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문 배경
''제정신인 놈이라면 도망치겠지. 하지만 나는 도망치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용감무쌍하고도 성깔 고약한 전사인 클레드는 녹서스 특유의 객기와 다혈질을 상징하는 존재와도 같다.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휩쓸지만, 장성들 사이에서는 불신의 대상이고, 귀족들에게는 혐오를 한몸에 사고 있다. 소문에 따르면 클레드는 녹서스 제국이 처음 세워진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군사 작전에서 활약해왔으며, 단 한 번도 후퇴한 적이 없고,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칭호란 칭호는 모조리 ‘따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병사들의 이야기가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지는 미지수다. 확실한 것은 클레드가 스칼이라는 이름의 애마를 갖고 있다는 것과, 썩 미덥지 못한 그 애마를 타고서 저돌적으로 전투에 뛰어든다는 사실이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
2. 장문 배경
민중 영웅 클레드에 얽힌 전설의 시작은 녹서스 건국 시기로,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클레드는 지휘관들 사이에서 골칫거리였지만 일반 병사들의 숭배 대상이다. 병사들 중 실제로 클레드 곁에서 싸운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경기병의 승리' '최고 원수 대장군의 귀환' '산의 제독' 등, 클레드가 모든 전쟁에서 활약해 왔고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칭호를 얻었으며 전쟁에서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담은 허풍스러운 무용담도 넘쳐난다. 대개 말도 안 되는 내용이지만 무용담의 핵심은 클레드가 스칼이라는 못 미더운 애마와 함께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쟁취해 내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망나니 기사 클레드는 밴들 시티라고 불리는 타지 출신의 요들이다. 클레드는 룬 전쟁 이후 녹시이 부족 연합이 있던 곳에 자리 잡은 후 과거의 기억을 지웠다. 클레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은 제1차 드루그네 전투이다. 자반 장군의 군대는 황무지의 언덕을 가로질러 야만족으로부터 도주 중이었다. 앞서 치른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후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그들은 보급 마차마저 포기하고 가장 가까운 기지까지 일주일을 행군해야 했다. 흠집 하나 없는 갑옷을 입고 있는 자반은 병사들의 안위보다 고국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더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고, 생각할 시간을 번다는 이유로 원형의 방어 대형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때, 떠오르는 태양 아래 사막 드라칼롭스를 타고 홀로 언덕 꼭대기에 서 있는 클레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클레드의 무기는 녹슬었고 갑옷은 닳았으며, 옷 또한 누더기 차림이었다. 하지만 시력이 온전한 한쪽 눈동자는 경멸과 분노로 타올랐다. 클레드는 야만족 무리에게 자신의 땅을 떠나지 않으면 말살해 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고함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굶주린 채 장군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던 녹서스의 병사들은 클레드의 객기를 보고 꾹꾹 눌러 왔던 분노를 표출하며 적진에 뛰어드는 클레드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북부 초원에서 일어난 전투 중 가장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역습은 초반에 먹혔으나, 이내 고지에서 빗발치는 야만족의 화살 세례에 무너졌다. 