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식 배경
일라오이의 탄탄한 체격은 굳건한 신앙심만큼이나 압도적이다. 대 크라켄 신의 여사제인 일라오이는 거대한 황금빛 성상으로 적들의 몸과 영혼을 분리해 상대를 엄청난 혼란에 빠뜨린다. 나가카보로스 신을 섬기는 '진리의 사도'에게 맞섰다가는 일라오이뿐만이 아닌 바다뱀 군도의 신을 함께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라오이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그 존재감에 압도당한다. 이 막강한 여사제는, 원하는 것은 손에 넣고 증오하는 것은 파괴하며 사랑하는 것은 모조리 만끽하는 그런 충실함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일라오이를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평생을 바쳐온 신앙을 빼 놓을 수 없다. 나가카보로스, 그녀가 모시는 신은 거대한 뱀의 머리를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촉수를 한없이 휘감으며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여왕 바다뱀, 대 크라켄 신, 심지어는 수염 달린 여신으로도 불리는 나가카보로스는 생명과 바다 폭풍, 움직임을 관장하는 바다뱀 군도의 신이다. (나가카보로스라는 이름은 직역하면 ‘바다와 하늘을 다스리는 무한한 괴물’이란 뜻이다.) 이 종교의 핵심 교리는 세 가지로, ‘모든 혼은 우주를 섬기기 위해 태어났다’가 그 첫 번째요, ‘욕망은 우주가 모든 생에 새겨놓은 것이다’가 그 두 번째,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욕망을 좇을 때 우주가 비로소 그 운명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마지막 세 번째이다. 하급 여사제는 신전을 관리하고 신성한 뱀을 부르며 사람들에게 나가카보로스의 가르침을 설파한다. 그들과 달리 일라오이는 진리의 사도로써, 우주의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며 직접 신을 섬긴다. 그녀는 이 사명을 위해 두 가지 신성한 임무를 맡고 있다. 진리의 사도가 받든 첫 번째 임무는 바로 언데드와의 전쟁에서 선봉에 나서는 것. 우주의 자연스런 흐름에서 벗어난 언데드는 나가카보로스에 반하는 가증스러운 무리이다. 나가카보로스의 여사제라면 누구나 해로윙 때 토착민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그 중에서도 진리의 사도는 가장 강력한 악령들과 직접 맞서 싸우고 검은 안개를 물리쳐야 한다. 두 번째 임무는 잠재력이 뛰어난 인간들을 찾아내 나가카보로스의 시험에 들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사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직무다. 일라오이는 거대하고 신성한 고대 유물인 ‘신의 눈’을 휘둘러서 상대의 혼을 육신에서 떼어내고, 벌거벗은 혼 그대로 자신을 대면하게 하여 그 인물의 진가를 밝혀낸다. 대 크라켄 신은 겁쟁이와 의심하는 자, 억지로 참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므로 진가를 나타내지 못한 자는 완전한 파멸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일라오이가 파괴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시험에서 살아남은 자는 영원한 변화를 겪으며 진실된 운명을 추구할 의지를 얻기도 한다.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진리의 사도로 존경받는 일라오이. 오랫동안 내려온 교단의 전통을 깼던 일화를 보면 그녀를 알 수 있다. 진리의 사도가 되기 위한 훈련을 완수하고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부흐루의 황금 신전을 떠나서 불결하고 빈궁한 빌지워터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바다뱀 군도에서 외지인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그 해적 도시뿐이다. 교단의 신도들은 하나같이 빌지워터를 악취가 진동하는 시궁창으로 여겼다. 다른 진리의 사도들은 빌지워터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그곳을 찾는 외지인들을 불가촉천민으로 여겼다. 그러나 일라오이는 이런 관습을 깨고 해로윙 때 빌지워터 주민들을 지켰으며, 심지어 빌지워터 출신인 자에게 영혼의 시험을 치르게까지 했다. 여전히 빌지워터에 문을 연 신전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본토 출신 이방인도 거의 없다. 