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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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鄒忌
(? ~ BC 344?)

1. 개요2. 생애3. 논란
3.1. 손빈과의 관계3.2. 전기와의 관계3.3. 기록의 문제
4. 평가5. 미디어 믹스

1. 개요

추기(騶忌)라고도 쓴다. 전국시대 제나라(齊) 사람. 키가 8척이나 되는 거구였으며 용모가 수려했다고 한다.

2. 생애

기원전 370년에 제위왕에게 거문고를 뜯으면서 유세했으며, 순우곤에게서는 군주를 섬기는 것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재상(宰相)에 등용되었고 기원전 369년에 하비(下邳, 강소성 邳縣 서남쪽)에 봉해져 성후(成侯)로 불리는데, 제위왕의 재위 기간을 고려하면 유세 시기, 하비에 봉해진 시기는 실제로는 다르고 이보다 늦을 것으로 보인다.

전기와 사이가 나빴고[1] 기원전 354년에 공손한의 말을 듣고 전기가 위나라 정벌을 할 수 있게 진언했으며, 전기가 위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공손한의 계책으로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전기의 부하라면서 자신의 주인인 전기가 자신에게 3전 3승 해서 천하의 위세를 떨치고 있다면서 장차 대사를 결행하기 위해 길흉을 점쳐 보도록 하라고 시켰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추기는 점쟁이를 이용해 밖으로 나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러 온 자를 체포하게 한 뒤에 제위왕 앞에서 자신이 들은 대로 증언했으며, 이로 인해 전기는 제나라에서 도망쳤다. 제선왕 즉위 이후에 돌아온 전기를 기원전 340년에 실각시켰다.

추기는 상당히 키가 큰 미남이었는데, 하루는 제나라 전국구 꽃미남으로 정평이 난 서군평이라는 사람과 자신 중에 누가 더 미남인지 궁금해져 부인, 첩, 문객 등에게 물어보자 셋 다 추기가 더 미남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군평이 찾아온 날 그와 자신의 얼굴을 비교해보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군평이 더 잘생겼다는 걸 느끼고, 왜 세 명이나 자기 얼굴을 더 쳐줬는지 고민해보다 부인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 첩은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 문객은 자신에게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다. 추기는 제위왕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정도만 돼도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얘기를 듣기가 힘든데, 하물며 대왕의 경우 조정에서 가까운 사람들은 대왕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신하들은 대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대왕으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하는 기대를 품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라면서 이로 인해 대왕의 시야가 가려져 있다고 간언했다.

그러자 제위왕이 잘못을 면전에서 지적하는 사람을 상급의 상, 글로 지적하는 사람을 중급의 상, 시정에서 왕을 비방해 그 소문이 들어오게 하는 자를 하급의 상을 받을 것이라 했는데, 처음에는 간언하는 신하들이 많다가 몇 달 뒤에는 가끔 간언하는 자만 있게 되고 1년 후에는 간하고 싶어도 간할 것이 없게 되자 연, 조, 한, 위 등의 나라들이 이 소문을 듣고 제나라에 조배했다.

추기의 추천으로 벼슬한 자가 매우 많아서 제선왕이 불쾌하게 여겼지만 공족 안수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벼슬을 시킨 자가 많지 않아 제선왕이 그를 좋아했는데, 그러자 추기는 안수가 추천해 벼슬한 자가 과연 얼마나 되냐고 되물어 제선왕이 안수가 인재의 출사를 가로막는다고 의심한다.

제위왕에게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며 정치를 혁신할 것을 충고했다. 또 만민(萬民)을 가깝게 여기고 법률을 정비하여 간신배를 멀리하라고 건의했다. 아울러 군기(軍紀)를 바로세우고 정치적 원칙을 고수할 것도 강조했다.

