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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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반 4세는 우리가 아는 폭군들 중에서도 매우 잔인한 사람이라 친정 이전에 귀족들에게 당한 복수를 하고자하는 것이나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도 죽였고 또한 반역혐의를 뒤집에 씌워 죽인 적도 있었으며 이유도 없이 귀족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가 41년간 친정하면서 죽인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아래와 같다.- 이하의 명단은 단순히 러시아 위키백과에서 나온 내용이므로 이보다 공식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피해자는 더 많을 수도 있다. 또한 다수 인물들이 일으킨 반역에 대한 혐의는 사실 여부 판명이 대부분 불분명하다. 또한 사서에 따라 이반 4세가 죽였는지 아닌지 판명이 갈리는 사람은 제외되었다.
2. 결혼 이전 ~ 아나스타샤 황후(1543 ~ 1560)
이반 4세가 친정을 시작한 이후의 숙청목록. 놀랍게도 이반 4세는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와 결혼한 이후 거의 귀족들을 죽이지 않았다.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슈이스키(? ~ 1543)
보리스 고두노프의 측근이자 후에 차르가 되는 바실리 슈이스키의 할아버지로써 이반 4세를 지독하게도 괴롭힌 슈이스키 가문 사람들 중 한 사람. 어린 이반 4세를 굶기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고 잠을 못자게 방해하기도 했었다. 그는 이반 4세의 사촌 형이었던 이반 벨스키를 몰아내고 모스크바 총대주교였던 다니엘과 요셉을 차례로 자기네들 말 안듣는다고 추방해버리기도 했다. 한 때는 다니엘 총대주교에 의해 육촌형제인 이반 슈이스키가 모스크바에서 추방되자 유일하게 권력을 잡아 보야르의 대표가 되었지만 이후 이반 4세가 친정을 시작하자 개에게 물어뜯겨 죽임을 당했다. 일설에 따르면 개에게 처참히 죽은 후에도 2시간 동안 나체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표도르 세묘뇨비치 보론초프(? ~ 1546)
이반 4세 초기의 또다른 권신. 위의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물론이고 슈이스키 가문과 대립하였다. 이반 4세가 슈이스키 가문을 완전히 숙청하자 슈이스키 가문 대신 보야르의 수장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반 4세의 친정을 막으며 본인이 권력을 휘둘렀다. 다행히도 새로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된 마키리우스가 선동해 보론초프를 추방했고 이윽고 바실리 3세의 4촌동생인 이바노비치 쿠벤스키 왕자와 반역을 꾀하였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다.
이반 이바노비치 쿠벤스키(? ~ 1546)
바실리 3세의 사촌. 그러니까 이반 4세에게는 5촌 아저씨가 된다. 그는 이반 벨스키가 추방 될 당시에 슈이스키 가문에 동조하였는데 그런 이유로 권력을 휘둘렀고 보론초프와 사이 좋게 죽임을 당했다.
3. 아나스타샤 황후 사후 ~ 죽기 직전(1560 ~ 1584)
그러나 이반 4세는 사랑하는 아내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가 죽자마자 다시끔 폭정을 휘둘러 많은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나름대로 합당해보이는 처형이 주류였지만 귀족들이 아내를 암살했다는 편집증에 시달려 슬슬 별 이유 없이 사람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건드리지도 않았던 고위성직자[1]도 처단대상에 포함 되었다.다닐 표도르비치 아다세프(? ~ 1561)
크림 전쟁과 리보니아 전쟁 초기에 참여한 귀족. 크는 크림 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운 것으로 유명했는데 리보니아 전쟁 초기에 공을 세웠음에도 분노한 이반 4세에 의해 동생 및 12살 된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미하일 페트로비치 레프닌(? ~ 1564)
리보니아 전쟁에 참가한 귀족. 이반 4세의 첫 결혼 당시 서약서에 서명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써 1559년에 보야르가 되었다. 1564년에 이반 4세는 그를 숙청하고자 가짜 연회를 열어 그를 초대했는데 이반 4세가 스스로 가면을 쓰고 익살스럽게 놀자 그 가면을 뺏어 찟어발기고는 재미있냐고 조롱했는데 며칠 뒤 예배를 드리러 성당으로 가는 길에 암살당했다. 정황상 이반 4세가 보낸 사람들의 짓임이 분명하다.
