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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정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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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기3. 중기
3.1. 대략적인 상황3.2. 서유럽 일대3.3. 중부유럽 일대3.4. 이탈리아3.5. 이베리아 반도3.6. 발칸 반도와 에게해 일대3.7. 스칸디나비아
3.7.1. 덴마크3.7.2. 노르웨이3.7.3. 스웨덴
3.8. 동유럽3.9. 기타
4. 후기

1. 개요

중세 유럽의 정치는 흔히 동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봉건제로 축약할 수 있다고 여겨지나 사실 시대별, 지역별로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우선 서로마 제국이 서서히 붕괴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서로마 제국의 영토들은 무정부 상태에 진입했다. 게다가 7~8세기 거쳐 이슬람 세력이 육상과 해상을 통해 유럽 대륙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이 한동안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북쪽으로도 바이킹, 동쪽으로 아바르, 마자르족, 불가르족 등이 밀려들어와 유럽 전역을 약탈하다가 유럽 중부와 발칸반도 북부에 정착하기도 하는 등 혼란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군주들은 봉건제 도입을 통한 사회의 안정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고, 수도원 등지에 고대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정치학적 문헌 자료들이 남아 있어 이를 바탕으로 베네치아 공화국과 같은 도시국가, 자유도시코뮌과 같은 시민 자치적인 정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중세 중기를 시작으로 의회주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2.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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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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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대략적인 상황

중기인 11세기가 되면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기독교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등 기독교화 되가고 있었고,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가는 바이킹들의 위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로 본거지인 유클란트 반도 및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비롯해 각지의 바이킹 정착지가 현지인들과 동화 및 기독교화되어 갔으며, 유럽 내의 정치 상황 또한 서유럽과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와 이탈리아 반도 한정으로 점차 봉건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이시기는 점차 세속 정치와 교회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던 시기로 이시엔 이미 교황 자체가 세습만 하지 않을 뿐이지 세속 군주화 되가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십자군 전쟁이 발생하던 시기이도 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동방과의 무역이 활성화 되면서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다시 정체되었던 도시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시민 스스로가 왕과 영주, 그리고 교회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립해나가려는 시기이기도 했다.

11세기를 전후로 가톨릭 영향하의 서유럽의 왕정국가들의 왕권은 상당히 취약했고, 반대로 지방 영주들의 권력은 상당히 강해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군주를 선출하면서 성립된 왕조였기에 제후들의 변덕에 언제 다른 왕을 세우는 것이 위협이었고, 이에 로마 황제들이 정제와 부제를 둔 예에 따라 자신의 아들을 공동왕으로 선출하게끔 해 왕위를 교체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시켰다. 그리고 여러 방면에 거쳐 왕권 강화가 시행되었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레온 왕국을 시작으로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에서 의회가 생기기 시작했고, 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 또한 제국자유시들이 생기면서 이들 도시에서 파견된 대표들을 의한 의석들이 생기는 등 변화를 겪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3.2. 서유럽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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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중부유럽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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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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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베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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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발칸 반도와 에게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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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스칸디나비아

3.7.1. 덴마크

아버지 하랄 1세 블로탄을 몰아낸 스벤 트베스케그는 노르웨이가 반란을 일으키자 5년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3년 후 차남인 크누트와 함께 잉글랜드 정복을 개시해 10년 안에 정복하는데 성공하나 1년 안에 사망한다. 유언으로 정복한 잉글랜드의 왕위와 함께 덴마크-노르웨이의 왕위를 모두 차남인 크누트에게 넘기겠다는 유언을 남기나 덴마크 귀족들이이 유언을 무시하고 장남 하랄을 하랄 2세 웅립하지만 그 역시 얼마 안가 죽으면서 크누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영토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즉위 기간 동안 잠시 노르웨이가 올라프 2세에 의해 잠시 독립되었으나 올라프 2세의 왕권 강화와 맞몰린 강압적인 기독교 개종을 견디지 못한 노르웨이인들이 귀족-농민 가릴 것 없이 동시에 반란을 일으켜 올라프를 죽이고 다시 노르웨이의 왕관을 바치나 이미 크누트 또한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기에 올라프보다 더한 강압적인 개종 정책을 답했다.(..)

허나 크누트의 북해 제국은 게르만족의 왕국들처럼 크누트가 죽자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지원을 받은 울라프 2세의 아들인 망누스 1세에 다시 떨어져 나갔고, 결국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왕위는 크누트 대왕과 두번째 왕비(노르망디의 엠마) 사이에서 태어난 하레크누드에게 넘어가나 덴마크 내부를 안정화시키는 것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이라 크누트 대왕과 첫번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해럴드 1세가 섭정 자격으로 통치하나 해럴드 1세는 몇 년 안에 잉글랜드 전체를 장악해 사실상 잉글랜드 국왕이 되자 두 형제간 갈등이 발생한다. 이 갈등은 해럴드가 죽고 하레크누드가 왕위를 되찾으면서 일단락된다. 이와중에서 하레크누드는 망누스와 협약을 맺어 둘 한명이 더 오랫동안 살아 남으면 상대방의 왕위까지 잇기로 했다. 하지만 하레크누드는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은지 2년 만에 후사도 없이 죽으면서 왕위는 협약대로 망누스 1세에게 넘어가게 된다.

망누스는 협약대로 왕위에 오르지만 크누트 대왕의 사촌[1]스베인 아스트리다르손이 덴마크의 왕위를 요구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1046년부터 1047년까지는 자신의 삼촌인 하랄 3세와 함께 노르웨이의 공동 군주 역할을 수행했다. 1046년 말에는 스코네에서 망누스의 압력을 받고 있던 스베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1047년 10월 25일 셸란 섬에서 사망했으며 결국 덴마크 왕위는 스베인 아스트리다르손이 승계받았다.

스벤 2세로 왕위에 오른 스베인은 덴마크를 탈환하려는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의 공격을 받았고 여러 차례 패하면서도 1066년에 협약을 맺었다. 1049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와 조약을 맺고 잉글랜드 국왕 참회왕 에드워드와 함께 하인리히 3세를 도와서 플랑드르의 보두앵 5세를 공격했다. 1069년 가을에 에드거 애설링이 잉글랜드 왕국을 공격하도록 도왔지만 윌리엄 1세로부터 거금을 받고 철수했다.

덴마크 교회에 앵글로인, 데인인들을 데려와서 덴마크 교회의 독립을 지키려 했으며, 여러 교회를 설립했고 함부르크 대주교 사적 편찬을 위해 정보를 제공했다. 20여 명의 자식을 두었고 그의 사후에는 아들 중 5명인 하랄 3세, 크누트 4세, 올루프 1세, 에리크 1세, 닐스로 차례대로 왕으로 즉위했기에 왕들의 아버지라 불렸다. 물론 이들 중 그나마 곱게 죽은 이는 에리크 1세와 닐스뿐 전부 반란이나 모살 등으로 죽었다.

