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전투 中都戰鬪 Battle of Zhongdu | ||
시기 | 기원전 354년 | |
장소 | 조선국 중산령 진양분지 중도현 (오늘날의 산시성(산서성)(山西省) 진중시(晋中市) 핑야오현(平遥县)) | |
원인 | 동맹이었던 조선의 배반으로 인한 중원대전 패배, 이로 인한 위(魏)의 중원 패권 및 영토 상실에 대한 위후 위앵의 복수심 | |
교전국 | 위魏 | 조선朝鮮 |
지휘관 | 대부 용가 | 대부 이세 열 현령 고정 |
병력 | 위군 4만 3천 | 조선군 1만 2천[1] |
피해[2] | 위군 약 4천여명 | 조선군 약 930여명 |
결과 | 위군 패배, 조선군 중도현 방위 성공 | |
영향 | 위나라의 반조선 감정 고조 패자 전인제의 중재로 인한 표면적 화해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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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B.C. 354년에 위와 조선이 맞붙은 전쟁이다. 중원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조선의 배신으로 위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상실하였으며, 상당군의 영토도 빼앗겼다. 특히 과거 조선에서 인질생활을 보냈지만 그 당시의 배움에 더해 자신의 왕위까지 내전에서 지지해준 조선에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위앵의 배신감은 상당했다. 이에 위앵은 수도를 안읍에서 대량으로 천도 하고, 조선에 복수하기 위해 대부 용가를 지휘관으로 4만의 대군을 진양분지[3] 중도현으로 보낸다.
2. 배경
2.1. 위의 사정
기원전 358년에 있었던 중원대전으로 인하여 위나라는 국토의 절반을 빼앗기고 중원의 패권을 상실하였다. 특히 과거 동맹국이었지만 배신한 조선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여, 중도, 열, 장자, 장평 등 4개현을 점령하여 위나라의 허리를 끊어버리는 결정타를 날렸다. 과거 조선에 인질로 지내었던 대다 왕위 때문에 어머니를 죽인 위완을 제압하면서 자신과 나라를 크게 도운 적이 있던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위앵은 이 사건을 계기로 극도의 반조선으로 선회하였으며, 동시에 아직 불안정했던 상당의 지배권을 되찾아오기 위해서 제후(齊侯) 전오와 밀약을 맻는다. 위앵은 제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는 대신 위와 조선이 1대1로 전쟁시 제나라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말것을 주문하였다. 전오는 국지전까지는 관여하지 않겠지만 전면전일시 제나라는 동맹으로 의무를 다하겠다고 답하면서 위앵의 제안을 받아들였다.2.2. 조선의 사정
위가 중도현으로 공격해들어오자 조선측은 당황하였다. 제와 동맹이었던 조선을 위가 선제 공격하리라 예상하지 못하였고 점령지 장악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중도현의 수비군 숫자는 5천에 불과했다. 마침 진양에 있던 전장군 고비가 급히 증원군을 편성하였지만 제시간에 도착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그리고 당시 조선의 지배력은 점령한지 얼마 안된 상당군에서 약한 편이었기에, 중도라는 주요 도시가 위나라에게 넘어가면 그대로 상당군 전체의 지배가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상황이었다.
3. 전투의 전개
3.1. 중도현 공방전
위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조선군은 분수에서 위군을 요격하지 못하고 그대로 수성에 들어갔다. 중도현에는 대부 이세가 5천의 방어병력을 구성해 방어전에 나섰지만 위군의 대군에 방어측이 점차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치열한 공방전이 오가던 와중 위군의 후방에 열현령 고정이 이끄는 증원군이 등장했다. 조선군의 증원이 후방에 나타나자 위군의 지휘관 용가는 크게 당황하였고 이는 휘하 병사들에게도 전염되어 우왕좌왕하는 사이 고정은 그대로 휘하 병력을 몰아 위군의 후방을 들이치고, 이세는 방어선을 보수하여 수성에 전념하였다.3.2. 위군의 퇴각, 고정의 추격
위군은 앞뒤로 포위당한 형국에 언제 조선의 증원군이 다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이 4만 병력이 잘못될 경우 하동의 방위가 무너지는 상황이었기에 용가는 퇴각을 명하였다. 위군이 물러가자 이세는 추격하지 않고 중도의 방어에 전념하였다. 그러나...고정: 이렇게 파박! 해서 저렇게 슈슈슉! 하면 이길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4]
- 위군의 후방을 들이칠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고정
고정은 퇴각하는 위군을 보자 지체없이 추격하여 공격을 가하였다. 위군이 이에 대응하였지만 끝내 패배하여 약 1천의 병력이 피해를 입었다.[5] 결과적으로 용가는 수성군의 8배가 넘는 4만 2천의 대군을 이끌고도 중도현을 제압하지 못하고 4천의 피해만 보고 퇴각하였다.[6]- 위군의 후방을 들이칠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고정
4. 결말
4.1. 고정의 승진, 이세의 정서장군 임명
뒤늦게 중도에 도착한 전장군 고비는 이세를 통하여 고정의 활약을 전해듣고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에 고정을 열현령에서 진양현령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고정은 대총재 안월[7]과 안면을 익혀 중앙정계에 끈을 만들었다.또한 대부 이세를 중외대부로 승진하고 정서장군과 겸직하게 하였다. 이에 전장군 고비가 위에 대한 보복전을 염두에 둔 것이냐고 묻자 안월은 어사대부 문인의 조언에 따라 정서부를 조직함으로써, 조선 서쪽의 경계가 올라가고 유사시 대응할 수 있음을 위에 보여주는 일종의 경고라 하였다.