그렇다 해도 빌지워터에 여왕 바다뱀에 대한 믿음을 널리 퍼트린 건 일라오이이고, 그녀의 굴하지 않는 열정 덕에 주민들도 나가카보로스 신앙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때 빌지워터에서 가장 악명 높고 잔악했던 해적이 이 거구의 여사제에게 실연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직접 그녀를 만나 본 사람이라면 과연 그랬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거친 행동 뒤에는 섬세한 지성과 힘, 그리고 사람을 끌어 당기는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빌지워터 사람 대부분이 일라오이를 환영하며 은총을 구하지만, 모두들 한편으로는 이 크라켄의 예언자가 행하는 시험을 두려워하고 있다. "멈춤이란 없으리. 우리가 곧 움직임일지니." —나가카보로스의 20가지 지혜 |
2. 부담
“진리의 사도여. 부흐루로 퇴각해야만 하오. 육지 출신들은 구할 수 없지 않소?” 대사제가 말했다. 건장한 체격의 이 여사제는 빌지워터를 떠날 생각에 흡족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듯했다. “똑같은 소리 좀 그만 하시게.” 일라오이는 방 한가운데 자리잡은 돌탁자 주변을 걸어 다니다 하품을 쫓으려는 듯 어깨를 돌려 근육을 풀었다. 대사제 옆에는 밧줄로 만든 제의를 입은 나이든 바다뱀 몰이꾼이 서있었다. 쪽빛으로 물들인 밧줄 하나하나가 구불구불하게 엮여 있었다. 제각각인 두께와 빛 바랜 크라켄 먹물 때문에 엉성하게 베어낸 촉수 더미를 걸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일 정도였다. 노인의 얼굴은 검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바다 괴물의 입속에 끝없이 돋아난 이빨을 나타낸 듯했다. 수도승과 바다뱀 몰이꾼은 항상 무서워 보이려 한다. 참으로 거슬리는 짓이었다. “가장 강력한 괴물들은 빌지워터로 오지 않을 겁니다.” 바다뱀 몰이꾼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큰 놈들은 학살의 부두에서 나오는 악취가 닿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 틀어박혀 있죠. 고작해야 굶주린 새끼 몇 마리만 부름에 응할 겁니다.” 나가카보로스를 섬기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이들만이 안개를 몰아내고 해로윙으로부터 빌지워터를 지킬 수 있다. 바다뱀 군도의 다른 곳은 별 문제가 없다. 역시나 빌지워터 사람들이 무지한 탓이다. 육지 출신들과 그 후손들은 민물이 마음껏 흘러 부두를 정화할 공간을 주지 않았다. 외지인들이 닻을 내리고 완전히 자리를 잡자 비어 있는 해안가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어리석은 자들. 사제들 대부분은 육지 녀석들이 사실은 검은 안개에 당하길 바란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젠장할.” 일라오이가 외쳤다. 여기 남으려면 바다뱀의 도움 없이 빌지워터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일라오이는 주변에 놓인 공물 그릇에서 먹을 것을 찾아 깨지락대다가 망고를 집어 들었다. 계획이 필요했다. 눈앞의 멍청이 둘은 도저히 쓸모가 없었다. 한참 생각에 잠기는 데 갑자기 우지끈 큰 소리가 났다. 아래층에서 육중한 나무문이 쾅 하고 열린 것이었다. 갱플랭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어라 하는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돌 벽에 부딪혀 메아리 쳤다. “그대가 지시한 대로 바다에서 건져 왔소.” 대사제가 자신의 역할을 나타내는 옥빛 옷깃을 바로잡으며 미소 지었다. “저자의 에너지가 나가카보로스님께 돌아가도록 두는 게 나았을는지 모르겠지만.” “영혼을 심판하는 건 자네 소관이 아니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진리의 사도님. 그건 물론 나가카보로스님의 일이지요.” 몰이꾼의 대답 속에 뼈가 있었다. 일라오이가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난쟁이마냥 작아진 듯했다. 일라오이는 섬사람 치고도 큰 편이었다. 살아오며 그녀의 키를 넘는 이는 보지 못했다. 가장 큰 프렐요드인보다도 컸다. 어릴 적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추장스런 존재라고 생각해 항상 남의 눈치를 봤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움직일 때 거치적거리는 건 바로 다른 이들이라고. 일라오이는 신의 눈을 받침대에서 들어 올렸다. 황금 성상은 와인통보다 크고 몇 배는 더 무거웠다. 차가운 금속에 닿은 손가락이 아렸다. 옆에는 거대한 장작불이 온 방을 밝히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신의 눈은 언제나 차갑고 눅눅한 느낌이었다. 