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파롤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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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22대, 24대 | 32대 |
유벤투스 FC 역대 주장 | ||||
피에트로 라바 (1942~1950) | → | 카를로 파롤라 (1950~1954) | → |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1954~1961) |
이탈리아의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카를로 파롤라 Carlo Parola | |
출생 | 1921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 토리노 | |
사망 | 2000년 3월 22일 (향년 78세) 이탈리아 토리노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4cm | 체중 74kg | |
직업 | 축구선수(센터 하프백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유벤투스 FC (1939~1954) SS 라치오 (1954~1955) |
감독 | AC 안코니타나 (1956~1959) 유벤투스 FC (1959~1961) 유벤투스 FC (1961~1962) AC 프라토 (1962~1963) AS 리보르노 (1965~1966) AS 리보르노 (1967) 노바라 칼초 (1969~1974) 유벤투스 FC (1974~1976) | |
국가대표 | 10경기 (이탈리아 / 1945~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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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어린 시절
파롤라는 7세에 아버지를 잃었고 쿠네오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며 축구를 접했다. 그는 나중에 토리노로 다시 돌아와 유벤투스 FC의 선수로 뛰며 피아트 공장에서 일을 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파롤라는 잠시 사이클 선수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유벤투스 FC에서 거의 모든 선수 생활을 보냈다. 파롤라는 총 334경기에 출전했고 말년엔 SS 라치오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2.2.2. 국가대표
파롤라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10경기에 출전했고 1950년 월드컵에도 한 경기를 뛰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스웨덴에 2:3으로 패했다.2.3. 감독
파롤라는 은퇴 직후 SS 라치오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고 1956년에 AC 안코니타나에서 감독으로 데뷔했다.1957-58 시즌에 안코니타나를 승격시키는 것에 성공한 파롤라는 1959년, 친정팀에 복귀, 2년간의 1기 시절에 두 차례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으로 팀 역사상 최초의 더블에 성공했다.
보드진과의 오해로 잠시 유벤투스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던 파롤라는 곧 복귀했지만 팀내의 각종 악재를 수습하지 못했다. 보니페르티의 은퇴, 시보리와는 사이가 나빠졌고 찰스는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 가까이를 날려먹어 마지코 트리오가 한번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결국 디펜딩 챔피언 유벤투스는 12위로 순위가 미끄러졌고 파롤라는 해임되었다.
이 이후로 한동안 하부 리그 팀들을 돌아다닌 파롤라는 그래도 노바라 칼초를 승격시키는 성과를 냈고 레나토 차카렐리를 발굴했다.
1974년, 파롤라는 자신의 후배이자 제자, 하지만 당시 유벤투스의 회장이었던 보니페르티의 부름을 받고 유벤투스에서 3번째 감독 임기를 시작했다. 복귀 시즌에 다시 스쿠데토를 차지하며 화려한 복귀를 알렸지만 다음 시즌엔 파비오 카펠로와 피에트로 아나스타시, 특히 주세페 푸리노와 로베르토 베테가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해 준우승에 머무르며 조반니 트라파토니에 감독직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후엔 유벤투스에서 스카우트 직책을 맡았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파롤라는 활동량이 많고 빠르며 힘과 좋은 기술을 갖췄던 선수였다. 그는 대인마크 능력과 패싱도 뛰어나서 초창기에는 센터 포워드, 전성기 시절에는 센터 하프백 포지션을 주로 맡았고 현대 축구에 비유하면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했다. 파롤라는 센터 하프백 외에도 다른 수비 포지션 소화가 가능했지만 적극적인 태클을 하지는 않아서 1948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지냈던 명장 비토리오 포초는 파롤라보다 리가몬티를 더 선호했다.[2]파롤라는 운동 능력에서도 두각을 보였는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바로 바이시클 킥이었다. 1940년대에 그는 바이시클 킥을 자주 선보여 미스터 바이시클 킥(Signor Rovesciata)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파롤라의 바이시클 킥. 1950년 2월의 ACF 피오렌티나전의 후반 35분에 나온 장면으로 파롤라를 상징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파니니 그룹의 로고로 쓰이기도 했다. |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 세리에 A 우승 2회: 1949-50, 1951-52(유벤투스 FC)
- 코파 이탈리아 우승 1회: 1941-42(유벤투스 FC)
- 세리에 A 준우승 5회: 1945-46, 1946-47, 1947-48, 1952-53, 1953-54(유벤투스 FC)
5.2. 감독
5.2.1. 클럽
- 세리에 A 우승 3회: 1959-60, 1960-61, 1974-75(유벤투스 FC)
- 코파 이탈리아 우승 1회: 1959-60(유벤투스 FC)
- 세리에 A 준우승 1회: 1975-76(유벤투스 FC)
- 세리에 C 우승 2회: 1962-63(AC 프라토), 1969-70(노바라 칼초)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특히 포초는 1930년대 초반에 체력과 과감한 플레이로는 동시대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루이스 몬티를 중용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파롤라의 다소 소극적인 플레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