이 때부터 제나라는 차츰 동방(東方)의 강국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3. 논란

3.1. 손빈과의 관계

행적을 보면 명재상이 아닐 수 없는데, 다만 추기 이 사람은 바로 손빈과 전기를 축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이라는 것이 항상 긍정적인 면모만을 가지고 있진 않으며 복잡한 양면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즉 추기는 재상으로서 유능한 면도 있었지만 그만큼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에 항상 조치를 취해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못할 것도 아니다. 실제로 진나라의 유능한 재상 범수도 백기를 실각시키고 자결케 하는 데 일조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밖에도 추기와 손빈중 제나라의 군공을 세운 것은 손빈이지만 전략안은 추기가 더 옳았다고 생각하는 평가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의견을 내는 사람들은 손빈과 전기는 삼진(조나라, 위나라, 한나라)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했으며 이는 제에 이득이 되지 못한 일임을 비난한다. 때문에 이들은 당시 추기가 조나라가 위나라에게 침공당하자 이를 구하지 말것을 주장한 것이 맞으며 전기와 손빈이 주장한 조나라 구원은 제나라에게 이득이 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다른 의견으로 추기와 손빈과의 관계는 추기 개인의 논란이라기 보다. 제나라가 당시 크게 국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내정의 추기 / 군문의 전기 + 손빈이 있었는데 추기의 말만을 믿고 일방적으로 전기와 손빈을 내친 것은 제나라 군주의 실책으로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밖에 추기로 인해 제나라가 강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제나라가 유력한 제후국으로 떠오른 것은 내정외에도 제나라가 조나라 구원한 것과 마릉 전투에서 대장군 방연을 살해하고 위나라 태자를 사로잡는등 당시 크게 성장하던 위나라를 여러 차례의 대전을 겪어 꺾어버렸기 때문임을 들어 제나라의 위상이 상승한 것에 무작정 추기에게만 공로를 돌리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제나라가 손빈 전기로 하여금 위나라를 친 것이 잘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하는데 당시 위나라는 서쪽의 진나라를 틀어막는 존재였으며 이러한 위나라를 제나라가 공격하여 쇠퇴시킨 것은 결국 진나라에게 이득을 만들어 준 것임을 언급되기도 한다.

실제로 전국시대에는 전국시대 국가끼리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전쟁이 계속해서 발전했으며 손빈과 같은 뛰어난 병법가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으며 전국시대는 전쟁이 잦았기에 추기가 전쟁에 유능한 인재를 참언하여 내쫓은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결국 끊임없이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추기가 손빈을 축출했는지 어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추기의 손빈 축출은 추기가 전기와 사이가 나빠서 축출되었는데 추기가 손빈도 싫어했다는 것과, 손빈이 위나라 방연과 싸움에서 이긴 이후 손빈의 명성이 높아졌으며, 손빈병법 저술했다는 것 제외하면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에 따른 추론의 결과이다. 정확하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3.2. 전기와의 관계

그 유명한 점쟁이를 이용한 권모술수로 전기를 축출해냈으며 이후 복귀한 전기를 기어이 다시 실각시켰다.

제나라를 위해서 한 행동이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자신의 권세가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쫓아냈는지 논란이 분분하다.

3.3. 기록의 문제

사마천의 사기는 당시 구할 수 있는 최대의 사료를 구해서 저술된 것이지만, 분서갱유와 초한쟁패기를 거친 이후였기 때문에 진나라 이전 시기의 기록에 대한 문제가 존재했다. 한나라 초기 유학이 진짜 경전이 무엇인지 맞춰보는 훈고학이 된 것이 이런 사정 때문이었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 위나라 왕의 무덤을 도굴한 결과 대량의 죽간이 나왔는데, 여기서 밝혀진 내용에 따라서 연대표 수정이 시작 되었다. 이것을 죽서기년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면, 추기와 전기가 공존하던 시기의 제나라 왕은 제위왕인데, 사기는 이 사람의 재위기간을 기원전 378년 ~ 기원전 343년으로, 죽서기년은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0년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20년의 차이가 있으며, 해당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내용도 순서와 시기가 다르다.

