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성열(張星烈) |
생몰 | 1896년 1월 23일 ~ 1966년 8월 23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 |
사망지 | 경상북도 영덕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성열은 1896년 1월 23일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영해읍에서 김세영(金世榮)과 권태원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가 발발했다. 이때 그는 하루 전인 3월 17일 정규하로부터 참여 권유를 받고 이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3월 18일 오후 1시경, 장성열은 정규하, 남효직, 남계병 등 군중 3천 명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다. 이후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다.이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격분한 장성열은 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 행진해 평소 일제의 정책을 극찬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일본인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후 군중은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했다. 이때 영덕경찰서에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했다. 그러자 장성열은 군중과 함께 그들을 포위해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 세례를 가하면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 여관에 감금했다.
이때 병곡주재소에서는 인근 평해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군중이 병곡 주재소 앞에 다다르자,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했다. 이에 장성열은 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을 파기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 그곳 건물도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평해에서 응원 출동한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했다. 이후 일제가 대대적인 검속을 펼칠 때 체포되었고, 1919년 3월 30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6년 8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성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