왕위에 오른 닐스는 자신의 누이를 스웨덴 국왕인 할스텐에게 시집 보냈고, 이후 조카들이 젋은 나이에 요절을 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망누스를 스웨덴 국왕으로 웅립하는데 성공한다. 허나 치세 말기에 왕위를 두고 망누스와 에리크 1세의 아들인 슐레스비히(남유틀란트 반도) 공작 크누드 라바르가 서로 다투기 시작하였다. 닐스는 아들인 망누스 1세와 공모해 크누드 라바르를 살해했지만 크누드 라바르의 이복 동생인 에리크가 지지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고 말았다.

망누스는 유틀란트 반도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이자 현직 왕인 닐스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룬드 대주교 아세르 토르킬손의 지지도 받았기 때문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에리크가 연이어 패배한 채 잠시 스코네로 후퇴해야만 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에리크가 덴마크 교회를 다시 독일의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 관할로 귀속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룬드 대주교 아세르 토르킬손도 에리크의 편으로 돌아섰다. 1134년 6월 닐스와 망누스가 에리크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서 스코네의 포테비크 만에 상륙하였으나 오히려 에리크가 독일에서 데려온 중장 기병 덕분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망누스가 전사했고 닐스는 슐레스비히로 달아났으나 얼마 뒤 그곳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이제 에리크는 스코네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덴마크 국왕 에리크 2세로 선출되었고 룬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 때 자신의 또 다른 형인 하랄 케샤가 슐레스비히에서 별도로 의회를 개최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하랄 케샤와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으나 올라브 하랄센만은 놓치고 말았다.

이후 에리크 2세는 정통성 부족 때문에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많은 특권과 작위를 부여했고 룬드 대주교 아세르 토르킬손이 1137년 사망하자 조카인 에스킬을 룬드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지나치게 잔혹하게 정적들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1137년 우르네회베드 의회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제 에리크 1세의 사생아 딸인 라근힐드가 덴마크 귀족 하콘 위데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에리크 3세가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에리크 3세가 왕이 된 이후 덴마크는 에리크 3세의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통치로 인하여 많은 혼란을 겪어야 했다. 먼저 도망쳤던 하랄 케샤의 아들 올라브 하랄센이 스코네에서 왕위를 참칭하다가 살해당했고 다음으로 독일 북부의 이교도 부족인 벤드족에게 해안 지역을 약탈당했으나 이를 막아내지 못하여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 1146년 에리크 3세가 폐위당하고 말았고 이후 닐스의 손자이며 망누스의 아들인 크누드가 유틀란트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셸란 섬과 스코네의 귀족들이 크누드 5세를 인정하지 않은 채 에리크 2세의 사생아인 스벤을 대립왕 스벤 3세로 내세웠기 때문에 덴마크는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크누드와 스벤 간의 왕위 내전은 10년은 더 이어졌고, 그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콘라트 3세, 프리드리히 1세 등이 개입하는 등 독일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심지어 닐스와 망누스에게 모살된 크누드 라바트의 유복자인 발데마르까지 끼어드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내전에 전환점이 발생한 때는 1157년 발생한 '로스킬레 대학살'로 1157년 8월 스벤 3세가 크누드 5세 및 발데마르 1세를 모두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로스킬레에서 연회를 개최, 연회 중 난입한 스벤 3세의 추종세력에게 크누드 5세가 살해당했으나 발데마르 1세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발데마르 1세가 반격에 나서면서 같은 해 10월 그라테 황야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발데마르 1세가 스벤 3세를 살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서 26년간이나 지속된 덴마크의 오랜 내란이 끝나고 발데마르 1세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덴마크의 단독왕이 된 발데마르는 자신의 의형제인 압살론을 로스킬레 주교로 임명하고 그의 조언을 받으며 덴마크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발데마르 1세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프리드리히 1세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분쟁을 벌이며 세운 대립교황 빅토리오 4세를 지지하다가 빅토리오 4세가 죽고 새로운 대립교황 파스칼 3세가 즉위하자 1167년 발데마르 1세는 로스킬레 주교 압살론의 조언에 따라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이후에도 발데마르 1세는 로스킬레 주교 압살론과 함께 덴마크의 해안을 위협하고 있던 벤드족에 대한 토벌에 나서서 벤드족의 요새인 뤼겐 섬을 로스킬레 주교구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벤드족의 수도인 아르코나마저 점령한 후 이교도 사원을 파괴하고 벤드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며 덴마크의 영역을 독일 북부의 포메라이나 지역까지 확장시켰다.

이후 압살론이 룬드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그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고 발데마르 1세가 압살론의 조언에 따라 강압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몇 번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참고로 압살론은 외레순 해협의 남단에 있는 하븐이라는 작은 도시에 1167년부터 성을 세우고 해자를 둘러 요새화하기 시작했는데 이 요새가 발전하면서 훗날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이 된다.

또한 발데마르 1세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공격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늘리고 국경 지역의 요새를 개선하였는데 결국 1181년 동등한 자격으로 프리드리히 1세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한 뒤 이듬해 사망했다. 이렇게 발데마르 1세가 내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벤드족을 물리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덴마크 역사에서 발데마르 1세는 '대왕(den Store)'의 호칭을 얻게 된다.

그의 아들인 크누드 6세 또한 아버지를 본받아 압살론의 조언을 받으며 덴마크를 통치했다.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다시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나서자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 1세의 사주를 받은 포메른 공작 보기슬라프 1세가 덴마크를 공격해 오자 압살론이 이끄는 덴마크 함대를 보내 보기슬라프 1세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보기슬라프 1세의 근거지까지 처들어가 보기슬라프 1세로부터 봉신 서약까지 받아내었다. 이 이외에도 크누드 6세는 1197년 에스토니아의 이교도를 토벌하는 북방 십자군을 이끌기도 했다.

허나 크누드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의 동생인 슐레스비히 공작 발데마르 2세가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발데마르 2세의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슐레스비히 주교인 동명의 발데마르가 후견인이 되었지만 주교 발데마르는 야심만만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홀슈타인 백작 아돌프 3세와 함께 크누트 6세를 폐위시키고 그 자신이 왕이 될 음모를 꾸몄다. 사전에 이를 감지한 발데마르 2세가 1192년 오벤로로 초빙하자 주교 발데마르가 스웨덴령 노르웨이로 도망쳤고 이듬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을 받아 35척의 선단을 이끌고 덴마크를 공격했으나 크누트 6세에게 패배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뒤인 1199년 홀스타인 백작 아돌프 3세도 반란을 일으켰으나 1201년 최종적으로 토벌당했다.

