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 ~ ?)
1. 개요
전국시대와 에도 시대 초기의 인물로 무사시노쿠니 오시성(忍城)[1]의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의 장녀로 관동 제일의 미녀로 불렸으며, 무예와 병법에도 뛰어났다.친모는 카나야마성(金山城)[2]의 성주 유라 나리시게(由良成繁)의 딸 유라고젠(由良御前)[3]이라고 한다. 당시 나리타 가문은 무사시 북부에서 우에스기씨[4]-호죠씨를 차례로 섬기고 있었고, 유라 가문은 코가 쿠보(古河公方)[5]를 섬기고 있었는데, 우지나가와 유라고젠의 결혼은 나리타 가문을 코가 쿠보쪽으로 포섭하기 위한 정략결혼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나리타 우지나가는 사가미를 본진삼아 칸토 전역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호죠 가문에 붙기로 마음을 먹었고, 나리타씨와 유라씨 두 가문의 공생관계도 결국 와해되었다. 이에 카이히메가 두살이 되던 무렵 생모였던 유라고젠은 우지나가와 이혼하고 친정집인 유라 가문으로 돌아가버렸으며, 우지나가도 돌싱이 되자마자 이와츠키(岩付)[6] 성주 오오타 스케마사(太田資正)의 딸과 재혼해 카이히메도 어린시절부터 계모 아래에서 자랐다고 한다. 다만 우지나가는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만 둘 낳았을 뿐 적장자를 얻을 수 없었다. 이때 한창 성장중이던 카이히메가 무예와 병법에도 재능이 보였기에 이왕 이렇게 된 겸 장녀인 카이히메를 마치 장남인 것 처럼 교육시키기 시작했고, 장성한 뒤에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더러 미모도 뛰어났기에 동국무쌍의 미인(東国無双の美人)이라는 별명도 얻었다고 한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칸토를 침공해오자, 나리타 우지나가는 동맹국 호조 가문을 지키기 위해 오시성의 군을 쪼개 500명 정도의 군을 이끌고 오다와라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19세였던 카이히메는 나리타 가문의 본성인 오시성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성에 남은 500~800명의 군졸을 기반으로 주변의 백성들로부터 농병을 모아 3천 가량의 방어군을 만들어 농성에 들어갔다.[7] 이때 히데요시는 2만 3천의 연합군[8]을 구성해 오시성을 침공했는데, 도요토미 쪽 총사령관은 이시다 미츠나리가 맡았다. (오시성의 전투, 1590)
히데요시의 수공 지시[9]를 받은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투보다는 내정에 특화된) 자신의 재능을 살려 아라카와(荒川)로부터 물을 빌려오는 거대한 제방[10]을 건설했는데, 나리타 가문 측에서도 이에 맞서 헤엄을 잘치는 용사 10명을 선발해 제방에 구멍을 뚫어(...) 역으로 도요토미 연합군에게 수공을 가해 도요토미 진영을 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수공이 실패하자 이시다 부교는 2만에 달하는 연합군의 수적 우위를 살려 어택땅으로 오시성에 병력을 갈아넣기 시작했는데, 이때 카이히메가 완전무장[11]을 마친 뒤 200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앞장서자 이에 고무된 방어군측이 우주방어에 나서면서 도요토미측의 소모전 전략도 실패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번에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사나다 가문이 앞장서서 공성에 들어갔는데, 사나다 가문측 무장이었던 미야케 타카시게(三宅高繁)가 와다 요시모리의 고사[12]를 들어 카이히메를 도발하자, 카이히메가 타카시게를 활로 쏴죽여 버리는 등 분전하며 오시성을 사수했다. 하지만 1590년 7월, 정작 중요한 호조 가문의 거성 오다와라성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방어전을 끝내고 연합군에게 성을 내어주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가모 우지사토에게 맡겨지면서 아와시로 후쿠이 성에서 살다가 하마다 쇼겐, 하마다 쥬자에몬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변이 일어난 것을 아는 사람들과 이들의 병사들을 장악하였으며, 우지나가가 돌아오자 진압하였다. 이러한 무용담을 들은 히데요시가 측실로 삼았다고 한다.
