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14:09:06

충사도

1. 개요2. 생애
2.1. 초기 벼슬 생활2.2. 서하 전선에서2.3. 요나라로 출전2.4. 금나라와 맞서다
3. 기타4. 가족 관계

1. 개요

种师道, 1051~1126

북송의 항금명장. 자는 이숙(彝叔)으로, 할아버지 충세형과 함께 충가장의 일원이다. 초기 이름은 건중(建中)이었는데, 이후 사극(師極)으로 개명한 뒤 송 휘종에 의해 사도(師道)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충헌(忠憲).

2. 생애

2.1. 초기 벼슬 생활

1051년 출생으로, 그는 유년 시절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장재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조상들의 공훈 덕분에 3반을 봉직하고, 시험을 거쳐 문관으로 바뀌어 희주추관을 지내고 동곡현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후 원주통판으로 승진하여 진봉상평을 제청하나, 그는 의역법을 논하는 것 때문에 채경의 명을 거역하고 장택사, 지덕순군으로 전향했다. 그러자 채경 무리들의 무고로 인해 파면되고 그가 파면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무공대부, 충주자사, 경원도 도검장을 지낸 뒤 지회덕군이 되었다.

이후 서하에서 경계선 확정을 요구했는데, 서하의 사자가 반드시 고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나 이를 거절하였다.

2.2. 서하 전선에서

서하인은 정변을 침범하여 불구성을 쌓았고, 송나라 군대를 이끌고 이평으로 갔다. 송군은 목이 말라 충사도가 공병들에게 우물을 파라고 명령했는데 역시 샘물이 계곡을 가득 메웠다.

이후 용신위 4상도 지휘사, 여주방어사, 위주지주로 거듭 승진했다. 당시 그는 여러 송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석대성을 쌓았는데, 아직 준공되지 않아 적이 이미 달려와 박하천에 쌓았다. 충사도는 강가에 진을 치고 적군과 결전을 하듯 원군이 왔다고 큰소리쳤으나 적들은 이미 양가세가 군대를 이끌고 몰래 적의 후방으로 돌아갔고, 요평중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나 패했다. 송군은 낙타와 수만의 우마를 생포했고, 적의 추장은 홀로 도망쳤고, 송군은 결국 성을 쌓을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또 충사도에게 장저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여 열흘간 반드시 점령하도록 하였다. 송군이 성을 내려오자 적의 수비가 매우 견고하여 며칠 후 장병들은 피곤하기 시작했다. 어떤 부장이 게으름을 피우고 스스로 호상에 앉아 쉬자, 충사도가 그를 처형한 뒤 사람들을 고무시키자, 사람들이 진동하여 북을 치며 성읍에 오르니 성읍 방위가 무너지고 송나라 군대는 이레 만에 장저성을 함락했고, 이를 들은 휘종에 의해 친군마군부도지휘사, 응도군승선사로 승진된다.

이후 유법이 서하군과의 전투에서 패사하자, 이를 겨우 막아내었다.

2.3. 요나라로 출전

이후 동관을 따라 도통제를 맡아 보정군 절도사가 되었다. 송군이 백구에 도착한 후 요나라 사람들은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아갔는데, 송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1] 다행히 충사도가 이끄는 군사들이 각자 큰 몽둥이를 들고 방어에 나서 큰 피해를 막았다. 이후 동관에게 차라리 요와 연합하자고 간하나, 오히려 기각된 뒤 우위장군으로 좌천되고 대신 유연경[2]이 그 후임이 되었는데, 유연경은 노구에서 패전한 뒤 다시 충사도를 떠올리며 그를 헌주자사, 환주지주로 기용했다. 그는 곧 보정군 절도사로 귀임하고, 또 관직을 사임했다.

2.4. 금나라와 맞서다

이후 정강의 변 시기 금나라의 군대가 남하하자, 휘종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고,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부원수 요평중과 함께 개봉으로 진군하였다.[3] 그 뒤 송 흠종은 금에 영토 일부[4]를 할양함으로써 금군이 퇴각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 금군의 재침을 대비해 서하의 국경선을 수비하는 군대를 개봉에 주둔시킬 것을 간하였으나 기각당하고, 울화병이 터져 죽게 되었다. 이후 금나라의 군대가 개봉을 함락시키자 흠종은 그의 충고를 듣지 않은 걸 후회하였고, 충헌(忠憲)의 시호를 받았다.

3. 기타

수호전에서 왕진이 노모와 함께 피신하러 간다고 의탁하러 간 노충경략상공이 이 사람이다.

4. 가족 관계

  • 충세형 : 충사도의 할아버지이다.
  • 충언숭 : 충사도의 손자이다. 남송 초년에 전사하고, 충언숭 사후 충씨 일가는 몰락한다.



[1] 비록 거란족의 요가 쇠퇴하고 있었지만, 연운 16주일대의 한인들은 북송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였고, 그 곳의 통치는 안정적이었다.[2] 남송 중흥4장 중 하나인 유광세의 아버지[3] 그의 전공을 탐낸 요평중이 흠종과 이강으로부터 전권을 이임받아 금군을 공격하나, 패하였다.[4] 하북과 하동의 삼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