크누드가 죽고 발데마르 2세가 덴마크 왕으로 즉위하자 그는 자신의 왕위를 노렸던 아돌프 3세와 슐레스비히 주교 발데마르를 영지 일부를 양도하거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조건부로 석방해준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만 남겨지자 독일 제후들이 프리드리히 2세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슈바벤 공작 필리프와 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오토 4세가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발데마르 2세는 오토 4세를 지지하는 대가로 홀슈타인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신성 로마 제국 황위 계승에 대한 간섭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어가지 않자 결국 오토 4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해 옛 벤드족의 영토와 엘베 강 및 엘데 강 북쪽의 영토까지 모두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위에 대한 간섭 중 에스토니아의 이교도에 대한 북방 십자군 원정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데마르 2세는 리보니아의 리가 주교인 알브레히트 폰 북스회프덴과 동맹을 맺고 그가 조직한 종교기사단인 검의 형제 기사단 및 벤드족의 지원을 받아 1219년 에스토니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에스토니아를 레발과 도르파트의 2개의 주교구로 나누고 지배하였으나 1222년 리가 주교 알브레히트 및 검의 형제 기사단과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에 정복한 영토를 분할하여 발데마르 2세가 레반 주교구와 북부 에스토니아를 통치하게 되었고 검의 형제 기사단은 남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덴마크는 남쪽으로는 홀슈타인과 동쪽으로는 에스토리아 북부에 이르며 그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발데마르 2세는 1215년에 이미 장남인 동명의 발데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후계 구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1223년 사냥을 나갔다가 슈베린 백작 하인리히의 기습 공격을 받아 동명의 아들 발데마르와 함께 유폐당하고 말았다. 이후 덴마크 귀족들은 발데마르 2세 부자의 석방을 위해 오랫동안 협상을 벌여야 했고 1225년이 되어서야 막대한 배상금과 볼모를 제공하고 그동안 점령한 영토 중 뤼겐 섬과 에스토니아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포기하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시킬 수 있었다. 이후 발데마르 2세가 1227년 반격을 시작했으나 오히려 보른회베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에이데르 강 남쪽의 홀슈타인과 북독일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이로서 덴마크와 독일의 경계선은 엘베 강에서 다시 에이데르 강으로 후퇴하였다.

더구나 동명의 장남인 발데마르마저 요절하면서 그동안 안정되어 가던 덴마크의 왕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남 발데마르의 요절 후 발데마르 2세는 다른 아들인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 4세가 공동 통치자로 내세었다. 그리고 발데마르 2세는 다른 아들들에게도 봉토를 나눠졌는데 아벨이 슐레스비히 공작이 되었고 크리스토페르 1세가 롤란 섬 및 팔스테르 섬의 영주가 되었으며 크누트가 레발 공작이 되었다. 이 때문에 1241년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고 에리크 4세가 덴마크의 단독 통치자가 된 후 이들 형제들 사이의 내분이 발생하게 된다.

형제 간의 내분은 곧 내전으로 확장되어 13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에리크 4세가 아벨, 크리스토페르 1세, 크누트를 모두 포로로 붙잡았고 누이 소피가 중재에 나서면서 겨우 내란이 종식되었지만 1250년 에리크 4세가 아벨의 거주지인 고트르프 성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벨의 시종이 갑자기 에리크 4세를 살해해 버렸다. 비록 아벨이 에리크 4세의 시해와 무관하다고 맹세를 하면서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지만 재위 1년 반만인 1252년에 프리슬란트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던 중 그 역시 살해당하고 말았다.

아벨이 죽은 후 왕위를 이어받은 크리스토페르 1세는 아벨이 에리크 4세의 시해 음모의 배후로 의심받는 것을 이용하여 아벨의 후손이 가진 상속권을 박탈하고자 에리크 4세의 성인 시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에리크 4세가 치세 중에 교회의 면세 특권 폐지를 추진하면서 교회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에 쉽게 승인되지 않았다. 또한 아벨의 아들인 발데마르 아벨센이 슐레스비히 공작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으나 1253년 발데마르가 홀슈타인의 지원을 받아 슐레스비히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서 오히려 슐레스비히가 반독립 상태가 되었다.

그러던 중 크리스토페르 1세도 에리크 4세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기 때문에 룬드 대주교 야코브와 마찰을 빚고, 결국 파문을 당했고, 이후 크리스토페르 1세의 아들인 에리크 5세에 대한 공동 왕위에 대한 대관식 집전도 거부했다. 이에 크리스토페르 1세는 야코브를 체포하여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히고 행진을 시키며 망신을 준 후 감옥에 가둬 버렸다. 비록 야코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다른 덴마크 주교들은 야코브의 성무 금지령을 이행하지 않았지만 크리스토페르 1세도 야코브의 도움 없이는 에리크 4세의 시성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벨의 후손의 상속권을 제한할 수 없었고 결국 1257년 슐레스비히 공작 발데마르가 죽자 그의 동생인 에리크 아벨센이 슐레스비히 공작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1259년 크리스토페르 1세가 만찬 중에 갑자기 독살당하면서 그의 아들인 에리크 5세가 10살의 나이에 덴마크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모후인 마르가레테가 섭정이 되었는데 마르가레테는 크리스토페르 1세의 정적이었던 룬드 대주교 야코브 및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했다. 또한 이러한 혼란을 틈타 뤼겐 지역에서 야로마르 2세가 벤드족을 규합하여 유틀란트 반도를 침공하였지만 마르가레테가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면서 1259년 링스테드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이듬해에는 코펜하겐까지 약탈당해야 했다.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져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가 1261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가 불리했지만 휴전 협상을 빌미로 시간을 번 사이 북독일 지역의 동맹군을 끌어들였고 결국 로헤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마르가레테와 에리크 5세 모자를 포로로 붙잡는데 성공했다. 비록 마르가레테는 왕실 재산의 일부를 넘기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지만 에리크 5세는 계속해서 인질이 되었고 1264년이 되어서야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중재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성년이 된 에리크 5세가 직접 덴마크를 통치하게 되면서 무너진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 억압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272년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발데마르를 슐레스비히 공작으로 승인하지 않은 채 직접 슐레스비히를 통치하였다. 또한 1276년에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아들인 에리크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덴마크 귀족들이 반격에 나서면서 1282년 왕권 제한과 고대 관습의 존중, 그리고 귀족 권한의 보장을 그 내용으로 하는 덴마크 역사상 최초의 칙허장인 '혼드페스트닝(handfæstning)'을 승인해야만 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덴마크 의회의 강요로 에리크의 아들 발데마르를 슐레스비히 공작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이후 에리크 5세는 1286년 스티그 안데르센과 야코브 닐센의 음모로 갑자기 살해당했는데 그들이 에리크 5세를 살해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에리크 5세의 갑작스런 암살 이후 그의 장남인 에리크 6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나이가 어려 그의 모후인 브란덴부르크의 아그네스가 섭정이 되었고 이로인해 북독일 귀족들의 덴마크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섭정 정부는 에리크 5세의 암살범인 스티그 안데르센과 야코브 닐센을 추방했으나 스티그 안데르센은 노르웨이 왕 에리크 2세의 지원을 받으면서 덴마크 일대를 오랫동안 약탈하고 다녔다.

또한 에리크 5세의 살해범 중에 인척이 있었던 룬드 대주교 옌스 그란이 이들을 공개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에 교회와의 갈등도 재점화되었다. 이에 에리크 6세는 동생인 에스토니아 공작 크리스토페르 2세에게 룬드 대주교 옌스 그란을 체포하여 투옥하도록 했고 노르웨이와 강화 조약을 맺은 뒤 스티그 안데르센도 격파했다.