스칼이 클레드를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쳤지만 클레드는 계속해서 싸웠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도끼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고 이빨까지 동원해 가며 한결같이 맹렬하게 적들과 싸워나갔다. 주위에 시체가 쌓여 가고 옷도 엉망이 되었지만 클레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고 우렁찬 고함을 질러대며 맞섰다. 후퇴하느니 용맹한 전사답게 기꺼이 죽음을 택하겠다는 기세였다. 용기는 전염병과도 같은 법.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녹서스 병사들은 클레드의 용기에 감명받아 끝까지 싸웠다. 스칼마저 돌아와 자신의 주인을 구하겠다고 으르렁거리고 발톱을 휘두르며 야만족 부대 후방으로 뛰어들었다. 다시 스칼 위에 올라탄 클레드는 죽음의 회오리바람처럼 야만족을 몰아냈다. 승리라고 하기에는 극소수의 녹서스 병사만이 살아남았지만 드루그네에서 충분히 버틴 덕분에 그 소식이 불멸의 요새까지 전해져 지원병도 파견되었다. 전쟁은 십 년 이상이나 더 계속되었고, 결국 야만족 수장은 녹서스에 화평을 청했다. 야만족의 병력이 녹서스에 합류하자 드루그네는 이후 수 세기 동안 달라모르와 북쪽으로 펼쳐질 군사 작전의 발판이 되었다. 자반 장군의 시체와 그의 화려한 갑옷은 발견되지 않았다. 녹서스 제국의 수없이 많은 군대에는 클레드에 관한 비슷한 일화가 있었고, 녹서스 군대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 전리품을 취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전해져 왔다. 녹서스군이 전투를 벌였던 곳에는 어김없이 '클레드의 영토'라고 적힌 팻말이 분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
3. 드라칼롭스가 거니는 곳
북부 초원은 화려한 속옷이나 황금 요강 따위를 기대할 만한 곳이 못 된다. 여긴 험한 땅이다. 야만인 침입자들, 독풀, 매서운 바람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엄두도 못 내는 땅이다. 살아남으려면 돌멩이와 용암 덩어리를 씹어먹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근방에서는 가장 억세고 사납고 잔혹한 놈이다. 그러니까 이 땅은 내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왜 내가 너하고 단 둘이 있는 거냐고, 이 멍청한 자식!” 나는 벌컥 고함치면서 스칼을 다시 재촉한다. 그러나 스칼은 그저 콧방귀만 뀌고는 바위 위에서 마냥 한가롭게 볕을 쬐기만 한다. 녀석의 비늘은 금빛이 흐르는 거무스름한 금속 색깔이다. 저 드라칼롭스의 가죽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젠가는 강철 검날이 스칼의 다리에 부딪히곤 박살 나는 것도 본 적 있다. 그렇다고 해서 스칼의 방귀 냄새가 덜 고약해지는 건 아니다. “이 빌어먹을 겁쟁이 녀석아! 넌 아무 할 말도 없냐?” 스칼이 나를 올려다보고는 하품을 한다. “끄이끄악.” “그건 고작해야 들꿩 한 마리였다고! 겨우 내 손바닥만 한 새 가지고 겁을 내? 그래서 도망을 쳐? 이 멍청하고 한심한 놈!” “끄이...끄악?” 스칼은 반쯤 뜬 눈꺼풀 위에 내려앉은 파리를 날려 보내면서 되묻는다. “아, 말대꾸 한 번 기가 막히는군! 그래, 진짜 웃긴다. 그치? 하하하! 나는 너의 그 오만방자한 이단아 행세에 딱 신물이 난다. 역시 너를 버리고 가야겠어. 넌 여기서 죽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나 없이 단 하루라도 버티나 보자. 아니, 외로워서 죽어버리겠지!” 스칼은 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바위 위에 도로 머리를 누인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저 녀석과 대화를 하려고 해 봤자 시간 낭비다. 내가 용서해주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스칼이 규칙적인 박자로 뿡뿡거리며 방귀를 뀌어댄다.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프라이팬으로 코를 두들겨 맞은 것 같다. 저 녀석이 노골적으로 나를 비웃고 있다. “그래, 이 망할 자식아!” 나는 냄새 나는 모자를 머리에서 벗어서 바닥에 패대기 치곤 야영지로 걸어간다. 