4.2. 대부 용가 강등, 위의 반조선 감정 고조
위후 위앵은 터무니없이 패전하고 돌아온 대부 용가를 강등[8]시키고 그녀의 자리에 공족인 위착을 임명하였다. 또한 패전으로 인한 위신의 하락을 염려하여 하내와 하동에 대대적으로 반조선 감정을 일으켰고, 이에 성공해서 위신이 떨어지는 것만큼은 막아내었다.하지만 이 때 드높아진 반조선 감정은 이후 위나라가 진나라에게 공격당할 때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던 조선이란 카드를 자체적으로 봉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5. 전후처리
5.1. 패자(覇者) 전인제의 중재
한편 위와 조선의 충돌을 지켜본 패자(覇者) 전인제[9]는 조선의 정서군 조직과 위의 반조선 감정에 차후 두나라가 다시 충돌할 수 있음을 느끼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위후 위앵과 조선후 기이를 제나라 규구(葵丘)로 불러들였다.규구에서 만난 위앵과 기이는 각각 조선의 파렴치함과 이번 전투를 내세우면서 패자의 중재 제안에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에 전인제는 양국을 공족간의 혼인을 통한 동맹으로 묶고, 조선이 위에게 한가지의 편의를 봐주는 조건을 내걸었다.
전인제의 제안에 위앵은 추가적으로 조선이 상당방면에 건설중인 목책과 방어시설을 철거하면 수락하겠다 하였으나, 기이는 방어시설 건립은 국가의 주권이라면서 곤란하다고 하였다.[10] 이에 전인제는 화평기간과 그 이후 일정기간 동안 [11] 위가 조선을 공격시 제나라가 개입하겠다는 조건을 추가하여 조선의 수락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조선과 위 사이에는 화평이 성립했고 하북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이 결혼동맹으로 일단 위와 조선은 친척이 되었고, 이 사실은 위와 조선의 감정이 최악을 달리던 당시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조선이 공식적으로 위를 싸고돌 명분이 되어 외교판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1] 중도현 수비군 5천, 열현 증원군 7천[2]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3] 실제 역사에서는 태원분지로 유명.[4] 이후 조옹과 협력해 임호를 정복할 때를 보면 극도로 세밀한 계산을 완벽하게 해내지만 그걸 반쯤 감각으로 해서 설명을 못하는 부류인 듯하다(...)[5] 이때 고정의 증원군은 숙련도가 40대의 오합지졸이었다. 위군의 숙련도는 68[6] 손실란에서 보듯 이 전투 안에서 조선에서 동원된 모든 병력의 수만 해도 위군의 1/4를 조금 넘었는데, 위군의 피해는 조선군의 4배를 넘었다.[7] 안월의 AA가 츠키무라 스즈카였고 고정의 AA가 타카마치 나노하였기 때문인지 안월이 고정에 친근함을 느끼며 종종 만나자고 말한다.[8] 용가는 위나라 서하군 사령관이다. 일전에 손빈의 무시무시한 규모의 공세에 일말의 지체 없이 방어선에서 전군 퇴각이라는 결정을 한 적이 있어 이것이 합리적인 것인가는 둘째치고 이미 과가 있다는 점이 가중된 것이었다.[9] 제후(齊侯). 중원대전과 중도 전투 사이 전오가 사망해 자리를 계승, 이후 회맹을 통해 패자가 되었다.[10] 실제로 위앵은 다시금 재침을 생각하고 있었다.[11] 화평기간 11년 이후 보증기간 2년 7개월 총 13년 7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