1296년 룬드 대주교 옌스 그란이 탈출하여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에리크 6세를 고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보니파시오 8세가 에리크 6세를 파문하고 옌스 그란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아력을 행사하게 된다.이는 1303년까지 이어졌다.

3.7.2. 노르웨이

상술한대로 덴마크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가 올라프 2세때 잠시나마 덴마크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그의 강압적인 개종 정책에 진절머리가 난 노르웨이인들 반란을 일으켜 올라프 2세를 죽이고 노르웨이의 왕관을 덴마크의 크누트 대왕에게 바치지만 크누트도 기독교인이라 더 심한 개종정책을 펼쳤다(...)

이후 크누트의 아들인 스벤 크누트손이 대리 통치했으나 그가 요절하자 당시 키예프 루스로 망명한 올라프 2세의 가족들을 다시 불려들여 올라프의 혼외자인 망누스 1세를 왕으로 세우기로 계획한다. 이후 크누트가 죽으면서 망누스를 왕으로 내세워 덴마크에게 벗어난다. 이후 한 동안 덴마크의 하레크누드와 전쟁을 하다가 이후 평화 종약을 채결하면서 하레크누드와 망누스 둘 중 한 명이 죽는다. 살아 있는 자가 다른 이의 왕위를 차지하기로 합의를 본다.

이후 하레크누드가 먼저 죽자 망누스가 협약대로 덴마크 국왕을 겸해 숙부인 하랄 3세 하르드라다와 공동으로 통치하나 크누트의 외사촌으로서 그의 덴마크 왕위에 이의를 재기한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의 반란에 의해 셸란 섬으로 피하다가 그곳에서 죽었고, 하랄 3세가 단독으로 노르웨이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전쟁은 15년간이나 계속되었고, 전쟁은 덴마크의 스벤 2세가 노르웨이의 하랄 3세에게 패배를 거듭했지만 하랄 3세가 약탈에만 몰두하면서 덴마크를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결국 AD 1062년 니즈 전투를 끝으로 둘은 상대방을 각국의 군주로 인정하였고 AD 1064년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하랄 3세가 사망한 이후 그의 두 아들인 울라프 3세와 망누스 2세가 공동왕이 되었으나 AD 1069년 망누스 2세가 사망하면서 단독 왕이 되었다. 울라프 3세는 덴마크 정복을 포기하고 AD 1068년 덴마크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향후 25년간의 평화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울라프 3세는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와 평화조약을 맺고 노르웨이 교회를 직접적으로 통제하였고 노르웨이에 4개의 주교구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AD 1073년 울라프 3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망누스 3세가 사촌인 공동 왕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콘이 사망하면서 망누스 3세가 단독 왕이 될 수 있었다.

망누스 3세는 부왕과 달리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쳐서 AD 1098년 브리튼 섬 근처의 섬들인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을 원정하여 이들의 왕이 되었고 같은해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족의 공격을 막아달라는 웨일스인들의 요청에 따라 웨일스 북서부의 앵글시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스웨덴도 공격했으나 곧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AD 1101년 스웨덴 왕 잉에의 딸인 마르그레테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AD 1102년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더블린 왕위에도 올랐지만 AD 1103년 아일랜드에서 식량을 징발하던 중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아들들인 에위스테인 1세, 시구르 1세, 울라프 4세가 공동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울라프 4세의 나이가 너무 어려 실질적으로는 에위스테인 1세와 시구르 1세 노르웨이를 통치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AD 1096년 제1차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동방에 십자군 국가를 수립하였는데 시구르 1세도 십자군 원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구르 1세는 노르웨이 통치는 에위스테인 1세에게 맡겨 둔채 AD 1108년 60척의 갤리선에 6천명을 태우고 중세시대 최고의 낭만적인 노르웨이 십자군 원정을 시작한다.

시구르 1세는 잉글랜드,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갔고 발레아레스 제도 부근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 해적과 전투를 벌였고, 시칠리아 섬에 도착하여 그곳을 지배하던 노르만족의 수장인 루지에로 2세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해 준 다음에 AD 1110년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여 예루살렘 왕인 보두앵 1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시구르 1세는 보두앵 1세를 도와서 베네치아 함대와 함께 북부의 항구도시인 시돈을 함락시킨 후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여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잠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던 시구르 1세는 자신의 함대를 모두 매각하여 그 돈으로 대신 말을 구입하였고 동로마 제국에 용병으로 남기를 원하는 부하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끌고 육로를 이용하여 노르웨이를 떠난 지 AD 1111년에 노르웨이로 귀국한다,

이후 공동으로 통치하던 자신의 형제들인 울라프 4세가 AD 1115년 요절하였고 에위스테인 1세 역시 AD 1122년 사망하면서 시구르 1세가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시구르 1세에게는 아들이 망누스 4세 뿐이었기 때문에 공동 왕위계승이 사라지는 듯 했지만 AD 1128년 아일랜드에서 자신이 망누스 3세의 아들로서 시구르 1세의 이복동생임을 주장하는 하랄 4세가 나타났다. 이에 시구르 1세는 중세식 재판 방법인 시죄법을 실시하였고 하랄 4세가 뜨거운 쟁기 보습 위를 걷는 신판을 통과하여 자신이 망누스 3세의 아들임을 증명하였다.