두 번 다시는 저 입버릇 더러운 드라칼롭스와 상종도 않겠다 다짐하며. 아, 그런데 저 모자는 좋은 건데 버리긴 아깝다. 나는 부랴부랴 돌아가서 모자를 도로 낚아챈다. “계속 잠이나 자라, 이 게으른 똥쥐 녀석아. 순찰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는 걸음을 옮긴다. 아늑한 집다운 집에서 하룻밤 편히 묵어보지도 못하고 야영만 하고 다닌 지가 벌써 열 달이 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찰을 못 할 이유는 없다. 여긴 내 땅이고, 앞으로도 계속 내 땅으로 지킬 거다. 저 배은망덕한 도마뱀이 도와주든 말든 간에. * 구릉 지대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덧 해가 지평선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이 시간쯤 되면 빛 때문에 착시가 일어나기 쉽다. 웬 뱀 한 마리가 내 앞에 나타나 파이 껍질에 대해 토론을 하자고 덤볐는데,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봤더니 그건 뱀이 아니라 바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일 뿐이었다. 젠장할. 유감이다. 나는 파이 껍질에 대해서라면 아주 명확한 관점을 갖고 있는데. 파이 껍질이 뭐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게 문제이지만. 그 화제에 대해 누군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지 몇 년은 된 것 같다. 안 되겠다. 일단 버섯 즙부터 한 모금 마시고 머리를 깨워야겠다. 그러고 나서 저 뱀에게 내 견해를 설명해줄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 컹컹거리고 왈왈거리는 소리. 이건 엘마크 떼를 모는 용사냥개들이 내는 소리이다. 그렇다는 건, 엘마크 떼를 데리고 다니는 인간들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침입자들이다. 나는 가까운 곳에 있는 바위로 기어올라가 북쪽을 내다본다. 눈앞에 펼쳐진 구불구불한 언덕은 텅 비어 있다. 저 너머 지평선 쪽에 박힌 쇠말뚝들만 보일 뿐. 어쩌면 버섯 즙 때문에 환청이 들린 걸까? 아니, 아니다. 남쪽을 돌아보니 비로소 눈에 보인다. 침입자들의 모습이. 놈들은 내가 있는 이 언덕에서 한나절쯤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다. 그들이 데려온 삼백여 마리의 엘마크들이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고 있다. 감히 내 초원을! 용사냥개들이 엘마크 떼의 주위를 맴돌며 한곳으로 몰고 있다. 하지만 말은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고, 도보로 걷는 인간 몇 명만 보인다. 이상하다. 인간들은 원래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아마도 저들은 무언가 규모가 더 큰 호송단의 일부인 것 같다. 그래, 분명 그럴 거다. 나는 천재다. 그래서 이렇게 척 하면 척 하고 알아맞힌다. 하지만 그 생각에 더더욱 열 받아서 피가 끓어오른다. 더 큰 호송단이 있다니. 저보다도 더욱 많은 침입자들이 내 땅 어딘가에 들어와서 평화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뜻 아닌가. 한창 뱀과 정답게 파이 껍질에 대한 대화를 나누려던 나의 계획을 감히 방해하다니. 나는 버섯 즙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야영지로 돌아간다. * “일어나, 도마뱀 녀석!” 나는 안장을 꺼내 들며 외친다. 하지만 스칼은 고개를 들며 끙 앓는 소리만 내고는 다시 시원한 풀밭에 턱을 얹는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일, 어, 나!! 침입자들이 들어왔다. 우리 땅의 고요한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스칼은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한다. 그래,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내 말을 못 알아듣지. 가끔 까먹곤 한다. 어쨌거나 나는 스칼의 등에 안장을 얹는다. “우리 땅에 인간들이 있다니까!” 그 말에야 비로소 스칼이 벌떡 일어나서 귀를 쫑긋 세운다. ‘인간’. 