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5 14:50:05

조예/죽기전혼란

1. 이전 상황

1.1. 근본 없는 후계자

조예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조방을 제왕, 조순을 진왕으로 삼아 자식처럼 기르기 시작했다.

1.2. 비서로 총애 받던 유방, 손자

이 시기에 황제가 만기를 친재하며 여러번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나 핵심적인 기밀 공작은 모두 두 사람에 의해 관장되었다. 매번 중대사가 있으면 조신들이 모여 상의하기는 했으나 늘 두사람이 시비를 판정하여 최종방안을 마련 한뒤 이를 건의해 실시토록 했다. [1]

비서역할을 하던 유방, 손자가 국사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다.

1.3. 대신들의 간언

조예의 사치가 심해지자, 고당륭 같은 대신들이 간언을 하였다. 여러 간언을 했지만 눈여겨볼만한 간언은
황초 연간에 하늘이 징조를 보여 경계했는데 이상한 새들이 집에서 생장하니 부리와 발톱, 가슴 등이 온통 붉었습니다. 이는 위나라에 중대한 재해가 있을 것임을 보이는 것이비낟. 응당 소장[2]에 있는 응양지신[3]를 방비해야합니다. 여러 친왕을 선발해 각자 봉국 내에서 군사를 양성해 친히 통솔케 한 뒤 이들을 각지로 보내 기치의 형세를 이룸으로써 황기를 진무하여 황실을 보호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4]
그러나 조예는 이런 황족 부흥책을 따르지 않았다. 이때 응양지신, 찬탈 야심을 가진 신하가 언급되는데, 직접 사마씨를 거론하지 않은 걸로 보아 아직 찬탈의 야심이 표면화되지 않았다고 해석 할 수 있다.

1.4. 조예와 사마의

황제가 사직을 걱정하며 진교에게 물었다.
"사마공[사마의]의 충정을 보면 사직을 지킬 신하라고 할 수 있겠소?"
진교가 대답하였다. “조정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으나 사직을 맡길 만한지는 모르겠습니다.” [6][7]
조예 역시 사마의에 대한 의심, 걱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장안에 있던 사마의를 불러들여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가 요동을 정벌케 했다. 논의하던 대신들 중 일부가 군사 4만 명은 너무 많고 군비를 대기도 어렵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황제가 말했다.
"4천리 밖의 적을 정벌하는 데는 설령 기병(奇)을 쓴다 해도 반드시 힘에 기대야 하는 만큼 소소하게 군비를 따져서는 안 되오."[8]
하지만 조예는 사마의를 믿어준다.
조정대신들이 군사들이 계속해 큰 장마비를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파(罷)병할 것을 건의해으나 황제가 반대하여 말했다.
"사마의는 곤경에 처하면 임기응변할 줄 아는 사람이오. 공손연을 산채로 잡을 날을 손가락을 꼽으며 가히 기대할 만하오."[9]

2. 조우의 집권

황제가 중병에 걸리자 연왕 조우[10]를 대장군으로 삼고, 영군장군 하후헌과 무위장군 조상[11], 둔기교위 조조[12], 효기장군 진랑 등에게 공동으로 국정을 보좌하게 했다. 황제는 어릴 때부터 연왕 조우와 매우 친해 후사를 그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일단 조예는 조우를 집권시킨다. 여기까진 확실하다.
하지만 이후의 기록은 궁권 은밀한 곳에 있는 사건인지라 여러 기록이 엇갈리며, 기록된 역사도 100% 신뢰할 수 없다.