하랄 4세가 시죄법까지 통과하자 시구르 1세도 어쩔 수 없이 하랄 4세를 자신의 이복 동생으로 인정해야 했으나 그 대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인 망누스 4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AD 1130년 시구르 1세가 사망하자 하랄 4세는 약속을 파기하고 왕위를 요구하고 나섰고 결국 망누스 4세와 노르웨이를 양분하여 각각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처음 4년 간은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지만 결국 AD 1134년에 하랄 4세와 망누스 4세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노르웨이는 AD 1240년까지 무려 110여년 동안이나 이어지는 내전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먼저 선제 공격을 한 것은 망누스 4세였다.하랄 4세는 퓌릴레이프 전투에서 패배하여 덴마크로 후퇴, 이후 덴마크로부터 병력을 증원받아 노르웨이로 돌아오면서 AD 1135년 망누스 4세를 생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망누스 4세의 손발을 자르고 두 눈을 멀게 하며 불구로 만든 뒤 수도원에 감금하였고 이후 하랄 4세가 노르웨이의 단독 왕으로 즉위하지만 이듬해 하랄 4세 역시 시구르 1세와 하랄 4세의 이복 형제로서 망누스 3세의 숨겨진 아들임을 주장하는 시구르 슬렘비에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시구르 슬렘비는 혈통에서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직접 왕위에 오르는 것은 노르웨이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AD 1137년 장님이자 불구인 망누스 4세를 석방하여 왕으로 복위시키고 그의 이름으로 노르웨이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망누스 4세는 '맹인왕(den blinde)'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AD 1139년 하랄 4세의 지지자들이 시구르 슬렘비와 망누스 4세의 지배를 거부한 채 아직은 나이가 어린 하랄 4세의 아들인 잉게 1세와 시구르 2세를 자신들의 공동왕으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면서 결국 망누스 4세가 전투 중 전사하고 시구르 슬렘비는 생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잉게 1세와 시구르 2세가 노르웨이의 공동 왕이 된지 3년 후에는 다른 이복 형제인 에위스테인 2세 및 망누스 하랄드손까지 모두 공동 왕위에 올랐으나 AD 1145년 망누스 하랄드손이 먼저 사망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남은 세 명의 형제들이 별다른 문제없이 노르웨이를 공동으로 통치하기 시작했으나 AD 1155년 잉게 1세와 시구르 2세가 회담을 갖기 위해 베르겐에서 만났을 때 분쟁이 발생하여 시구르 2세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회담장에 나타난 에위스테인 2세가 시구르 2세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이후 잉게 1세와 에위스테인 2세가 내전을 벌이게 되었고 AD 1157년 잉게 1세가 에위스테인 2세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에위스테인 2세마저 살해해 단독왕이 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시구르 2세와 에위스테인 2세의 지지자들이 시구르 2세의 아들인 호콘 2세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면서 내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AD 1161년 호콘 2세가 오슬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잉게 1세가 살해당했지만 이번에는 노르웨이 귀족인 에를링 스카케가 잉게 1세의 지지 세력을 이끌며 AD 1162년 호콘 2세를 살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에를링 스카케가 니다로스 대주교인 에위스테인 에를란손의 협조를 받아 자신의 8살짜리 아들인 망누스 5세를 AD 1163년 왕으로 즉위시킨 뒤 그 자신이 섭정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르웨이 역사상 기독교식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시구르 2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스베레가 나타나 망누스 5세에게 대항하던 비르클레크스족의 지도자가 되면서 노르웨이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이후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한 에를링 스카케가 AD 1179년 사망하였고 망누스 5세도 스베레가 이끄는 비르클레크스족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덴마크로 망명하다가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AD 1184년 왕위를 되찾기 위해 노르웨이를 침공하였으나 다시한번 패배하면서 전사하면서 스베레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스베레가 이제 안정적으로 스웨덴을 통치할 수 있게 되는 듯이 보였...는데 AD 1188년 에위스테인 에를렌손이 사망하고 스타방게르 주교였던 에리크 이바르손이 새로운 니다로스 대주교가 되면서 마찰이 발생했다. 에리크 이바르손은 끝내 스베레에 대한 대관식을 거부한 채 AD 1190년 많은 주교들을 이끌고 덴마크로 달아나 버렸다. 이후 비록 스베레가 남은 주교들을 동원하여 AD 1194년 대관식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들 주교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파문을 받아야 했다. 이에 대해 스베레는 왕권이 교권보다 우월하다는 논조의 '주교에 반대하는 연설(En tale mot biskopene)'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스베레가 교권을 억압하자 AD 1196년 오슬로 주교 니콜라스 아르네손이 망명 중인 니다로스 대주교 에리크 이바르손과 함께 함대를 이끌고 노르웨이로 돌아왔고 이에 호응하여 노르웨이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비록 니콜라스 아르네손이 노르웨이의 동부 지역을 장악했지만 내륙 지역은 여전히 스베레의 세력이 우세했다. 결국 스베레가 AD 1199년 니콜라스 아르네손를 격파하고 AD 1202년이 되면 반란군도 모두 토벌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같은 해 3월 그 역시 사망하고 말았다. 이미 스베레의 장남인 시구르가 요절했기 때문에 차남인 호콘 3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비록 호콘 3세가 교회와 화해했지만 재위 2년만인 AD 1204년에 그 역시 사망하고 말았다. 이제 시구르의 아들인 구토름이 4살에 불과한 나이에 왕으로 즉위했지만 그마저 같은 해 갑자기 병사하면서 노르웨이의 내전은 계속되고 만다.

AD 1202년 스베레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호콘 3세와 손자인 쿠토름가 모두 2년 만에 나란히 사망하였기 때문에 스베레를 지지하던 비르클레크스족은 더이상 왕으로 내세울 스베인의 직계 후손을 가지지 못했다. 이 때 스베레의 오랜 적대 관계에 있던 바글레르족이 망누스 5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에를링 망그누손을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에 비르클레크스족의 수장인 호콘이 직접 왕위계승 후보자로 나섰다. 하지만 니다로스 대주교 에리크와 트뢰넬라그 지방의 농부들은 시구르 2세의 외손자이자 트뢰넬라그 호족인 배르드의 아들 잉게 2세를 지지했다. 잉게 2세는 시구르 2세의 딸인 세실리아의 아들로 비르클레크스족의 호콘과는 아버지가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모제 관계였다. 이에 호콘은 잉게 2세와 협상을 벌여 잉게 2세가 노르웨이의 왕이 되는 대신에 호콘은 야를의 지위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왕실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비르클레크스족과 바글레르족 사이의 내전은 4년을 더 이어졌고, 비록 AD 1206년 에를링 망그누손이 사망했지만 바글레르족은 필리프 시몬손을 새로운 지도자로 내세웠다. 바글레르족은 퇸스베르그와 오슬로를 비롯한 남동부의 비켄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고 잉게 2세는 니다로스를 비롯한 중부의 트뢰넬라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AD 1207년 가을 니다로스 대주교 토레와 오슬로 주교 니콜라스가 만나 협상을 벌이면서 필리프 시몬손이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에 야를이 되어 노르웨이 동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호콘이 노르웨이 서부를 통치하며 잉게 2세가 노르웨이 왕위를 차지하기로 합의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안한 평화가 계속되었지만 야를 호콘이 AD 1214년 사망하였고 이어서 잉게 2세와 야를 필리프도 AD 1217년 나란히 사망하면서 더 이상의 내전은 발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노르웨이 왕위는 스베레의 숨겨진 손자로 알려진 호콘 4세가 13살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콘 4세는 계승법을 정해 노르웨이 내전을 끝낸다.

노르웨이의 내부가 안정되자 호콘 4세는 AD 1247년 노르웨이에 도착한 교황사절이 대관식까지 직접 거행해주면서 권위는 더 높아졌다. 이후 호콘 4세는 본격적으로 내정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왕위계승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장자 상속법을 제정하여 그의 장남인 동명의 호콘을 부왕으로 임명했고 AD 1257년 그가 요절하자 다른 아들인 망누스 6세를 다시 부왕으로 임명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AD 1217년에는 잉글랜드와, AD 1250년에는 독일 북부도시인 뤼베크와 각각 무역 협정을 맺었고 키예프 루스와도 불분명했던 북부 국경도 확정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뤼베크는 독일 북부의 상업도시들의 연합체인 '한자(Hanse) 동맹'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AD 1262년에는 바이킹 시대에 노르웨이 사람들이 진출했던 서쪽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도 사절을 파견하여 이듬해 그들의 무역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시켜주는 조건으로 노르웨이의 영토로 편입되는 것을 인정받았다.[2] 그리고 AD 1263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가 노르웨이의 지배를 받고 있던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호콘 4세가 스코틀랜드로 향하여 몇차례 전투를 벌여야 했으나 호콘 4세는 스코틀랜드 북쪽의 오크니 제도에서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망누스 6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AD 1263년 망누스 6세가 즉위하였으나 호콘 4세가 살아생전에 마련한 왕위계승법 덕분에 아무런 이의제기가 없었다. 즉위 직후 망누스 6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이어받아야 했지만 아버지와 달리 대외 정책에는 소극적으로 임하여 AD 1266년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을 스코틀랜드에게 넘기고 만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하여 입법권을 중앙에 집중시키고 노르웨이 전역에 적용되는 전국법을 비롯하여 수많은 법을 제정하면서 '법률개정왕(Lagabøt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AD 1280년 망누스 6세가 43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에리크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에리크 2세는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의 딸인 마거릿과 결혼하여 동명의 딸 마거릿을 얻었는데 AD 1286년 알렉산더 3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딸 마거릿이 불과 3살의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으나나 마거릿은 그 이후로도 노르웨이에서 성장했고 AD 1290년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중 배 안에서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왕위를 다시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에리크 2세 역시 AD 1299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노르웨이 왕위는 동생인 호콘 5세로 넘어갔다.

