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 합종군 | ||
장소 | ||
요동~함경도 육진 | ||
기간 | ||
1766년 ~1767 | ||
교전세력 | 조선 | 청나라 |
지휘관[1] | 조선왕 이훤 도원수 김운행 김성응[2] 한중량[3] 윤필덕[4] 장지항[5] | 건륭제 오륵등 탁은다 아리곤 |
병력 | 조선군 보병 20000명 해방별대 3만명 함경 병력 3천여명 | 건륭제 친위군 5만5천 길림, 흑륭강 팔기 18000명 |
피해 규모 | 피해 불명 | 사상자 4만 이상(추정) |
결과 | ||
조선 승리 | ||
영향 | ||
청의 요동 상실 청의 분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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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 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2. 배경
2.1. 청나라의 국력 소진
청나라는 건륭제의 십전무공으로 10년 가까이 이어진 서북 천산산맥의 준가르 전쟁[6] 일본 원정, 강남의 천지회와 신사계층 반란군과 영국군과의 남방 전쟁에 이어 화북에서 백련교의 난까지 일어나면서 무한해보이던 국력을 거의 소진하게 된다.준가르의 지도자 아무르사나는 러시아의 지원과 일대의 유목민들을 포섭해 만든 10만 대군으로 항전했고, 사츠마(일본) 정벌로 시작된 일본과의 전쟁은 강남 상인들의 경제력을 말라붙게 만들었다. 게다가 강남에서 서북 전장을 지원할 군비까지 뜯어내니 강남의 분노는 한계에 달해 마침내 천지회가 반란을 일으킨다. 물론 정병이라고는 없는 강남 신사계층과 범죄조직이나 마찬가지인 천지회가 힘을 모아도 어림도 없었지만, 이 때 영국이 주축이 된 4만 대군이 이들과 연합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곧 유럽인들은 주피터라는 가짜 명나라 황실의 후손을 내세워 후명을 건국하고 파죽지세로 진군하다가 진압을 명받은 이시요의 12만 대군과 싸우게 된다. 안탕산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이시요의 청군도 반토막, 유럽군도 1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공멸을 하게 된다.
청나라는 메말라가는 국고를 지방 착취로 해결하려 했고, 이는 30만 적로군으로 나타나 사방의 전선 제압에 나선다. 먼저 5만에 달하는 부대가 서북으로가 준가르 연합을 거의 패퇴시키고, 본군 25만은 산동으로 진군해 백련교군도 거의 패퇴시킨다.그렇게 수많은 전쟁으로 국력이 깎이고 군사력이 소진된 청과 달리 정축하성 즉위 이후 계속 국력을 증진한 조선은 이 시기엔 정병 6만에 달하는 동원력을 갖게 된다. 명분이라도 남아 유사시 대군을 징병할 지방군을 혁파했기에 상비군과 해병대만 남았지만, 질적으로는 배 이상 강력해진 상태였다. 거기다 더해 근래 팔도 식자와 백성들에게 사서삼경이나 훈민정음 이상의 필독서인 만물변증고를 통해 인삼스라움과 쌀슐루스의 개념을 전파, 북벌을 향한 의지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반년 전부터 조선이 청나라의 오해를 씻겠다고 평양에 이훤이 직접 머물고 있었는데, 이에 따라 대부분의 군사들도 조선 북방에 머물면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2.2. 조선의 선전 포고
지방 착취도 한계에 달한 청의 요청으로 조선군이 출병했으나, 이미 산둥의 백련교도들과 밀약을 맺은 도원수 김운행은 흩어진 백련교도들 상당수를 비밀리에 조선으로 탈출시켰다. 이에 25만 적로군을 지휘하던 청나라 장군 부찰부항은 5만 병력만 두고 20만 병력으로 남하한다. 여기에 더해 건륭제에게 천진으로 이동해 영국과 싸우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이를 빌미삼아서 1만 병력을 아홉으로 나누어 일주일 만에 성 하나를 깔끔히 약탈하고 마침 도착한 해방별대의 배를 타고 조선으로 복귀하는 신기를 보여준다.
