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17:38:36

조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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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록3. 기타

1. 개요

조신선(曹神仙)
(?~?)

조선 후기 활동한 책쾌(책 판매상)로, 조생(曹生[1])이라고도 불렸다. 본명은 미상.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하였으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神光)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활동한 책쾌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평가받았다. 정약용, 조희룡, 조수삼 등 무려 세 명의 사대부 문인들이 조신선의 기이한 행적을 담은 글을 남길 정도. 조희룡, 조수삼은 조씨 집안이라 그랬을까 싶다만은, 정약용까지@@

정약용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이 1776년 직접 그를 보았을 때 사오십대로 보였는데 1800년에도 외모가 비슷해 보였으며, 1756년, 1820년에 그를 봤던 사람들도 모두 사오십대로 보였다고 했다고 한다. 이런 조신선에 대해 조희룡은 책쾌 노릇을 좋아해 평생 책과 함께 동거동락하다 보니 문자선(文字仙)의 경지에 이른 데 있지 않겠느냐며 그의 신비한 면모를 칭송했다.

책쾌 중에는 한양에서만 활동하던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국을 무대로 지방과 한양을 오가며 서적을 팔던 이들이 있었는데, 조신선은 한양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한양에서 그것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위해선 책을 옷소매에 잔뜩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게 상책이었다.『금계필담』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신선이 『강목(綱目)』 한 질帙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혹 그것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즉시 품속에서 꺼내 방안에 수북이 쌓아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잘 모를지언정, 책의 저자가 누구며, 주석을 단 이가 누구며, 몇 권 몇 책인지, 또한 문목(門目)과 의례(義例)에 관한 서지정보는 물론, 누가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얼마 동안 어떤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지까지 책의 이력을 환히 다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내 비록 책은 없지만, 아무개가 어떠어떠한 책을 몇 년 소장하고 있다가 그 중 어떤 책 일부를 나를 통해 팔았소. 그 때문에 책의 내용은 모르지만 어떤 책을 누가 지었으며, 누가 주석을 달았고, 몇 권 몇 책인지 까지 다 알 수 있다오. 그런즉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내 책이요, 세상에 책을 아는 사람도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오. 세상에 책이 없어진다면 나는 달리지 않을 것이요, 세상 사람이 책을 사지 않는다면 내가 날마다 마시고 취할 수도 없을 것이오. 이는 하늘이 세상의 책으로 나에게 명한 바이오. 그러니 나는 내 생애를 책으로 마칠까 하오.”
-유재건, 「조생」,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2. 기록