히데요시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딸인 나아히메를 길렀다. 도요토미 가문이 패망한 이후에는 센히메의 도움으로 나아히메와 함께 목숨을 구했다. 이후 그 시대 히메들이 그랬듯이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2. 카이히메에 관한 참고자료 목록
카이히메에 관해서는 당시의 많은 역사적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후세에 편찬된 서적뿐이어서 실재성에 대한 의문도 있다.# 카이히메에 대한 사료 및 문학작품 등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나리타키(成田記)>>: 카이히메에 관한 전승은 상당부분이 이 <<나리타키>>에 의존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나리타 가문에 관한 기록은 에도 시대에 이미 보력의 화재(宝暦の火災, 1760)를 거치며 옛 기록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아 사실불명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리타 가문의 후예 및 가신의 후손이라는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와 나리타 가문의 연고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당시 카미노(上之)[13]의 영주(名主)였던 코누마 쥬고로(小沼十五郎)가 전기, 사서, 고문서 및 전설 등을 빠짐없이 조사하고 연구(고증)를 거쳐 분카 7년(1810년)에 그 결과물을 출판했다고 한다. 다만 전설(...) 등을 모조리 집어넣었기도 하거나와 내용이 제대로된 사료집이라기 보다는 전쟁 영웅들의 군기물(軍記物語) 혹은 이야기꾼이 돈을 벌기 위해 작성한 코단물(講談物)에 가까워 어디까지 사실로써 믿어야 할지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고. 원서는 쿠마가야시 류엔지(龍淵寺)에서 소장중이라고 한다. 쿠마가야시 디지털 박물관/나리타키(일본어 주의)
<<나리타 계보도(成田系図)>>: 나리타 가문의 족보. 일본 위키피디아 측의 기록을 참조해보면, 오시성 전투의 전후사정 및 전투당시 나리타 가문의 참전자 명단 및 담당구역별 배치현황 등의 내용도 담겨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자기로 원본은 쿠마가야시 류엔지(龍淵寺)에서 소장중이라고 한다.
<<진서 태합기(真書太閤記)>>: 에도시대에 작성된 군기물(軍記物). 에도시대 중후반에 이르면 히데요시를 주인공으로 하는 닝교조루리(인형극)와 카부키가 인기를 얻었는데, 그 모두를 아우르는 태합물(太閤物) 장르의 원전이라고 한다. 신빙성이 있는 사료라기 보다는 문학작품으로 보는게 맞다.
<<관동8주고전록(関八州古戦録)>>: 에도시대에 작성된 군기물(軍記物). 후대에 작성되었을 뿐더러 군기물의 특성상 사료라기 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3. 대중문화에서
3.1. 전국무쌍 시리즈
카이히메(전국무쌍)3.2. 노부나가의 야망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
카이히메 대신에 나리타 카이라는 통성명으로 대신하고 있다.
3.3. 노보우의 성
히데요시의 후호조가 토벌 당시 오시성 공략에 관한 내용인 영화/소설 노보우의 성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사무라이를 추격하여 벤 일도 있을정도로 무예가 출중하며[14], 맨손으로 2~3명의 가신들을 내동댕이 치는 괴력녀이다. 성이 항복한후[15][16] 항복의 징표로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다.