산동의 청나라 관리들을 공격한 일로 결국 청나라도 조선의 배신을 확신하게 되었으나, 남중국에서 거병한 후명, 천진 일대까지 점거하고 공격하는 영국군, 청나라의 약체화를 눈치채고 다시 공세를 시작한 러시아-준가르 연합군, 남만에서 북상하는 버마군의 북상 등으로 더는 위험했다. 직례의 마지막 여력인 부찰부항의 대군은 강남에서 후명의 방해로 귀로가 막혀서 입촉해서 보급을 받은 후 버마군을 무찌르고 남하하든 북상하든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만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해 재정비 후 다시 중원을 정복하자는 천명 이전 프로토콜이 시행된다. 이에 따라 청나라의 유일한 우호국이자 경계대상인 내몽골의 기마 3만이 다시 소집되어 영국군에 대한 반격에 나서면서 대영전선을 잠시 밀어낼 수 있게 된다.그리고 조선에서는 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가 투석기로 삼전도비를 폭파한 잔해를 투척하는 것으로 조청전쟁의 막이 오른다.
3. 조청 전쟁
3.1. 함경도 전선
청의 권신인 화신은 조선군이 요동 방어선에 막혀 시간을 낭비하면 병력을 보내 격파할 계획을 짰으나, 김운행은 산둥에서 보여준 구두룡섬 기동을 다시 발휘, 조선군을 다시 수 갈래로 나누어서 요동 전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화신은 이런 분산 행군은 아직 조선보다 우세한 병력수를 가진 청에게 각개격파할 기회만 준다면서 의아해했으나, 김운행이 이번 전쟁의 기획자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건륭제에게 보고해, 길림, 흑륭강 장군의 팔기를 남하시켜 조선 주력이 있는 평안쪽이 아닌 함경도를 공격시킨다. 본토가 공격당하면 요동의 조선군이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노린 것이다. 이 두 세력의 병력은 기병 위주의 만 팔천여명에 달해서 결코 얕볼 만한 수가 아니었다.그러나 이는 김운행이 노린 바였다. 김운행은 포로가 된 조지 워싱턴과3.2. 요동 전선
화신은 길림과 흑룡강 팔기의 연락이 끊긴 걸 보고 패전을 눈치챈다. 그러던 중 지금까지 요동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요하 방어선을 야금야금 찌르던 조선군 병력 3천명이 흥경성을 친다는 보고를 접한다. 곧 있을 황제의 이어를 위해서라도 실적이 필요했던 화신은 양황기 도통 오륵등에게 명령해 성경부 병력 일부를 더한 3천 기병으로 흥경성을 구원하러 움직인다. 조선군의 미친 구두룡섬 기동 탓에 요하의 청군 장수들이 지레 겁먹고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기에 외부에서 물꼬를 트려고 시도한 것이다.당시 흥경성 주변 조선군 지휘관은 신흡이었다. 그는 의심없이 김운행이 훈련시킨 춘식진을 펼쳤고, 본영의 김운행은 이 진영을 보고 청군 포로를 심문해 적장의 정체와 병력 수를 알아낸다. 그리고 흥경성에서는 한나절의 전투 동안 조선군의 의외의 맹렬한 반격에 오륵등이 당황해서 물러난 후 흥경성의 보군과 같이 2차 공세를 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하루 사이에 조선군은 오륵등을 완벽하게 엿먹이고 도주한 후였다.상당한 피해를 보고도 승전은커녕 적에게 농락당한 오륵등은 흥경성의 보군까지 끌고 신흡을 추격했다. 흥경성을 비우면 안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조선군이 다른 전선의 군을 움직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도망친 신흡의 조선군을 붙잡을 시간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오륵등은 몇날 며칠을 수색해도 조선군을 찾을 수 없었고, 그 사이에 비어버린 성을 들이친 조선군에게 흥경성과 오녀산성이 함락되면서 '청나라의 요하 방어선은 붕괴한다. 오륵등은 뒤늦게야 신흡의 조선군이 요양에 있다고 달려갔으나 무려 1만 5천이라는 조선군이 몰린 탓에 겨우 도망쳐 요하를 다시 건너야 했다.그리고 1766년 4월, '마침내 건륭제가 요하를 넘어 조선군과 대치한다.