일라오이는 무거운 성상을 능숙하게 어깨에 짊어졌다. 10여 년 넘게 성상에서 두 발짝 이상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난 내 의무를 잊지 않고 있다.” 일라오이는 층계를 내려가며 말했다. “부흐루로 퇴각하지 않을 것이야. 여기서 해로윙을 막겠다.” 대사제는 부흐루를 떠나 여기로 온 후로 줄곧 불평만 하고 있지만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갱플랭크의 해적선이 폭발했을 때 일라오이의 가슴은 쿵 내려 앉는 듯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한 지, 그리고 관계를 끝내버린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때는 그래도 그 멍청하고 늙어빠진 녀석을 사랑했었다. 높고 촘촘한 돌 벽에 둘러싸인 신전 뜰은 이빨 돋은 바다 괴물의 입속 같았다. 신전 입구는 저 멀리 아래의 푸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었다. 일라오이는 계단을 쿵쿵거리며 내려가 앞문으로 향했다. 갱플랭크의 주둥이를 한 대 내리칠 참이었다. 항상 오만하고 럼주에 절어 있는 인간. 그래도 그 얼굴을 볼 수 있단 건 좋았다. 하지만 씩씩대며 입구에 서있는 녀석의 모습은 그녀가 알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부상을 입었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갱플랭크는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등을 구부리고 서있었다. 잘려 나간 한쪽 팔을 감싼 채였다. 그는 반쯤 미쳐 남은 한 손에는 권총을 쥐고 휘두르며 주위의 수도승들과 여사제들을 쫓아내려 했다. 겨우 몇 시간 전에 자신을 바닷속에서 꺼내준 이들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권총은 비어 있어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일라오이는 어디 있나?” 갱플랭크가 외쳤다. “난 여기 있다, 갱플랭크.” 일라오이가 대답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갱플랭크가 무릎을 꿇고 주저 않았다. “미스 포츈 짓이야. 분명 그 녀석 짓일 거야. 뒷골목 쥐새끼 둘이랑 작당해서 침몰시킨 거라고.” “네 배야 어찌되었건 내 알 바 아니다.” “항상 떠나라고, 바다로 돌아가라고 말했잖아. 난 배가 필요해.” “나룻배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여긴 내 구역 이라고!” 갱플랭크가 소리 질렀다. 갱플랭크를 둘러싼 사제들이 발끈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도시보다 수천 년은 오래된, 위험하기까지 한 이곳에서 그런 소리를 뱉을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었다. 다른 육지 출신 인간이 신성하기 그지 없는 진리의 사도에게 그것도 그 신전 안에서 이렇게 큰 소리를 냈더라면 양 무릎이 부러진 채로 바다에 처박혔을 것이다. “여긴 내 구역이야!” 녀석이 다시 외쳤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침까지 튀었다. “그럼 너는 뭘 할건가?” 일라오이가 물었다. “나, 난 오카오와 다른 부족장 녀석들의 힘이 필요하다. 당신 말이라면 녀석들도 따르겠지. 녀석들에게 말해주면 날 도와줄 거다.” 갱플랭크는 일라오이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너는 뭘 할건가?” 이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나?” 갱플랭크는 무기력하게 말했다. “미스 포츈이 내 배를 침몰시키고 내 부하들도 모조리 죽인 것도 모자라 내 팔까지 이렇게 만들었어. 내게 남은 거라곤… 예전에 여기 자주 오곤 했었지.” “자리 좀 피해 주게.” 사제들에게 말하며 일라오이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갱플랭크를 내려다 보았다.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 전이었다. 술과 고뇌가 그 늠름하던 모습을 다 앗아갔다. “내게 이제 남은 거라곤 이 도시 밖엔 없다.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눈이 마주치자 갱플랭크의 목소리가 잦아 들었다. 일라오이는 크라켄마냥 엄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갱플랭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나가카보로스의 여사제는 동정심을 보여서는 안 됐다. 속으로는 가슴이 찢어지더라도. 절망에 빠진 늙은 해적 선장이 눈길을 피했다. “그렇게 할 순 있네. 내 말 한 마디면 부족과 오카오의 무리도 곧바로 도와줄 걸세.