3. 조우파 & 유방, 손자의 대결

이 대목에선 여러 기록끼리 상충된다. 일단 크게 자치통감의 기록을 먼저 본다면

3.1. 자치통감의 기록

(전략: 하후헌과 조조와 사이가 나쁜 유방과 손자가 조예를 이간질 하려는 계획을 세움)
연왕 조우는 성정이 공량해 대장군 직을 정중히 사양했다. 황제가 유방과 손자를 자신이 몸져 누워있는 내전으로 불러 물었다.
"연왕이 왜 사양하는 것으로 보오."
두 사람[13] 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연왕은 실로 이같은 대임을 맡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후사가 걱정이 되어 또 물었다. "누가 가히 중임을 맡을 만 하오."
당시 황제 옆에는 오직 조상 한 사람만이 있었따. 이에 유방과 손자가 조상을 추천하면서 덧붙여 말했다.
"마땅히 사마의를 불러 공동으로 참정케 해야합니다."
황제가 미심쩍어 하며 자문하듯 물었다.
"조상이 능히 이 일을 해낼 수 있겠소."
조상이 긴장하여 땀을 비오듯 흘리며 대답을 못했다. 유방이 곧바로 조상의 발을 밞고는 귀속말로 대답할 말을 가르쳐 주웠다.
"신이 죽음으로써 사직을 보호하겠습니다."
이에 황제가 유방과 손자의 건의에 따라 조상과 사마의에게 대임을 맡겼으나
이렇게 조우를 쫓아내고 조상과 사마의가 집권하려 했으나
중간에 변화가 생겨 칙명으로 전의 결정을 정지시켰다.

조예가 변심했다. 이렇게 죽기 직전의 조예는 조상과 사마의, 혹은 조우,하후헌 등 어느 쪽을 믿을지 고민하고 두려워했음을 추측할 수있다.
유방과 손자가 다시 황제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 이해득실을 설명하자 황제가 또 그들의 말을 따랐다. 뒤에 다시 유방이 황제를 찾아가 재촉하여 말했다.
"마땅히 친필로 써야 합니다."
황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너무 쇠약하여 붓을 잡을 수가 없소."
그러자 유방이 어탑 가까이 다가가서 황제의 손을 잡고 강제로 써내려 갔다. 이어 유방이 손에 조서를 들고 밖으로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연왕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게 하라는 조명이 내려졌소. 연왕 등은 궁중에 머물 수 없소."
조우 등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출궁 했다.
갑신일 드디어 조상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황제가 조상의 재주가 시원치 않은 것을 꺼려 다시 손례를 대장군장사로 삼아 조을 보좌케 했다.

강력한 권한을 누리던 위나라의 황제가 죽기직전 신하의 손에 따라 조서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조우가 대장군을 거절했다면 울면서 출궁했을 순 없다. 결국 죽기전 조예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손자, 유방에게 밀려버렸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실제 타 기록에선 조우와 손자,유방파의 대결을 보이는 기록이 있다.

3.2. 한진춘추의 기록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의 의식이 혼미해지자 조우는 조조와 상의하기 위해 궐 밖에 나갔고, 이때 조상만 황제 곁에 남게 되었다.
이때 유방이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조우가 조예의 궁녀를 희롱하고 병사를 데리고, 조신들을 궁궐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조예는 매우 화가나 조우 대신 조상과 사마의를 집권자를 임명하려 했다. 이때 조조가 다시 입궐해 울면서 조예를 설득했다. 조예는 다시 조상과 사마의를 임명하려던 명령을 취소했다. 하지만 조조는 다시 조예 곁을 떠났다. 다시 유방과 손자가 조예를 설득했고 조예의 손을 이용해 친필 조서를 작성해 옥새를 찍어 조우파를 면직시킨다. 그리하여 조우파는 울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즉 조우파와 유방, 손자는 병든 황제 옆에서 자파를 위해 설득했음을 알 수 있다.

