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种师道, 1051~1126북송의 항금명장. 자는 이숙(彝叔)으로, 할아버지 충세형과 함께 충가장의 일원이다. 초기 이름은 건중(建中)이었는데, 이후 사극(師極)으로 개명한 뒤 송 휘종에 의해 사도(師道)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충헌(忠憲).
2. 생애
2.1. 초기 벼슬 생활
1051년 출생으로, 그는 유년 시절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장재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조상들의 공훈 덕분에 3반을 봉직하고, 시험을 거쳐 문관으로 바뀌어 희주추관을 지내고 동곡현을 주관하게 되었다.이후 원주통판으로 승진하여 진봉상평을 제청하나, 그는 의역법을 논하는 것 때문에 채경의 명을 거역하고 장택사, 지덕순군으로 전향했다. 그러자 채경 무리들의 무고로 인해 파면되고 그가 파면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무공대부, 충주자사, 경원도 도검장을 지낸 뒤 지회덕군이 되었다.
이후 서하에서 경계선 확정을 요구했는데, 서하의 사자가 반드시 고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나 이를 거절하였다.
2.2. 서하 전선에서
서하인은 정변을 침범하여 불구성을 쌓았고, 송나라 군대를 이끌고 이평으로 갔다. 송군은 목이 말라 충사도가 공병들에게 우물을 파라고 명령했는데 역시 샘물이 계곡을 가득 메웠다.이후 용신위 4상도 지휘사, 여주방어사, 위주지주로 거듭 승진했다. 당시 그는 여러 송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석대성을 쌓았는데, 아직 준공되지 않아 적이 이미 달려와 박하천에 쌓았다. 충사도는 강가에 진을 치고 적군과 결전을 하듯 원군이 왔다고 큰소리쳤으나 적들은 이미 양가세가 군대를 이끌고 몰래 적의 후방으로 돌아갔고, 요평중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나 패했다. 송군은 낙타와 수만의 우마를 생포했고, 적의 추장은 홀로 도망쳤고, 송군은 결국 성을 쌓을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또 충사도에게 장저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여 열흘간 반드시 점령하도록 하였다. 송군이 성을 내려오자 적의 수비가 매우 견고하여 며칠 후 장병들은 피곤하기 시작했다. 어떤 부장이 게으름을 피우고 스스로 호상에 앉아 쉬자, 충사도가 그를 처형한 뒤 사람들을 고무시키자, 사람들이 진동하여 북을 치며 성읍에 오르니 성읍 방위가 무너지고 송나라 군대는 이레 만에 장저성을 함락했고, 이를 들은 휘종에 의해 친군마군부도지휘사, 응도군승선사로 승진된다.
이후 유법이 서하군과의 전투에서 패사하자, 이를 겨우 막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