[8] 요동과 남만주 백성들이 변발을 자르고, 조선의 복식을 차려입는 동안 마침내 요양 인근에서 조선 중군과 청군 최후의 군사가 대치한다. 조선 중군 병력은 약 18,000명(기병 6,7천), 청군이 금려팔기 15,000명에 보군 4만명으로 수는 3배나 차이가 났다.청은 선봉에 팔기병, 후열에 보병을 두었고, 조선은 중앙에 보병 방진, 양익을 기병이 감쌌다. 3배의 수적 차이에도 조선군은 여유가 있었는데, 청군은 단순히 전쟁이 아니라, 대규모 이주를 겸하는 만큼 불필요한 치중이 과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보병은 물론 기병들도 지친 기색이 보일 정도였다.패전 후 청군에 합류한 양황기 도통 오륵등이 기병을 끌고 선봉에서 조선군을 공격했다. 이에 조선군은 보병을 앞세워서 사격을 개시, 전열보병 훈련을 받은 조선군은 수월하게 양황기에 연속 사격을 퍼부어 큰 피해를 입힌다. 정예한 금려팔기는 이 사격을 돌파해 조선 보병들을 공격했으나, 조선군은 호흡을 맞춰 전력으로 양측으로 갈라지며 기병돌격의 피해를 줄였다. 팔기는 그대로 조선군영을 돌파하려 했으나, 보총병들 뒤에는 포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병을 맞추려 하지 않고 대포를 터뜨리고 도망쳤다. 정백기 지휘관은 의외의 역습에 당황하면서도 우회해서 돌파하려 했지만, 방금 그들이 가르고 들어온 조선군이 양측에서 거리를 좁혀오면서 오히려 팔기가 조선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속도와 사기를 잃은 기병은 수적 우위인 보병을 당할 수 없었고, 그렇게 금려팔기는 계속해서 격파당한다.조선군의 전술은 간단했다. 청군이 앞세울 금려팔기의 돌격을 조선군 보병들이 받아내면서 끌어들여 포병과 함께 포위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쉽지만 군대의 정예함, 신속한 포위기동, 정확한 지휘부의 명령 중 하나라도 없으면 수적으로 적은 조선군이 오히려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태창으로 전장의 조선군 전체를 내려다보는 김운행의 지원으로 이훤은 이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금려팔기가 패퇴하자 분노한 건륭제는 4만 보군을 일제히 진군시켜 조선군 전체를 포위하려 들었다. 조선 중군을 돌파할 수 없다고 여긴 오륵등도 이를 보고 기병을 양익에 지원했다. 이에 양측에 배치된 조선군 기병 6천기가 전투를 준비했으나... 이훤은 모든 기병에게 명령해 정면으로 돌격한다. 이훤의 목적은 병력 대부분을 진군시키면서 호위가 얇아진 건륭제 본인이었다. 그렇게 6천기 기병에 이훤의 호위까지 더해 7천여기의 조선 기병군 전부가 송곳이 되어 중앙으로 돌진하자, 남은 조선군 보병 1만 2천이 4만여명 청군에게 포위당했다.국왕 이훤과 오도도원수 김운행 다음의 최고 사령관인 장용영 대장 김성응은 이에 겁먹지 않고, 가지고 있는 포를 일제히 발사해 가까이 붙은 청군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사전에 보았던 대로 청군은 너무 많은 치중을 가지고 온 탓에 움직임이 느렸다. 또한 기병들 대다수가 보병들과 계획 없이 붙는 바람에 제대로 속력을 내지 못했다. 수만 청군은 홍이포와 영국 야포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 진군은커녕 점차 물러나고 있었다.청군 지휘관인 이부상서 탁은다가 총병과 방패를 앞세워서 진군하려 들자, 조선군은 직전에 팔기에게 하던대로 다시 전열 보병 사격을 시작한다. 청군은 물러났다가 후방의 독전으로 다시 다가오고, 조선군은 한열씩 물러나면서 사격했다. 양익을 포위한 청군에게 물러나기에 점차 조선군의 화망은 밀도가 높아졌고, 이제는 금려팔기가 방금 전처럼 돌격할 수도 없었다. 이에 금려팔기는 본영의 중포를 가져온다면서 사실상 공세를 포기한다.한편 중군은 오륵등의 금려팔기와 조선 기병들이 충돌했다. 훈련도감 대장 윤필덕의 지휘하에 금려팔기와 조선기병들이 화살을 교환하며 가까워졌다. 오륵등은 그 직후 조선군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한 마상 전투를 준비하나, 윤필덕은 영국군에게 빼앗은 총을 근거리에서 발사, 창칼을 꺼내던 금려팔기에게 기습을 가한다. 