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망할, 좀 도와줘! 나한테 빚진 게 있잖아.”갱플랭크는 아이처럼 발끈했다. “내가 빚을 졌다고?” “의식도 따르고 제물도 바쳤다고.” 갱플랭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전혀 가르침은 받아 들이지 못한 것 같은데? 의식? 제물? 그건 나약해 빠진 인간들이 보잘것없는 잡신을 모실 때나 하는 소리지. 나의 신께선 행동을 원하신다.” “나는 이곳을 위해 고통 받고 피를 흘렸다. 여긴 당연히 내 도시야!” 일라오이는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갱플랭크가 입을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배가 침몰하기 수년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간 갱플랭크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아버지의 폭력이 남긴 증오심과 자기 연민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고 곪고 있었다. 일라오이는 자신의 책무를 외면했다. 한때이지만 그를 사랑했기에 외면한 것이었다. 그를 잘못된 길로 밀어 넣은 건 그를 떠난 자신이었기에 그리했다. 그저 살인자, 골수 해적으로 만족하며 살던 갱플랭크는, 해적왕이라는 아버지의 이름에는 전혀 관심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헤어진 후 갱플랭크는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더니 빌지워터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았다. 일라오이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느꼈다. 그의 전성기는 이미 끝났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 나가카보로스의 시험을 치른다면 살아 남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지금 그것을 위해 여기 있는 거였다. 일라오이는 눈 앞의 늙은 해적을 바라보았다. 그냥 보내야 할까? 약간이나마 힘이나 야망이 남아있어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보내버리면 적어도 살아 남을 수는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나가카보로스의 방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진리의 사도의 사명에도 어긋났다. 의구심을 가지거나 과거를 곱씹어볼 때도 아니었다. 신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자신의 직감도 믿어야만 한다. 갱플랭크가 시험을 받아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게 바로 신의 뜻이었다. 고작 사내 하나가 신에 비할 대상이나 되는가?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일라오이는 어깨에서 그 무거운 황금 성상을 끌어 내렸다. 어깨가 다시 가벼워졌지만 어째선지 여전히 그 무게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제발.” 갱플랭크가 간청했다. “적어도 인정은 베풀어 주게.” “너에게 진실을 보여 주겠다.” 일라오이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1] 한 발로 갱플랭크를 걷어 찼다. 발꿈치가 그의 코를 강타하면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주정뱅이마냥 뒤로 나가떨어졌다. 입술에서 피가 솟아 나왔다. 갱플랭크는 몸을 뒤집더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일라오이를 올려다 봤다. “보아라!” 일라오이가 읊조렸다. 마음 속에서 대모신의 에너지를 부르며 일라오이는 거대한 성상을 앞으로 휘둘렀다. 성상의 입에서 반짝이는 안개가 쏟아져 나왔고 대모신의 얼굴 주위로 청록빛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투명한 촉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금빛이 어른거리는 촉수는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만큼이나 아름답고 해저 가장 어두운 곳의 추악한 그 무엇만큼이나 끔찍했다. 성상에서 더 많은 촉수가 자라 나오자 어떤 알 수 없는 섭리를 따르는 듯 주변에서도 촉수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촉수가 자라나는 모습이 마치 세상의 모든 희망과 공포를 나타내는 듯 했다. “안 돼!” 갱플랭크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촉수의 회오리는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그를 집어 삼켰다. “나가카보로스 님을 맞이하라!” 