3.7.3. 스웨덴

AD 1000년 노르웨이의 울라프 1세가 벤드족의 땅인 포메른을 습격하고 노르웨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노려 덴마크의 스벤 1세는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 및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연합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벌어진 스볼데르 전투에서 울라프 1세는 11척으로 총 70척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결국 라데 백작 에리크에게 생포되어 바다에 던져졌고, 라데 백작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겉으로는 종주권을 덴마크와 스웨덴이 양분했고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이 노르웨이의 트뢰넬라그를 획득하는 대신에 덴마크의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AD 1008년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라틴어로 왕의 칭호인 '렉스(REX)'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AD 1022년 사후에는 그리스도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3] 이후 노르웨이를 잠시나마 덴마크의 지배에서 해방시킨 울라프 2세와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울라프 2세가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의 딸인 잉리드와의 결혼을 청했으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잉리드를 러시아의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결혼시켰다. 이에 전쟁이 임박해지자 AD 1019년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와 화해하고 다른 딸인 아스트리드를 결혼시켰다.

AD 1022년 스웨덴 왕 울라프 쇠트코눙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새로운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본래 이름은 야코브였으나 나중에 스칸디나비아적인 이름인 아눈드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아눈드 3세 야코브는 부왕 울라프 3세 쇠트코눙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의 지원을 받은 아눈드 3세 야코브가 덴마크까지 위협하기 시작하자 덴마크 섭정 울프 야를이 AD 1026년 반란을 일으켜 크누트의 어린 아들인 하레크누트를 왕위에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잉글랜드 군을 이끌고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 크누트가 울프 야를을 제압하였고 같은 해 벌어진 스웨덴-노르웨이 함대를 상대로 벌인 헬게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AD 1028년 노르웨이 지주들을 매수하여 노르웨이 왕인 울라프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후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했다. 이후 크누트가 사망하자, 노르웨이의 왕이 된 스벤에 맞서 망누스 1세를 지원해 노르웨이 왕위로 복귀시켰다.

AD 1060년 에문드 2세가 사망하면서 문쇠 왕가가 단절되고 에문드 2세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스텐킬은 스웨덴 최초의 백작(야를)으로서, 웁살라가 아닌 베스테르예틀란드 출신이었다. 이에 따라 스웨덴의 고대로부터 이어진 왕계가 단절되었는데 이는 정통성 부족을 의미했다. 또한 당시 스웨덴은 아직 그리스도교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교도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립도 심각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스텐킬도 제위 6년 만인 AD 1066년 사망하면서 스웨덴은 왕위를 둘러싼 내전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먼저 스텐킬의 아들로 추정되는 에리크 7세 스텐킬손과 이교도인 에리크 8세가 왕위를 두고 1년간 내전을 벌이다 둘다 사망한 후 AD 1067년 스텐킬의 아들인 할스텐이 동생인 잉에 1세의 보좌를 받아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할스텐의 왕권이 매우 불안하여 결국 AD 1070년 폐위되고 만다.

이후 러시아의 키예프 루시 출신인 아눈드 4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으나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스웨덴의 전통 신앙을 거부하여 AD 1075년 폐위당했다. 그리고 AD 1070년부터 스웨덴 남부의 예타족의 땅인 예탈란드 일대를 통치하고 있던 호콘이 스웨덴 전역을 장악하였다. 일부에서는 아눈드 4세를 건너뛰고 할스텐 다음 왕으로 호콘을 손꼽기도 한다. 그러나 AD 1080년경부터 폐위되었던 할스텐이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 왕으로 복귀했다. AD 1081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서에 의하면 이니셜 'A'와 'I'을 베스테르예틀란드의 공동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니셜 'I'는 잉에 1세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니셜 'A'가 할스텐이라는 설과 호콘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어느 기록에서는 호콘이 사망한 후 잉에 1세가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잉에 1세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스웨덴 전통 신앙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AD 1084년 폐위당했고 이교도이자 처남인 스벤에게 잠시 왕위를 빼앗겼다. 하지만 AD 1087년 스벤을 살해하고 왕위를 되찾았고 AD 1105년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아들인 랑발이 먼저 요절했기 때문에 왕위는 형인 할스텐의 두 아들인 필리프와 잉에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했다. 그렇지만 AD 1118년에는 필리프가, AD 1125년에는 잉에 2세가 모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차례로 사망하면서 스텐킬 왕조가 갑자기 단절되었다.

이후 덴마크 왕 닐스와 잉에 1세의 딸인 마르가레타 사이에서 태어난 망누스 1세가 스웨덴 왕위를 주장했고 스웨덴 남부의 예타족이 망누스 1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망누스 1세를 반대하여 웁살라의 스베아족은 스텐킬 왕가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랑발을 별도의 왕으로 선택했다. 비록 랑발이 재위 1년만에 예타족에게 살해당했지만 망누스 1세도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는 끝내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AD 1130년 외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동부) 출신으로 베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서부)에서 왕으로 선택된 스베르케르 1세에 의해 스웨덴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스베르케르 1세의 왕권도 그리 안정되지 못하여 그의 사후 왕위가 베스테르예틀란드 출신인 에리크 9세에게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 스웨덴 왕위를 두고 스베르케르 가문과 에리크 가문이 서로 다투며 번갈아 가며 차지하는 혼란이 찾아온다.

AD 1125년 스텐킬 왕조가 단절된 이후 왕위를 두고 혼란이 발생하였으나 AD 1130년 외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동부) 출신인 스베르케르 1세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스베르케르 1세는 스웨덴의 그리스도교화에 힘써서 알바스트라, 뉘달라, 바른헴 등 스웨덴의 각지에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이때 AD 1152년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의 특사로 잉글랜드 출신의 이탈리아 알바노 주교이자 추기경인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가 스칸디나비아에 파견되어 교회 조직의 재정비에 나서면서 노르웨이의 니다로스 대주교구가 창설된 데 이어 스웨덴 역시 구(舊) 웁살라(Gamla Uppsala) 대주교구의 신설이 추진되었지만 아직까지 이교도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참고로 추기경 니콜라스는 AD 1154년 로마로 돌아가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로 선출된다.