그리고 조선 국왕 이훤이 편곤을 휘두르며 돌격한다.[9]이훤은 괴력을 휘두르며 팔기를 휘저었고, 주변의 훈국 철기들도 왕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싸웠다. 팔기병들이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자, 오륵등이 화살을 쏴서 조선왕을 저격하려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김운행이 화살을 쏴서 저격하고 어지가 오륵등을 참살한다. 금려팔기는 지휘관의 사망과 조선군의 맹공으로 결국 무너진다.조선군이 눈에 보일만큼 다가오자, 건륭제는 전선의 보군을 불러들이고 수천의 호위들을 남겨서 조선군을 저지시키고 자신은 태자하를 따라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는 전선의 승패를 확정지었다. 이미 전장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버티던 구문제독 휘하 보군인 청나라군 4만명은 황제의 복귀 명령에 더해 도망치는 황제의 깃발을 보자마자 패배를 깨닫게 된다. 청군은 조금씩이라도 적과 가까워지던 직전과는 달리 멀어지기 시작했고 김성응은 후퇴 사격을 전진 사격으로 바꾸어 4만 청군을 몰아붙였다. 이에 당황한 청군 이부상서 탁은다는 망설이다가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서 2만은 조선을 막고 2만은 건륭제를 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모든 병력이 자신들이 황제를 구하러 간다면서 도망쳤다.
붕괴해가는 청군을 눈치챈 김성응은 전 조선군에게 전하께서 전리품을 하사하는 걸 아끼시겠냐면서 독려했고, 그러자 청나라 황제가 끌고 온 막대한 보물이 생각난 조선군은 용기가 충전, 전군이 창칼을 들고 청군을 돌파해 본영까지 휩쓸었다. 이로서 요양 전투는 조선군의 완승으로 끝난다.한편 건륭제를 추격하던 이훤의 조선 철기 7천여기는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김성응의 본군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서 전황의 즉각적인 판단이 어려워진 것이다. 김운행이 상태창으로 본군에 큰 변동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청군 4만여명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만일 보병 전투가 소강상태라면, 청군이 병력을 갈라서 압록강을 위협하면 곤란했다. 해당 지역에는 함경도처럼 따로 수비할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았다. 윤필덕은 이를 근거로 일단 물러나자고 하지만, 이훤은 건륭제를 요양 입성 전에 잡지 못하더라도, 북쪽의 심양성과 연계하는 건 막아야 한다며 추격을 계속한다. 몽골 호위 수백기가 조선군을 가로막았으나, 어지와 이훤을 막지 못했고 결국 무너졌다. 건륭제는 그렇게 번 시간으로 요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나절 후. 청나라 구문제독 휘하 보병을 완전히 정리한 김성응이 보병을 지휘해 합류했다. 건륭제는 포위당했고, 심양과의 교통도 차단당했다. 홍대용이 아라사군과 함께 심양과의 통로까지 차단했다.
감금당한 건륭제는 한고조의 고사를 본받아, 화신을 자신으로 위장하고 여자들까지 제물로 내보내고 자신은 따로 탈출하려 했다.[10] 그러나 이는 김운행에 의해 실패하지만 어쨌든 시간은 약간 벌어서 조선군은 두 개의 무리를 추적하게 된다. 못해도 수천에 달하는 북쪽 무리와, 겨우 수백인 남쪽 무리였다. 대부분 조선 지휘관은 군사 대부분이 모인 데다가 심양으로 향하는 북쪽 무리가 진짜라고 여겼지만 김운행은 상태창으로 남쪽이 진짜임을 눈치채고 추격한다.
병부상서 아리곤은 건륭제의 15남(생존자 중 칠남)인 영염을 데리고 심양에서 재정비해 직례로 돌아가면 죽거나 포로가 된 황제의 유조를 주장해 5명의 형들을 제치고 영염을 황제로 세우려 한다. 그러나 그 길에 심양을 정찰하던 카자크 기병대와 홍대용이 나타난다.