그 단어만큼은 녀석도 알아듣는 것이다. “그 인간들한테 가자!” 나는 안장 위에 올라타고서 남쪽을 가리키며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짐승이 부리나케 북쪽으로 내뛴다. “아니,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저쪽 말이다!” 내가 고삐를 잡아당겨 이 겁 많은 짐승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자, 스칼은 땅을 힘껏 박차며 요란하게 울부짖는다. “끄이이끄아아악!” 그러고는 드디어 질주를 시작한다.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덤불 숲의 가지들이 다리에 쓸려서 살갗이 따끔거리고, 우리 등 뒤로 피어 오르는 먼지 구름에 코가 매캐해진다. 이대로라면 스칼은 도보로 한나절이나 걸리는 거리도 순식간에 주파해버릴 것이다. 내가 모자 끈을 고쳐 매는 시간 동안이면 거뜬히 목적지에 도착할 게 틀림없다. “끄이끄악!” 스칼이 악을 쓴다. “어이, 너무 그러지 말라고! 어젯밤만 해도 넌 친구가 필요하다고 툴툴거렸잖아?” * 해가 지평선 너머로 꺼져 들기 시작할 즈음 우리는 엘마크 무리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나는 스칼의 속력을 늦추고 인간들이 꾸려놓은 야영지로 접근한다. 그들은 이제 아예 모닥불을 피우고 스튜까지 끓이고 있다. 아주 살 판이 났다. “거기 누구요! 손 드쇼.” 붉은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나를 보고는 경고한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손에서 고삐를 놓는다. 하지만 그 남자 말대로 손을 들지는 않고, 대신 안장 고리에서 긴 도끼를 끄집어낸다. “거 참 어르신, 사람 말을 이해를 못 하시는구먼.” 붉은 모자 인간이 말한다. 그의 뒤에 있던 동료들은 묵묵히 무기를 꺼내 든다. 검, 올가미, 연발 석궁 등등. 그러자 스칼이 벌써 도망칠 준비를 하며 안달복달한다. “끄이끄아아아악!”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나는 스칼을 달래주고서 인간들 쪽을 돌아본다. “나는 너희 도시 놈들의 번지르르한 무기 따위엔 관심 없다. 딱 한 번만 경고하겠다. 내 땅에서 꺼져라. 그러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한 젊은 인간이 맞받아친다.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똑똑히 알려줘야겠군. 이 드라칼롭스 친구는 스칼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클레드. 제2군단 전방 포병대 및 기병대의 대 제독 클레드 경이다.” 몇몇 인간이 실실 웃는다. 곧 웃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내가 말을 다 끝마치고 나면. 그런데 내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붉은 모자 남자가 히죽거리며 묻는다. “그래서 왜 여기가 댁 땅이라는 거요?” “내 땅이니까. 여긴 내가 야만인들한테서 직접 빼앗은 땅이라고.” “아니, 이곳은 바쿨 경의 영지요. 최고 사령부에서 직접 하사 받으신, 그분의 정당한 사유지란 말이오.” 나는 땅에 침을 탁 뱉는다. “하, 최고 사령부라!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 말을 할 것이지! 하지만 진정한 녹서스인은 법이 아니라 힘을 존중하는 법이다. 여길 가지고 싶으면 가지라고 해. 단, 나한테서 빼앗아야만 할 거야!” “어르신, 그냥 그 조랑말 데리고 얼른 여기서 나가시오. 좋은 말로 할 때.” 그렇다. 인간들이 우리를 보는 눈은 우리가 그들을 보는 눈과는 다르다. 그 사실을 깜빡 잊었다. 하지만 남자의 그 말에 이미 인내심의 끈이 끊어진 나는 냅다 고삐를 당기며 외친다. “돌격!” 스칼이 땅을 박차고 놈들에게 뛰어든다. 아, 그러고 보니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뭐라고 한 마디 멋있게 쏘아붙여주려고 했는데. 몸이 먼저 무턱대고 움직이고 말았다. 인간들이 석궁을 쏜다. 그러자 스칼이 넓은 귓바퀴 한 쌍을 펼치고, 거대한 청동 부채와 같은 그 탄탄한 귀로 석궁 화살들들을 모조리 튕겨버린다. 스칼은 유쾌하게 환성을 지른다. 나는 스칼을 몰고서 붉은 모자를 쓴 우두머리를 향해 돌진한다. 그 동안 인간들의 칼이 날아들어 스칼의 단단한 가죽에 쨍강 부딪히고, 그와 동시에 나는 도끼를 휘둘러서 그 중 두 명을 쓰러뜨린다. 그런데 붉은 모자를 쓴 그 자식은 몸놀림이 빠르다. 