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360 ~ B.C. 327)
마케도니아 왕국의 역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종군해 다양한 기록을 했고, 철학적 수준은 어떤지 몰라도 수사법에 있어서 뛰어났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를 재래한 아킬레우스로 묘사했으며, 술김에 클레이토스를 창으로 찔러 죽인 일로 알렉산드로스가 슬픔에 잠겨있자, 여러가지 우화로 위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기원전 327년에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궁중 의례를 도입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해서 사이가 멀어졌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식 인사 예법에 동의한 사람들에게 금잔을 돌렸고 칼리스테네스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 예법대로 경배하지 않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다가갔는데,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이라 경배하지 않은 것을 몰랐지만 피토낙스가 경배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입맞춤을 거절했다.
칼리스테네스는 입맞춤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생겼다고 말한 뒤 연회자리에서 나와야 했으며, 얼마 후 왕실 시동들이 연루된 암살음모가 드러나면서 혐의를 받았다. 이로 인해 처형되었다는 설과 투옥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쨌든 확실히 죽은 모양이다.[1] [2]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회 하에 재판을 거친 다음 처우를 결정하려 한 모양이지만, 투옥된 후 몇 개월 뒤에 비만과 벌레가 옮긴 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바로 처형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혈육이기도 하지만, 그가 암살음모에 개입되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진 고문에도 암살 음모자들은 칼리스테네스의 연루를 끝까지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안티파트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칼리스테네스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융화정책은 보수적인 부하들의 반발을 초래했는데, 대표적인 두 사례가 클레이토스와 칼리스테네스이다.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융화정책으로 인해 마케도니아 장군인 자신조차 왕을 만나기 쉽지 않다며 비난하였다가[3] 술에 취한 알렉산드로스에게 창을 맞아 죽었는데, 클레이토스 사망 이후 칼리스테네스는 그리스 문화를 고수하는 이들의 중심인물이 된 모양이다. 당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그리스 문화권은 군주에게 무릎을 꿇는 동방의 궁중의례를 경멸[4]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풍습은 노예들에게나 어울리지 자유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연회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요구한 페르시아의 궁중 의례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는데, 따라서 전형적인 그리스인이었던 칼리스테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1] 유스티누스(역사가)의 기록에서는 참혹한 고문을 보다 못한 리시마코스가 몰래 건넨 독약으로 자결했다고 한다.[2] 칼리스테네스는 평소 퉁명스럽고 엄격한 태도로 인해 친구가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리시마코스와 만큼은 철학적 사상을 교류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참고로 리시마코스 역시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3] 물론 이것만은 아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당시 연회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농담을 주고받은 모양인데, 그 내용들에 열받은 클레이토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대는 말들을 내뱉으며 화를 돋웠던 것으로 보인다.[4] 그리스인들은 심지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