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烈
(222 ~ 281)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휴림(休林)으로 정혼의 셋째 아들.
사례 형양군 개봉현 사람으로 처음에는 상계연이 되었고 사례거기장군부에 벽소되어 영삭장군의 군사로 참여했다가 위령에 임명되었다.
어질게 교화하면서 엄숙하고 위엄있는 정치를 했고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사마소가 상국일 때 정사를 보는 것을 도왔다. 264년에 평완남에 봉해졌다가 265년에 진나라가 건국되자 기도위에 임명되고 아들 한 명은 관중후의 작위를 받았다.
빙익태수로 옮겼고 서방에서 이민족으로 인해 봉화를 울리자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조화시키는 정치를 펼쳤으며, 북군중후를 지내다가 분주자사(奔州刺史)[1]로 옮기면서 경거장군을 더했고 수도로 돌아와서 의랑이 되었다가 281년 가을 8월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우군장군에 추증하고 시호를 희(喜)로 했고 그의 비석은 283년에 세워졌다.
정혼의 아들들은 특이하게도 각기 다른 문헌에 기록이 흩어져 있는데, 정렬은 전진문에 남아있는 진우군장군정렬비에 기록이 남아있다.
[1] 이 당시에는 없는 주 이름이라서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