스베르케르 1세는 26년이라는 장기간의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왕권이 그리 안정되지 않았고 AD 1156년 갑자기 암살까지 당하면서 왕위가 그의 아들이 아닌 베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서부) 출신인 에리크 9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에리크 9세가 통치 기간 동안 스웨덴의 그리스도교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웁살라 주교인 헨리크와 함께 북방 십자군의 일환으로 아시아계 핀족이 살던 핀란드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시키며 향후 스웨덴이 핀란드를 지배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에리크 9세는 비록 로마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시성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성인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에리크 9세도 AD 1161년 암살당하면서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계승시키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잉에 1세의 손녀의 아들인 망누스 2세가 잠시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는데 그는 스베르케르 1세와 에리크 9세의 유력한 암살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 결국 망누스 2세도 재위 1년 만에 스베르케르 1세의 아들인 칼 스베르케르손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칼 스베르케르손이 칼 7세로 즉위하면서 스웨덴은 다시 스베르케르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4]

칼 7세가 즉위할 당시 이미 스웨덴은 에리크 9세의 노력으로 그리스도교화가 거의 완료되었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1세 시절에 추진되었던 대구교구 창설이 비로소 결실을 맺으면서 AD 1164년 웁살라 대주교구가 설치되고 덴마크의 룬드 대주교구로부터 독립하였다. 이렇게 비록 칼 7세는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그도 역시 왕위 세습권만은 확보하지 못한 채 재위 6년만인 AD 1167년에 암살당했다. 이에 덴마크에서 망명 중이던 에리크 9세의 아들인 크누트 1세가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웨덴은 다시 에리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스베르케르 왕가와 에리크 왕가가 서로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이후 비록 칼 7세의 2명의 동생이 외스테르예틀란드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AD 1173년 크누트 1세가 반란을 모두 토벌하였다. 이제 크누트 1세는 AD 1187년 스톡홀름을 비롯하여 수많은 요새를 세우면서 스웨덴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AD 1196년 크누트 1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스베르케르 가문과 에리크 가문이 번갈아 계승하는 관례가 계속해서 이어져 스베르케르 가문의 칼 7세의 아들인 스베르케르 2세가 다시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스베르케르 2세는 즉위 과정에서 크누트 1세에 의해 야를(Jarl)로 임명받아 왕국의 2인자가 되었던 비르예르 보르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첫번째 부인이 사망하자 비르예르의 딸인 잉리드와 재혼을 했다. 그리고 스베르케르 2세는 AD 1202년 자신의 후원자였던 비르예르가 사망하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1살에 불과한 아들인 요한 1세를 야를로 임명했다.

스베르케르 2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크누트 1세의 아들들은 스웨덴 왕궁에 머물렀지만 AD 1203년 왕위를 노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노르웨이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후 AD 1205년 크누트 2세의 아들들이 노르웨이의 유력 세력인 비르클레크스족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을 침공했지만 스베르케르 2세가 엘가로스 전투에서 크누트 1세의 아들들을 격파하여 4형제 중 3명을 처형했다. 하지만 막내인 에리크 10세만은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AD 1208년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을 재침공하여 이번에는 대승을 거두고 아버지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베르케르 2세가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되찾기 위해서 AD 1210년 스웨덴을 공격하였으나 예스트릴렌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제 에리크 10세가 정식으로 대관식까지 치렀고 스베르케르 2세를 지원했던 덴마크와 화해하기 위해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의 누이인 리케자와 결혼시키면서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AD 1216년 비싱쇠 섬에서 고열로 급사하고 말았기 때문에 스웨덴 귀족들은 왕위 선출 과정에서 로마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 서둘러 스베르케르 2세의 아들인 요한 1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스베르케르 왕가의 요한 1세가 스웨덴 왕이 되고 AD 1219년 대관식까지 치르면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AD 1222년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왕가가 갑자기 단절되고 말았다.

요한 1세가 급사한 이후 에리크 10세의 아들인 에리크 11세가 6살에 불과한 나이에 스웨덴 왕으로 선출되면서 스웨덴 왕위는 다시 에리크 왕가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에리크 11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에리크 9세의 증손자 뻘로 에리크 11세의 먼 친척이 되는 크누트 2세가 섭정이 되었다. 그리고 에리크 11세가 성장하여 AD 1229년 크누트 2세를 몰아내고자 했지만 오히려 패배하면서 덴마크로 쫓겨나야 했다. 이후 크누트 2세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지만 크누트 2세가 AD 1234년 사망했기 때문에 에리크 11세가 귀국하여 왕으로 복위할 수 있었다.

이제 에리크 11세가 AD 1250년까지 왕으로서 스웨덴을 통치하게 되지만 그 역시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왕가에 이어서 에리크 왕가도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자 스웨덴 재상로 왕국의 2인자였던 야를 비르예르 망누손이 에리크 11세의 누이인 잉에보리와 결혼하였다는 점과 모계 혈통으로 스베르케르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점을 내세워 자신의 아들인 발데마르 1세를 왕으로 선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웨덴 왕위를 둘러싼 스베르케르 왕가와 에리크 왕가의 오랜 분쟁이 종식되고 새로운 '폴쿵아(Folkunga)' 왕조가 시작되었다.

망누스 3세는 스웨덴의 내정을 정비했으나 그역시 후계 구도에 있어서는 만전을 기하는 데 실패했다. 비록 AD 1290년 망누스 3세가 사망할 때 자신의 장남인 비르예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나이가 10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직접 통치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먼 친척이자 군대를 총괄하는 지위인 '컨스터블(constable)[5]'인 토르길스 크누트손을 섭정으로 지명하고 원로원을 통하여 통치하도록 해야만 했다. 이에 토르길스가 스웨덴 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스웨덴을 통치하기 시작했고 특히 에리크 9세 시절 중단되었던 핀란드 정복을 재개하여 AD 1293년 카렐리야 서부를 장악하고 비보리에 요새를 세우며 러시아와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3.8. 동유럽

3.9. 기타

정치 철학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12세기 로마법의 부흥과 함께 기존의 관습법이었던 게르만법과 함께 법에 의한 통치가 동시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아울러 법 철학에 따른 군주의 권력을 어떻게 뒤받침할 것이고, 어디까지 정할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래에 후술된 외교 부분에 언급된 내용들을 참고하면 된다.

그 중에서 12세기 영국의 성직자이자 프랑스의 샤르트르의 주교직을 역임했던 숄즈베리의 존은 진정한 군주와 폭군을 가르는 기준을 자유의 유무에서 있다고 봤고, 자신의 저서에 '군주란 법과 인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폭군은 오로지 법이 폐기되고, 인민이 노예가 되는 것만을 바라는 존재다.'라고 피력했다.# 당시 존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 카지미에시 3세처럼 지배층의 횡포에 일반 평민들을 보호해주는 등 개념있는 군주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이밖에도 수도원이나 동로마 제국 및 이슬람 세력과의 교류 등으로 다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이 부활하면서 지식인 한정으로 전체군주제를 혐오하는 사상을 물려받아 자국내의 정치가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는 체제라고 생각했다.관련 링크 또한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사상 또한 등장하기도 했다.관련 링크

그 밖의 사례로는 중세 중기 초부터 시작한 동방식민운동이 있는데, 초기 동방식민운동은 상속받을 땅이 없던 신성 로마 제국의 영주들의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 직접 영지를 개척할 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개척지를 점령한 후 현지의 토착 슬라브인들을 농노화시켰지만 이내 소수의 영주들의 힘만으로 이들을 굴복시키는 것에 한계가 오자 결국 본토인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통치에 뒤받침할 목적으로 평민들의 이주를 장려했고, 기간이 있고, 한정적이지만 이주민들이 정착지에 잘 정착할 수 있게끔 배려했다.