내가 스칼을 타고 달려가면서 휘두르는 도끼날 아래로 그놈은 몸을 쑥 숙여서 피해버린다. 곧이어 화살이 또 한 차례 쏟아진다. 스칼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이놈은 불사의 존재라서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데도 이렇게 쉽게 겁을 집어먹는다. 마법의 힘이 깃든 동물들은 이래서 문제다. 도무지 사리분별이 안 통하는 것이다. 나는 고삐를 당겨서 스칼을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고 인간들 쪽으로 돌아간다. 저 인간들 중에서 딱 한 명만 빼면 나머지는 죄다 쭉정이다. 붉은 모자를 쓴 저놈만 쓰러뜨리면 된다. 나는 그의 가슴을 노리고 이번에야말로 정통으로 도끼를 날린다. 하지만 그가 입은 묵직한 가슴받이 갑옷이 도끼날을 막아내서 둔중한 소리만 울린다. 뭐, 그래도 이 정도 공격이면 오금깨나 저렸을 것이다. 그때 인간들이 노포를 발사한다. 거의 마차 한 대만큼이나 길다란 화살이 날아와 스칼에게 명중한다. 그 충격에 나는 도끼를 떨어트리고, 스칼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그러자 녀석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으면서도 질겁을 하면서 나를 떨어트리고는 언덕 너머로 줄행랑을 친다. “이 배은망덕한 녀석아! 너 때문에 엉덩이가 부서질 뻔했잖아, 이 똥멍청이 자식아!” 나는 더 많은 욕을 퍼붓고 싶지만 입속에서 말이 뒤죽박죽 엉킨다. 그래서 씩씩대며 일어나 얼굴에 묻은 풀과 먼지를 털어내고는, 겁쟁이 도마뱀 녀석이 꽁무니를 뺀 방향으로 모자를 내던진다. 그리고 붉은 모자를 쓴 남자를 마저 해치우기 위해 뒤돌아 선다. 그런데 그 남자의 등 뒤에 아까보다 훨씬 많은 인간들이 몰려 있다. 백 명도 넘을 듯한 철의 전사들, 피의 도살자들이 노포를 탑재한 전차까지 갖추고서 대기하고 있다. 붉은 모자 인간 패거리가 어느 틈에 지원군을 불러온 모양이다. “이런 엉큼하고 얍삽한 능구렁이 같으니!” “그쪽은 능구렁이조차도 못 되는 것 같은데. 최근 바쿨 나리의 목장 주인들 골치를 썩힌 게 바로 댁의 소행이었던 모양이지? 그럴 주제도 못 되어 보이는데 말이야.” “바쿨은 진정한 녹서스인이 아니다. 네 주인은 내 도마뱀 엉덩이에 뽀뽀나 하라고 해!” “댁은 바쿨 나리의 격투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게 좋겠군. 그러면 입 조심 하는 법을 배우게 될 테니.” “오냐, 그럼 나는 네 주둥이를 찢어다가 내 발 닦개로 쓰겠다!” 그 말이 유독 붉은 모자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인지, 그의 친구 백여 명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내게 돌진해온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게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저놈들이 나를 죽이려 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줘야 하니까. 붉은 모자는 역시 빠르다. 내가 땅에서 도끼를 채 집어 들기도 전에 놈이 먼저 나를 덮쳐온다. 그가 내 위로 높이 치켜든 칼날이 보인다. 저걸 맞으면 나는 꼼짝없이 즉사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산탄총 한 자루를 품에 숨겨두고 있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자, 그대로 직격 당한 붉은 모자는 뒤로 날아가버린다. 나 역시 총의 반동 때문에 나자빠져서 땅을 데굴데굴 구른다. 덕분에 시간을 좀 벌었다. 잠깐일 뿐이지만. 피의 도살자들이 금세 거리를 좁혀온다. 휘어진 모양의 칼을 저마다 손에 한 자루씩 들고서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이 꽤나 살기등등하다. 이대로라면 참혹하게 죽게 생겼다. 뭐, 이런 식으로 싸우다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제일선에 선 피의 도살자들이 공격을 개시한 순간, 나도 반격에 나선다. 아무리 사악한 마법을 쓰는 적들이라도 내 도끼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진다. 하지만 놈들의 공격도 가차없다. 이런 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얼마 못 가 나는 피와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하고 지쳐버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철의 전사들까지 함성을 지르며 가세한다. 