3.3. 세어의 기록


자치통감, 한진춘추와 다른 기록 만 적자면

조조의 동생 조찬(纂)은 이때 대장군의 사마로 있었다. 천자는 더 이상 연왕 조우에 뜻을 두지 않았다. 때마침 조우와 함께 조조가 궁 밖으로 나가자 조찬이 형을 보고 놀라 말했다.
“주상이 몹시 불안한 상태인데 어찌하여 두 분이 함께 밖으로 나오십니까? 마땅히 궁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유방과 손자가 칙명을 내려 궁궐을 닫고, 조조 등을 못 들어오게 하고, 연왕 조우를 면직시켰다. 조조가 다음 날 아침
궁문에 이르렀으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조조는 일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두려운 생각이 든 조조는 제 발로 정위(延尉)를 찾아가 큰일을 처리하는데 잘못이 있었으므로 처벌해 달라고 했다. 하후헌은 아직 궁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조예를 찾아가 사태를 반전시켜 보려 하자 조예가 말했다. 황제는 하후헌에게,
“나는 벌써 사신을 보냈소. 나가시오”
라고 했다. 하후헌은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고, 그도 역시 면직되었다.

조우파가 마지막으로 반전을 위해 조예를 설득하려 했으나 궁문이 잠겨있었고, 하후헌은 조예를 만났으나 결국 거절당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4. 사마의의 귀환

낙양이 어찌됐던 공손연의 난을 진압한 사마의는 궐 밖에 있었다.
당시 사마의는 급현에 있었는데 황제가 급사 벽사에게 명하여 수조[14] 를 들고가 그를 부르게 했다. 이에 앞서 연왕 조우가 황제를 위한 계책[15] 으로 관중의 위급한 사정을 해소하기 위해 응당 사마의에게 소로를 이용해 지관 서쪾에서 장안으로 보 내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마의를 부르는 일이 이미 시행되어 사마의는 단시간 내에 서로 상반된 2개의 조서를 받게 되었다. 이에 사마의가 낙양에 변고가 있음을 직감하고 급히 말을 몰아 귀경했다. [16]

조우파와 유방,손자의 대결로 인해 사마의에겐 장안으로 가라는 명령서[17], 낙양으로 입궐하라는 명령서[by]를 동시에 받게 된다. 눈치 빠른 사마의는 낙양으로 달려간다.

5. 조예 사망과 조방 즉위

봄, 정월 사마의가 낙양에 도착해 입궁하여 황제를 조견하자 황제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후사를 군에게 부탁하고자 하니 군은 조상과 함께 나의 어린 아들을 보좌해 주길 바라오. 죽는 것은 가히 받아들일 수 있으나
나는 군을 기다리느라 죽지 않고 있었소. 이제 군을 보니 더 이상 유한이 없소."
이에 제왕[19]과 진왕[20]을 불러 사마의에게 보여준 뒤 따로 제왕 조방을 가르키며 사마의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이 애는 아직 어리니 군은 자세히 보아 두도록 하오. 착각하면 안되오."
이어 제왕을 불러 앞으로 나아가 사마의의 목을 껴안게 하자 사마의가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날 제왕을 황태자로 삼은 뒤 황제가 얼마 안되어 조했다.

이를 조예가 사마의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조우,유방,손자에 휘둘리면서, 사마의가 무서워졌고 정말 자기 자식을 부탁했다고 해석할 수 도있다.

6. 결론

조예는 친밀했던 조우를 결국 믿지 못했고, 조상과 사마의 역시 임명하려다 한번 취소했다 다시 임명했다. 황제로 훌륭하게 침략을 맞서던 조예가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은 안타깝기도하다. 그러나 조예는 결국 황족을 믿지 못했으며. 조상이 집권 한 후에도 조경(삼국지) 등이 황족 부흥책을 내나 조상을 듣지 않았고, 결국 조씨는 사마씨에게 실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1] 자치통감 삼국지[2] 문안의 작은 담[3] 찬탈야심을 가진 신하[4] 자치통감 삼국지[사마의] [6] 진교가 235년에 죽었기에 그 이전의 일이다.[7] 단 세어의 기록이라 신빙성은 다소 떨어진다.[8] 자치통감 삼국지[9] 자치통감 삼국지[10] 조조의 아들[11] 조진의 아들[12] 조휴의 아들[13] 유방과 손자[14] 친필 조서[15] 세어에 따르면 하후헌의 계책[16] 자치통감 삼국지[17] by 조우[by] 유방 & 조예[19] 조방[20] 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