하며, 1980년 대회의 공정성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승자인 베트남 출신 당 타이손의 승리는 정치적 산물이 되고, 포고렐리치의 탈락도 사전에 예정된 수순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론적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으며, 정작 포고렐리치와 경쟁한 당 타이손은 이러한 소문에 대해 “터무니없는 오해”라고 일축했다. 당 타이손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아르헤리치가 포고렐리치 때문에 나에게 불만이 있어서 사임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착각했지만, 사실이 아니다”라며, 아르헤리치가 자신이 우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또한 “포고렐리치는 서방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나는 공산권 편에 속한 것으로 보이다 보니, 그 사건 이후 내가 어떤 부당한 혜택을 입은 것처럼 얘기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서방으로의 공연 여행이 어려워 9년 뒤에야 미국 데뷔를 할 정도로 많은 제약이 있었다”며, 정치적 음모설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소련이 배후조종했다”는 설은 포고렐리치가 느낀 억울함과 당시 냉전 시대의 분위기가 빚어낸 미확인 주장으로 남아 있다. 폴란드의 쇼팽 연구소(Chopin Institute)도 2008년 포고렐리치가 공식 조사를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며 “심사결과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썰이 떠돌았다. 일부에서는 “아르헤리치가 포고렐리치의 연주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감정적으로 치우쳤다”거나 “그와 개인적인 친분 혹은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식의 뒷말도 있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전혀 밝혀진 바 없다. 오히려 아르헤리치는 포고렐리치와 평소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순수히 그의 무대에서 받는 예술적 충격으로 인해 움직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콩쿠르 이후 포고렐리치가 폭발적 유명세를 얻자, “결국 우승자보다 더 성공했으니 탈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라는 농반진반의 말도 나왔다. 실제로 포고렐리치는 “1등을 못 했어도 가장 유명해진 피아니스트”라는 역설적인 평가를 받았고, 일각에서는 그를 두고 “콩쿠르 역사상 최고의 승자이자 패자”라는 말까지 있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이며, 포고렐리치 본인은 당시 탈락으로 느낀 상처와 분노를 오래도록 간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그가 28년 묵은 논쟁에 대한 재심 요구를 제기한 것이나,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인터뷰에서 콩쿠르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친 점 등을 보면, 그에게 이 사건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장(章)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