중세 중기가 시작되던 11세기 당시의 교회의 권력은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국가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안전성에서 취약했다, 특히 오토 왕조의 오토 3세가 교황을 자신의 측근으로 대체시키려한 시도가 있는 등 교황의 권위가 크게 위협을 받았다. 특히 이시기부터 성직자들의 지배 계층화와 함께 부패와 자정이 반복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11세기 중후반 하인리히 3세가 어린 아들인 하인리히 4세를 남기고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교황의 권력을 압박하던 황권에 공백이 생기면서 각종 개혁과 함께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교황/역사를 참고

이 시기 유럽의 외교는 동시기의 동북아시아의 한자 문화권과 전혀 다른 국제 질서를 형성되기 시작했다. 우선 황제 칭호가 주변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서유럽에선 9세기경 잉글랜드를 병합한 덴마크의 크누트가 황제를 자칭했으며, 이후 11세기 카스티아의 국왕인 알폰소 6세가 전 스페인의 황제를 자칭했으며, 동유럽에선 10세기 불가리아 또한 카이사르에서 따온 차르를 쓰며 동로마 제국과 대립하는 등 로마 황제의 권위가 무시당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영국과 스페인의 경우 단발적으로 그쳤지만 이후 유럽의 분열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한 것이 다름아닌 법률 체계가 공고하게 했다. 바로 교회법과 관습법, 그리고 로마법이었다. 교회법은 로마법과 기독교 교리에 맞게 만들어진 법으로서 신 아래 평등하다는 교리 등이 접목되어 있으며, 제3차 십자군 원정 이후 육로로 통한 귀환 중 신성로마제국에 구금된 리처드 1세가 자신에게 봉신관계를 강요하는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게르만법은 관습법으로서 주로 게르만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주로 채택하고 있었다. 게르만족들은 로마제국이 건재한 당시까지 통합하지 못하고 할거 상태였고, 이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가 나라를 세운 후에도 마찬가지로 관습법 또한 부족별로 달랐다. 관습법은 봉건제가 등장하면서 봉건제가 결합해 쌍무적 계약하에 군주라도 봉신에 대한 불간섭 원칙이 고스란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관계에서도 적용이 되었다.

로마법의 경우에도 공화정 이후 만들어진 법으로서 서로마 제국 붕괴후 무명무실해지다가 12세기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로마법 부흥이 시작되면서 황제의 종주권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세 이전 로마법에 대한 해석들 중에서 황제 또한 그 권위를 법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주장이 있었고,동로마 제국에서도 법의 제정에 대해서도 황제를 포함한 그 누구라도 궁극적으로 법이라는 이유를 들며 황제의 권위를 절대적이지 못하게 했다.

또한 이시기 권위의 상승이론과 하강이론이란 것이 이때 등장했다. 두 이론은 모두 로마법에 근거한 것으로 12세기 블로냐 대학의 유명한 법 이론 교수였던 아조가 주장한 것으로 권위의 상승이론은 게르만족과 연계된 것으로 권위가 밑으로 위로 올라가는 즉 권위의 근원이 정치공동체에게 있다는 사상이며, 권위의 하강이론은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즉 권위의 근원이 신에게 있다는 것으로 사실상 왕권신수설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법적 이론에 맞물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권위는 인정받되 점차 제국 밖에 위치한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제국(諸國) 등의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9세기 경 국경을 맞대던 폴란드 왕국헝가리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점차 로마 제국의 발상지였던 이탈리아 반도에 집중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며 이는 교황령과의 분쟁으로도 이어지는 결과로 맺어지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이밖에도 제각기 달라져가는 언어·문화 등을 한데 묶기에도 신성 로마 황제들은 물론이고 로마 황제로서의 전통성을 갖고 있던 동로마 황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기독교의 동서 대분열 시기를 거치며 가톨릭이 주류인 서유럽권과 정교회가 주류인 동유럽권으로 나눠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서유럽의 봉건제가 정착하게 되면서 각 국가 내의 지방별로 고유의 방언과 함께 정체성까지 확립되어가던 시기였고, 이는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등장하는 근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이 시기는 혼인 동맹이 빈번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단순하 국가간의 결속력을 위한 목적이 아닌 혼인한 가문 중 하나가 단절 시에 계승권을 주장해 그 영토를 합병할 목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위의 세속 정치에서 언급된 영국의 노르만-앙주 왕조의 혼인 동맹 방식은 반세기만에 프랑스 내에 영국 왕실의 직활령을 단숨에 늘려놨다.

또한 이 시기부터 외교관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먼저 등장한 것은 현재 중세 유럽사 서적에 간혹 보이는 일명 문장관으로 불리는 전령(Herald)으로 이들은 11세기부터 등장했으며, 이들은 왕실과 영주들의 문장을 해석 및 어떤 가문인를 분류하는 것이 주업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급 외교사절로서 상대 군주에서 주군의 선전포고와 같은 기본적인 외교 활동을 대리했다.

그러다가 12세기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에서 영사가 등장했다. 본래 고대 로마시대때 로마의 식민지에 파견된 치안 판사에서 유래되었으며, 12세기에 다시 지중해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이탈리아의 도시마다 지중해의 항구도시에 조계지를 할양받아 그곳에서 단체로 모인 후 교역에 종사하지만 조계지 내의 상인들 간의 분쟁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를 중재할 목적으로 영사를 파견하게 되면서 현재의 영사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4.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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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가 스벤 1세의 누이인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이다.[2] 단, 아이슬란드 자유국의 경우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들은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노르웨이 통일 전쟁에 의해 몰락한 이들의 후손이 대부분으로 기독교 또한 노르웨이를 통해 전파되었기에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까지 이에 대한 거부 반응을 보여 개종자와 이교세력 간의 내전이 일어날 수준까지 치닫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스노리 스투를루손처럼 호콘 4세에게 저항하다가 제거된 이들도 있었다.[3] 단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에 의하면 여전히 스웨덴은 대부분 전통 신앙을 유지했다고 한다.[4] 칼 7세라 불린 이유로는 '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설 상의 6명의 왕이 존재했기 때문에 칼 7세로 명명되었다고 한다.[5] 영어로 순경으로 번역되나 본래 로마시대때부터 마굿간을 관리하던 직책이었으나 점차 기병대의 지휘관을 겸하다가 나중에 왕을 대리한 군대의 총지휘권까지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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