약 두달 전의 함경도. 육진에 갇힌 흑륭강 팔기와 길림 팔기 1만여는 겨우 열흘만에 붕괴했다. 이후 남해해영은 남명을 감시하러 빠졌으나, 함경 북병사 장지항에게는 병력이 남았다. 이에 이름을 떨치겠다는 야심에 불탄 장지항은 김이환을 만나 작전안을 수립한다. 바로 조선에 남은 철기를 모아서 비어버린 흑룡강과 길림, 동만주를 들이친다는 것이다. 김이환은 동만주가 비기는 했지만 함경도를 비웠다가 적이 들이치면[12] 안된다고 했으나, 장지항은 뒤를 받쳐줄 의병들이 있다면서 안심시키고 결국 김이환도 가세한다.
장지항이 믿는 의병은 평선관들이 만주의 이권을 노리고 모집했다. 함경도에선 2천 철기들이 모여 동만주로 진격한다. 주력군을 육진에서 상실한 동만주의 팔기 잔존병력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연파당했고, 두달 간 동만주를 정리한 2천 철기는 영염과 아리곤 일행이 지나는 곳, 사르후로 향했다.
결국 함경도군은 영염 일행을 발견, 워싱턴의 양이팔기 300명이 선두에 서서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리곤은 절망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이 전장을 목격한 심양성의 성경 부도통이 800명의 기마를 끌고 지원을 나온다. 이에 장지항은 남은 1500여 기마로 그들을 요격하면서 전투가 벌어진다. 청군은 필사적이었으나 지난 전투에서 정병을 빼가고 남은 심양성의 병력은 독기가 바짝 오른 장지항 휘하의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고 격파당한다.
게다가 전면의 조선군과 싸우던 영염 일행도 후방을 카자크 기병들이 들이친 것을 보게 된다. 홍대용도 황제 생포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고 멀리서 추적하다가 요격한 것. 황제의 일행에 여자들이 있다고 선동된 카자크인들이 미칠 듯이 용맹히 덤볐고, 유럽연합군 유일의 승리자가 될 기세를 놓칠 수 없던 워싱턴과 버니니아 민병대도 독하게 공격했다. 아리곤이 영염 하나라도 데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김이환이 추격해 붙잡으면서 결국 항복한다.
살아남은 건 심양성 부도통과 휘하의 병력 200기 뿐이었으나... 이들이 성을 비운 사이에 건륭제를 앞세운 김운행과 소수 조선군이 심양에 무혈 입성해 버렸다. 결국 그렇게 심양의 청군도 항복하거나 전사하고, 영염 일행도 붙잡히면서 조청 전쟁은 끝난다.
그리고 김운행은 만백성의 여론이 된 칭제건원을 반대하고 대국의 스승이 되자고 제안하며 조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다. 이는 사기가 천장을 돌파한 국민들과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건륭제에게 약을 먹여 협조적으로 만들려던 계획인 건륭제의 자결로 실패하면서 칭제건원을 했다간 다시 대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위기감이 급해진 대신들이 결국 인정한다.
[1] 각국 부관급은 제외하고 군사 지휘권자만 기재.[2] 장용영 대장[3] 남해해병통제사[4] 훈련대장[5] 함경북도 병마절도사[6] 이 시점에는 티베트와 외몽골 부족들, 러시아가 보낸 중앙 아시아 유목부족도 일부 붙어서 '서북 대 유목민 전쟁'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였다.[7] 천진의 영국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경부 주력이 이미 떠났다.[8] 병부 상서 아리곤 등은 강을 건너지 말고, 요양성의 잔존병력과 연락해 양동을 하자고 건의했으나 건륭제는 조선군 따위에 그렇게 심력과 시간을 소모할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사실 요동과 만주를 시급히 청나라의 권역으로 회복하려면 그렇게 시간을 끌면 안되는 것이 맞기는 했다.[9] 윤필덕은 비명을 질렀다...[10] 건륭제가 수천에서 만에 달하는 무리를 이끌기는 했으나, 이미 군사는 바닥이 나서 심양 입성전의 지연전에도 건륭제의 개인호위인 몽골군사가 나서야 했다.[11] 사실 심양은 아직 버티고 있기는 했다. 물론 심양에서 이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구해줄 확률은 없는거나 마찬가지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12] 당시는 요양 전투 이전이라 정말로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