[1] 지금의 사이타마현 교다시시의 거성[2] 지금의 군마현 오타시에 위치한 닛타-카나야마성(新田金山城)[3] 요코세 나리시게(横瀬成繁)가 하극상으로 카나야마성을 장악한 뒤, 닛타군(新田郡) 소속 유라고(由良鄕)를 손에 넣었는데, 이를 계기로 자신의 성을 아예 유라씨로 성씨를 바꿨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딸을 유라고젠으로 불렸다고.[4] 오우기 우에스기(扇谷上杉氏) 가문으로, 켄신의 가문이 아니다.[5] 시모츠케를 다스리던 코가-아시카가(足利) 가문.[6] 지금의 사이타마시 북동부 이와츠키구(岩槻区)의 거성[7] 다만 이 부분은 <<나리타키>>의 내용으로, 사료들(?)에 의하면 카이히메가 아니라 우지나가의 사촌동생 나리타 나가치카(成田成親)가 성주의 빈자리를 지켰다고 전한다.[8] 히데요시측 무장으로 오타니 요시츠구, 나츠카 마사이에 등이 참전했으며, 사나다 가문에서 마사유키와 유키무라, 우에스기 가문의 나오에 카네츠구, 그 밖에도 사타케 요시노부,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国綱) 등 동국의 다이묘들도 대거 히데요시측 동맹군으로 참전했다.[9] 칸토의 다이묘들에게 히데요시가 가진 동원력을 과시하기 위한 지시였다고 한다.[10] 이시다제방(石田堤)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 길이가 14km~28km에 달했다고 한다.[11] 에보시 모양의 투구(烏帽子型の兜)를 꽉 조이고, 벚꽃이 흩날리는 문양이 화려한 갑옷(小桜おどしの華やかな鎧) 위에 새빨간 진바오리(真っ赤な陣羽織)까지 걸친 뒤, 나리타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나미키리의 명검(浪切の名刀)을 쥐고 돌격했다고 한다. 맛깔나는 묘사의 예시로 7분 27초 부근(일본어 주의) 사료라기 보다는 코단물(講談物)의 성향이 짙은 <<나리타키>>, 혹은 아예 카부키를 염두에 둔 <<진서 태합기>>가 원전일 것으로 추정된다.[12] 겐페이 전쟁시절 요리토모군의 무력담당이었던 와다 요시모리가, 요시나카군의 여장부였던 토모에 고젠과 싸워 이긴 뒤,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 타카시게도 카이히메에게 "너를 힘으로 제압한 뒤 내 와이프로 삼아야겠으니, 도망치지 말라"며 도발하자, 카이히메가 코웃음을 친 뒤 화살을 쏴 타카시게의 목을 꿰뚫어버렸다고 한다.[13] 현재의 사이타마현 쿠마가야시 일대[14] 창을 주무기로 쓰는듯 하다.여성용 창술인 나기나타의 원조 쯤 되는듯..[15] 성주는 관백측에 전쟁이 시작되면 항복하겠다고 밀약을 맺은 상태였으나, 임시성주인 나리타 나가치카가 제멋데로 진짜 전쟁을 해버린다. 석전삼성의 2만 대군에게 불과 500명의 군사로 선전하고, 수공까지 버티지만 본성이 함락되자 명령에 의해 항복한다.[16] 나가치카의 변호를 겸해서 줄거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다면, 원래 나가치카는 전투를 달갑지 않아하는 인물이라, 성에 남은 호전적인 무장들을 달래고 어르면서 자기 사촌 형인 성주의 항복 지시를 따르고자 했다. 문제는 이 영화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가 상당히 군공과 명예에 집착하는 인물이라 다른 지성들이 싸움없이 항복하자 자신이 활약할 기회가 없어진다고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휘하 수하 중 나츠가 마사이에라고, 미츠나리의 다른 수하들의 평에 의하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여 사절로는 적합하지 않은 자를 일부러 보냈는데, 이들의 우려대로 마사이에는 상대가 어차피 항복할테니 오시 성에게 온갖 모욕을 주며 무례를 범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양아치가 뭘 요구하듯이 “카이히메라는 여자를 관백께 내놔.”라고 말한다. 안 그래도 마사이에의 무례에 화가 쌓이던 나가치카는 이 마지막 말에 결국 뚜껑이 열리고 전쟁을 선언한 것. 이 소식을 들은 미츠나리는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기뻐하고, 미츠나리의 동료와 부하들은 이럴려고 마사이에를 보냈냐고 기가 막혀한다. 결국 그냥 항복만 받으면 될 일이 전투로 이어진 것은 나가치카와 미츠나리의 공동 책임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