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0 15:56:09

이발(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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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이발.jpg
이명 이승교(李承橋), 이발(李撥)
출생 1851년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면 대성리
사망 1928년 4월 20일 (향년 77세)
블라디보스토크
본관 하빈 이씨
가족 아들 이동휘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5년)

1. 개요2. 생애
2.1. 사망
3. 대중매체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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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 독립 만세!"
이발의 유서의 내용
한국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아버지이다.

2. 생애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면 대성리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51년생으로 보인다. 이명으로 이승교와 한자가 다른 이발(李撥)을 사용하였다.

1910년 국권을 일본에게 온전히 빼앗기자 비분강개하면서 일제의 지배를 거부하고 가족들과 함께 중국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9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후 민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고민하였다.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이 국외로 확산되어, 그 해 3월 17일 거주하는 신한촌에서도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운동의 열기가 남아있던 3월 26일 대한국민의회 의원인 김치보가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평소 뜻을 나누던 여러 사람들과 모여 만세운동에 있어 우리가 뒷방 신세로 머물러선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청년 자제들이 모두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늙은이라고 이 일을 할 수 없으랴’라는 생각으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이 창설되자 그 즉시 조직에 가입하였다.

독립운동 최전선에 나선 청년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회원의 나이를 46~70세까지로 제한한 것이 특징이었다. 단장 김치보, 총무 김순약, 의장 이일, 서기 서상구 등이 선임되어 집행부가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전단위원을 선발하여 각 지역에 파견함으로써 단원 모집에 힘썼다. 동지 규합과 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던 노인단은 후방에서 청년들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직접적인 행동에도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노인단은 침체되어 가는 만세운동의 열기를 살려냄으로써 다시 한번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사람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나는 지금 칠십이 가까운 노인으로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조선에 나가 다시 한 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선포문을 대중 속에 알리겠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지원하였다.

1919년 5월 5일 정치윤, 윤여옥, 안태순 등 단원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5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오전 11시경 종로 보신각 앞에서 군중 연설을 마친 뒤 가슴에 숨겨 둔 태극기를 꺼내어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때 “의(義)로서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일제 경찰이 말려 실패하였다. 연로한 까닭으로 처벌을 면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강제 추방되었다.

이후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회 주최로 독립선언 기념축하식이 개최되었을 때 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는 등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히기도 하였다.

2.1. 사망

1928년 4월 20일 블라디보스톡에서 77세의 나이로 아들 이동휘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망시 대한독립만세를 유서로 남겼으며, 이 유서는 선봉신문 1928년 5월 6일자에 게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대중매체

4.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