유만주의 일기 「흠영」은 물론, 정약용의 「조신선전」, 조수삼의 「죽서조생전」, 조희룡의 「조신선전」, 서유영이 쓴 「금계필담」,장지연의 「조생」과 강효석이 편집한 「대동기문」,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등 여러 문헌에서 거듭 조선 후기 최고의 책장수이자 북 마케터였던 조신선의 개인적 행적과 책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적어놓을 만큼 그의 명성은 자자했다.[2]
조신선(曺神仙)이라는 자는 책을 파는 아쾌(牙儈: 중간 상인)로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는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神光)이 있었다. 모든 구류(九流) · 백가(百家)의 서책에 대해 문목(門目)과 의례(義例)를 모르는 것이 없어, 술술 이야기하는 품이 마치 박아(博雅)한 군자와 같았다. 그러나 욕심이 많아, 고아나 과부의 집에 소장되어 있는 서책을 싼값에 사들여 팔 때는 배로 받았다. 그러므로 책을 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언짢게 생각하였다. 또 그는 주거를 숨겨서 어디에 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남산 옆 석가산동에 산다고 하나, 이 역시 분명치 않다.
건륭(乾隆: 청 고종의 연호) 병신년(정조 즉위년, 1776) 무렵 내가 서울에 와 있을 때 처음 조신선을 보았는데, 얼굴과 머리가 사오십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가경(嘉慶) 경신년(순조 즉위년, 1800)에도 그 모습은 조금도 늙지 않고 한결같이 병신년과 같았다. 근자에 어떤 사람이, 도광(道光: 청 선종의 연호) 경진년(순조 20, 1820) 무렵에도 역시 그랬다고 하였으나, 그때는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 옛날에 소릉(少陵) 이공(李公)이 말하기를, “건륭 병자년(1756, 영조 32) 무렵에 내가 처음 보았는데, 또한 사오십쯤 되어 보였다” 하였다. 앞뒤를 모두 계산해 보면 1백 살이 넘은 지 이미 오래니, 그 붉은 수염이 혹 무슨 이치가 있는 것 아닌가?
외사 씨는 논한다.
도가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을 신선이 되는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조신선은 욕심이 많으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늙지 않았으니, 혹 말세가 되어 신선도 시속(時俗)을 면할 수 없어서인가?
- 정약용, <조신선전>,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7권1
책쾌 조씨가 왔다. 『통감집람(通鑑輯覽)』과 『한위총서(漢魏叢書)』를 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명사(明史)』는 결국 선본(善本)이 없고, 『경산사강(瓊山史綱)』 역시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듣자니 『정씨전사(鄭氏全史)』는 춘방(春坊)에서 새로 구입했고, 『김씨전서(金氏全書)』는 일찍이 서각(徐閣)의 소유였는데 그것의 값이 모두 합해 사만 여 문이나 된다고 했다. 그 밖에 『절강서목(浙江書目)』을 구했다. 『합강(合綱)』을 내어서 보여 주며 돋보기를 대고 글자 모양과 크기를 들여다보니 마치 사정전(思政殿)의 각본(刻本) 같았다. 그래서 이와 같은 판본이면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잡기(雜記)·소설(小說)을 막론하고 한 책이든, 열 책이든, 백 책이든 구애받지 말고 다만 힘써 구해오기만 하라고 했다.
-유만주,『흠영』, 1784년 11월 9일자
내가 칠 팔 세 때에 글을 제법 엮을 줄 알았다. 선친께서 어느 날 조생에게 <당송팔가문> 한 질을 사주시면서 “이 사람은 책장수 조생이란다. 집에 소장한 책들은 모두 이 사람에게서 사들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의 모습은 사십 남짓 돼 보였다. 손꼽아 보니 벌써 사십년 전 일이다. 그런데 지금도 늙지 않았으니 조생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그때 나는 조생 보기를 좋아했고, 조생도 나를 사랑하여 자주 들렀다. 나는 이제 머리가 히끗히끗하고 손자를 안은 지도 벌서 여러 해가 되었다. 조생은 장대한 체구에 불그레함 뺨, 검은 눈동자에 검은 수염이 여전하다. 지난날의 조생과 견주어보니, 아! 기이하도다!
-조수삼 <추재집> 4책
조생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세상에 책을 팔러 뛰어다닌 지 오래라서,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를 보면 모두 조생인 줄 알았다.
-조수삼, ‘육서 조생전’, <추재집> 권8
鬻書自娛
책 파는 것을 스스로 즐기노니
文字仙一則
글신선이 되는 한 방법이라
-조희룡, <조신선전>, 조희룡전집 6

3. 기타

  • 그는 일단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익힌 뒤 고객이 서책 매매에 관심이 생기면 실제로 필요한 서책을 구해 와 첫 거래를 성공시킨 뒤 단골 고객으로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을 썼다. 이때 그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상대하던 고객은 주로 사대부 남성들이었다. 특히 장서가들이 조신선의 주요 고객이었다. 대를 이어 거래할 만큼 신용에 기초한 관계를 돈독히 유지해 나갔다.
  • 수백 명의 책쾌들이 체포되어 참수당하거나 유배당하고, 또는 노비로 전락하는 ‘명기집략(明紀輯略)’ 사건이 영조 대에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을 때도 조신선을 비롯한 책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잠시 피했다가 이내 다시 책을 들고 고객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특히나 불행을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었던 조신선의 예지력에 대해 사람들은 그를 가히 ‘신선(神仙)’이라 부를 만하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1] 생生은 이름이 아닌, 젊은 남성을 이르던 표현이다.[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