그리고 이 죽서기년에 의거해서 사마천의 후손인 사마정이 쓴 책이 사기색은이다. 그런데 이 사기색은에 따르면, 전기가 재실각했을 때는 추기가 죽은지 이미 4년이 지난 이후라고 되어 있다.

죽서기년의 문제가 아니라도, 지금까지 발굴된 손빈병법에 따르면, 방연이 화살맞고 죽었다가 아니라 사로잡혔다고 되어 있는데, 손빈병법이 위서가 아니라는 가정하에서는 당연히 본인이 쓴 손빈병법의 내용이 더 정확할 것이기 때문에 해당 내용도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시기 제나라 기록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4. 평가

내치에 있어선 높은 평가를 내릴수 있으나 전략과 국가의 백년대계의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기록의 부실로 추기와 전기 손빈과의 관계 등의 구체적 내막을 알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위나라의 강성함을 꺾은 것은 제나라인데, 영토적 이익은 서쪽의 진나라가 거의 모두 가져갔다는 점이다.

제가 위를 건드는 바람에 진나라가 강해졌으니 삼진일에 개입한 전기와 손빈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응호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당시 위를 누르지 않고 위나라 주도로 삼진땅이 다시 병합되었으면 제나라는 서쪽의 진나라가 아니라 위나라의 압박해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건 제나라는 위나라를 누르고도 서쪽으로 팽창하지 못했고 진나라만 위나라의 병력 공백이 생긴 틈을 타 급격히 팽창하는데, 하서땅을 병합하더니 결국엔 하동땅까지 야금야금 갉아먹어 50여 년이 지나자 다른 모든 국가를 압도할 강국으로 성장한다.

반면 이후 제나라는 영토적 팽창을 거의 하지 않고 연합맹주로서 진나라에 맞서 위세를 부려서 제(帝)를 칭하기도 했으나 제나라의 맹주역할은 진나라의 팽창을 막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 기능을 잘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맹상군 시기까지는 연합해 진을 치기도 하는 등 위세를 떨칠수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동쪽의 제나라가 멀리 있는 진을 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결국은 제민왕 시절엔 송나라-연나라 문제에 개입하면서 영토적 욕심을 부렸다고 하여 연합이 와해되고 제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가게 된다.[2]

즉 추기가 재상일 당시 제나라가 선택한 팽창 대신 연합 맹주로서 만족하는 정책이 종국에는 제나라의 한계를 결정해 버렸기 때문에 훌륭한 내치에도 불구하고 백년대계를 세우는 데는 실패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는 없다. 단적으로 손빈이 방연을 사로잡고 제나라가 전국 최강국으로 공인 받은 게 기원전 341년인데, 전기를 축출하고 추기가 전권을 잡았던 제위왕 제선왕 시대를 거친 후 불과 40년이 지난 기원전 298년 진나라가 침공하지 않을 테니 맹상군을 보내달라고 하자 제나라에선 꼼짝없이 맹상군을 진나라로 보내줘야 했을 정도로 국력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5. 미디어 믹스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47.jpg
삼국지 12,13

삼국지 12에서는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나온다.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출연. 능력치는 65/48/87/89로 뭔가 하나가 부족한 수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중신특성에서 화기생재라는게 좀 흠. 문관 관직빨로 좀 받다보면 자연스레 임무장 2장으로 노역시키기 딱이다. 전법은 교란도발이고... 특기는 상업3 이게끝(...) 전국시대 무장중. 가장 찬밥을 면치 못하게 되는 대표적인 케이스.

[1] 당연히 전기가 추천한 손빈과도 사이가 나빴다.[2] 이는 제민왕의 과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연합맹주국으로서 제나라가 가진 한계라고 봐야 한다. 진나라의 침공 당시 위, 한나라는 제나라의 도움을 받아 두 번이나 진의 침공을 막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제나라가 주도가 돼서 송나라를 친 후 땅을 독식하는 것에는 불만을 품었고 결국 연과 엽합하여 기회가 되자 제나라를 쳐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