두꺼운 검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은 두 갈래로 찢어져서 양쪽에서 나를 공격해 들어오고 있다. 뻔한 진형, 뻔한 작전이다. 그들은 두 장의 철판처럼 나를 짓눌러서 녹서스 동전처럼 납작하게 만들어버릴 작정일 것이다. 젠장. 이젠 끝장이다. 여기서 살아남을 가망 따위는 없다... 그런데 절망에 사로잡힌 그 순간, 너무나 반가운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고 고결한, 나 따위에게는 과분할 만큼 멋진 친구. 스칼. 스칼이 나를 향해 질주해 온다. 지금껏 그 어떤 전투에서 도망쳤을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녀석의 뒤로 흙먼지가 풀풀 피어 오르는 게 보인다. 저 망할 도마뱀 녀석. 심지어 내가 아까 떨어트린 모자까지 주워 가지고 오고 있다. 검은 갑옷의 전사들이 나를 덮치려는 순간, 나는 스칼에게 뛰어들어 안장에 올라탄다. 그런 다음 철의 전사들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숨을 고른다. 일단 노포부터 없애는 게 우선이다. 그런 다음 인간들을 해치워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우리 둘이서 군단 하나를 통째로 상대하기는 오랜만이네.” “끄이끄악.” 스칼이 명랑하게 포효한다. 나는 크록사고르보다 더욱 크게 웃음 지으며 대답한다. “나도 그래, 친구.” 정말이다. 내가 이 도마뱀보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
4. 구 설정
4.1. 구 장문 배경
클레드는 녹서스에서 유명한 민중 영웅이다. 용감무쌍하고도 성깔 고약한 전사인 클레드는 녹서스 민중들 특유의 객기와 다혈질을 상징하는 존재와도 같다.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휩쓸지만, 장성들 사이에서는 불신의 대상이고, 귀족들에게는 혐오를 한몸에 사고 있다. ‘위대한 경기병’, ‘최고 원수 대장군’, ‘산의 제독’ 등등 클레드를 칭송하는 허풍스러운 무용담도 많다. 그 전설들에 따르면 클레드는 녹서스 제국이 처음 세워진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군사 작전에서 활약해왔으며, 단 한 번도 후퇴한 적이 없고,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칭호란 칭호는 모조리 ‘따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병사들의 이야기가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지는 미지수다. 확실한 것은 클레드가 스칼이라는 이름의 애마를 갖고 있다는 것과, 썩 미덥지 못한 그 애마를 타고서 저돌적으로 전투에 뛰어든다는 사실이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클레드의 무용담은 녹서스 제국의 건국 초 일어났던 드루그네 전투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험악한 산악 지대에서 벌어졌던 그 전투에서 녹서스의 제1군단은 야만인 무리에 뒤쫓겨 퇴각했다. 직전의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아군은 적에게 무참히 궤멸당했고, 급기야 보급 열차마저 포기하고 도망치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기지까지 가려면 일주일을 행군해야 하는 거리였다. 군단을 통솔하는 지휘관들은 미끈한 황금 갑옷을 차려 입은 부유한 귀족들이었다. 귀족들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일보다는 외모 치장이나 정치 공작에 관심이 많았다. 암살이나 마상 시합을 잘했지, 전장에서 그들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퇴각 중에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결국 귀족들은 자기들 목숨을 보전하려고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그때, 떠오르는 태양 아래 언덕 꼭대기에서 불가사의한 인물과 동물이 한 쌍 출현했다. 클레드라는 요들, 그리고 그가 타고 다니는 불사의 사막 드라칼롭스였다. 스칼이라는 이름의 그 드라칼롭스는 두 다리로 서서 머리 양편에 귀처럼 붙어 있는 앞발 한 쌍을 펼치고 있었다. 