일라오이가 외쳤다. “네 자신의 가치를 보여라!” 촉수가 갱플랭크를 움켜쥐더니 가슴속으로 찌르고 들었다.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는 환영에 둘러싸인 갱플랭크는 몸서리쳤다. 육신에서 영혼이 떨어져 나가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일라오이의 눈 앞에 그의 영혼이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영혼은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파랑으로 타올랐고 몸은 과거를 비추며 흔들렸다. 촉수 무리가 부상 입은 갱플랭크를 덮치려 했다. 그는 몸을 굴리고 비틀비틀 움직이며 최대한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하나를 피하면 더 나타났다.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더니 빙빙 돌기 시작했다. 촉수 무리가 그를 때리고 내리누르고 잡아당겨 점점 영혼과는 먼 곳으로, 망각의 길로 끌어 당겼다. 일라오이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눈을 멀리 돌리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훌륭한 사내였지만 실패했다. 이것은 우주가 원하는… 그때 갱플랭크가 일어섰다. 천천히, 하지만 거침없이 그는 다 부서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촉수 무리에서 빠져 나오더니 어렵게 한 걸음씩 떼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피에 젖고 지친 모습으로 그는 마침내 일라오이 앞에 섰다. 두 눈은 증오와 고통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지만 결심도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그는 빛나는 영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바람이 멈추었다. 촉수는 빛을 내며 산산이 흩어졌다. 나가카보로스가 만족한 것이다. “움직일 줄 아는군.” 일라오이가 미소 지었다. 갱플랭크는 옛 연인을 코 앞에 서서 쏘아보았다. 등은 구부러져 있었지만 가슴 속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다시 위대한 선장으로 우뚝 선 것이다. 갱플랭크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여전히 만신창이에 절뚝거리고 있었지만 예전의 기개가 보이는 걸음이었다. “내가 다음에 도와달라고 하거든 그냥 싫다고 말해.” 그는 씩씩거렸다. “팔은 좀 어떻게 해봐.” “오랜만에 봐서 좋았어.” 그가 신전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는 저 아래 바다를 향해 길고 긴 계단을 걸어내려 갔다. “멍청한 영감탱이.” 일라오이가 웃었다. 수도승과 대사제가 전실로 돌아오자 일라오이는 할 일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걸 기억해 냈다. 져야 할 소소한 짐이 넘쳐났다. 사라 포츈을 만나야 했다. 곧 나가카보로스가 미스 포츈도 시험하려 하리라. “오카오와 부족장들에게 갱플랭크를 도우라고 전하게.” 일라오이가 대사제에게 말했다. “다시 도시를 손에 넣게 도와주라고.” “빌지워터는 혼란에 빠져 있고 수많은 이가 그의 목을 노리고 있소. 하룻밤도 못 버틸 거요.” 대사제는 계단을 애쓰며 내려가는 갱플랭크를 보고 투덜댔다. “하지만 그 일에 적격인 자요.” 일라오이는 신의 눈을 어깨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올바른 건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우리가 언제 죽을지는 절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주가 우리에게 욕망과 본능을 주었으니, 우리는 이를 믿어야만 한다. 그녀는 성상을 어깨에 얹은 채로 뜰에서 신전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일라오이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
스토리 출처 : http://gameinfo.leagueoflegends.co.kr/ko/game-info/champions/illaoi/
갱플랭크는 폭발에 의해 팔을 잃은 직후 일라오이에게 구해졌다. 불타는 파도에서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 장면은 일라오이의 시험을 통과한 이후로 신전을 떠난 직후 팔을 치료하기 위해 방문한 것으로 보여진다.
[1] 시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