고개를 수그리고 있으니 마치 식탁에 낼 수프에 실수로 손을 담근 집사가 정중하게 사죄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칼의 안장 위에 올라서 있는 이가 클레드였다. 녹슨 무기, 낡은 갑옷에 옷까지 누덕누덕한 그였지만, 시력이 온전한 한쪽 눈동자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여움만은 생생했다. “딱 한 번 말하겠다! 지금 당장 내 땅에서 꺼져라!” 클레드는 야만인들에게 명령하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난 고함을 내지르며 무작정 돌격했다.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래 굶주린데다 귀족들에 대한 울분으로 부글부글 끓던 녹서스 병사들의 절박한 상황에서, 클레드의 무모한 객기는 불 난 데 기름을 부은 것처럼 다가왔다. 분노가 폭발한 병사들은 클레드와 스칼의 뒤를 뒤따라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그리하여 녹서스 군단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그들의 기습은 초반에는 먹혔으나, 이내 도착한 야만인 쪽 지원 병력이 측면을 치고 들어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닥쳐오는 적군의 역공에 전세는 곧바로 불리해졌고, 패닉에 빠진 스칼은 클레드를 자기 등에서 내쳐버린 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스칼과 마찬가지로 녹서스 병사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클레드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도끼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고 이빨까지 동원해가며 한결같이 맹렬하게 적들과 싸워나갔다. 클레드가 적들을 빠른 속도로 넘어뜨리면서 그의 주위에는 시체가 쌓여갔지만, 적들 역시 지체하지 않고 물밀듯이 몰려왔다. 여기에도 클레드는 아랑곳 않고 더욱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고 우렁찬 고함을 질러대며 맞섰다. 후퇴하느니 기꺼이 죽음을 택하겠다는 기세였다. 용기는 전염병처럼 주변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법. 클레드의 굳건한 의지에 감화된 병사들은 그의 곁에서 꿋꿋이 버텼다. 겁쟁이 도마뱀 스칼까지도 도망치다 말고 멈춰서 최후의 저항을 하는 아군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아군의 수가 적군을 압도하면서 전선이 무너지자, 지켜보다 못한 스칼이 용맹하게 전장으로 뛰어들어 야만인들의 후방을 급습했다. 스칼은 으르렁거리고 발톱을 휘두르며 적들을 헤치고 들어가 주인의 곁에 이르렀다. 다시 동료의 등에 올라타 활력을 되찾은 클레드는 한층 더 맹렬한 기세로 반격에 들어갔다. 죽음의 회오리바람이 휩쓰는 듯이 그는 파죽지세로 적들을 쓰러뜨렸고, 결국 공포에 질린 야만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아군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소수의 병사들만 살아남았지만, 그래도 끝끝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드루그네 부족 야만인들은 토벌되었고, 그들의 땅은 녹서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귀족들의 시체와 황금 갑옷은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녹서스의 다른 군단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전한다. 클레드가 보여주는 미친 용기 앞에서 패색이 완연했던 전투도 기어코 승리로 기울었다는 것이다. 클레드는 녹서스군이 다니는 곳마다 나타나 이런 식으로 공적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자기 몫의 토지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녹서스인은 이런 무용담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녹서스군이 전투를 벌였던 곳에는 어김없이 ‘클레드의 봉토’라고 적힌 팻말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