니키타 바실리예비치 셰레메테프(? ~ 1564)
1547년에 카잔 칸국을 침공하는 것 부터 사서에 나오는 그는 1555년에 스웨덴과의 전쟁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그는 1564년에 이유도 없이 처형되었는데 스웨덴 작가 피터 데 에를레순다의 전기에 따르면 이반 4세는그를 죽인 뒤 팔과 다리를 잘라 고운 천에 싼 뒤에 셰레메테프의 아내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알렉산더 보리소비치 고르바티-슈이스키(? ~ 1565)
이반 4세 때의 신하. 이반 4세가 친정을 시작한 이후 사서에 등장하기고 방계 슈이스키이기도 해서 슈이스키 가문의 횡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1565년에 왕비(차리차)와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음모에 휘말려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참고로 그의 딸이 이반 4세의 처남이었던 니키타 로마노비치와 결혼했다고 한다.
표토르 페트로비치 골로빈(? ~ 1565)
카잔 전쟁에 참여했던 골로빈 가문의 당주. 카잔 전쟁 이후인 1554년에 푸티빈의 총독이 된 골로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리보니아 전쟁에 개입해 참여하였다. 골로빈은 1565년에 가문 전체가 이반 4세를 대상으로 반역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가문 전체 사람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시몬 바실리예비치 로스토프스키(? ~ 1565)
갈리치의 초대 총독을 지낸 사람으로 이반 4세가 즉위 초 병에 시달렸을 때 그가 죽기를 바라며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 왕자를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리투아니아에서 온 사신단에게 이야기를 흘려 들키는 바람에 재판정에 섰고 이 때 그는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마카리우스 대주교의 요청으로 추방으로 감면되어 겨우 살았다. 그는 이후 니즈니 노보고로드의 주지사가 되어 복귀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체보크사리로 추방될 것을 명령 받았다. 그는 오프리치니크가 창설 된 초기에 이반 4세의 명령으로 살해당한 경우인데 40명의 하인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모스크바로 압송되던 도중 오프리치니크에게 살해당했다. 오프리치니크들은 그의 시체는 버려버리고 머리만 상자에 담아 이반 4세에게 바쳤는데 이반 4세는 그의 머리를 보고 죽음을 숭고하게 조롱하며 "오. 당신은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피를 흘리셨군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표토르 미하일로비치 쉬첸테야프(? ~ 1568)
원래는 이반 벨스키를 비롯한 반 슈이스키 가문의 보야르였다. 그는 슈이스키 가문의 조작된 반역혐의로 인해 추방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카잔과의 전쟁이나 크림 칸국과의 전쟁 등 여러 곳에서 활약하였지만 1568년에 자신이 너무 세운 공적이 커 이반 4세에게 제거 될 것이 두려웠던 나머지 스스로 은퇴하여 피멘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으나 이반 4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아내,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비로드코프(1508 ~ 1568)
이반 4세 초기에 노가이 칸국에 사절로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여려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카잔 정복이나 리보니아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1568년에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오프리치니크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아들과 딸, 손자, 손녀, 심지어는 막 태어난 증손자들까지 17명의 식구들이 집단적으로 살해되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 트로쿠로프(? ~ 1568)
툴라의 사령관을 지낸 귀족. 다른이와 마찬가지로 카잔 정복과 리보니아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1565년에 이반 4세의 신임을 잃고 카잔으로 쫒겨나 피신하였다가 자신이 가진 영지와 마을을 수도원에 바치는 등 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이반 4세의 명령으로 오프리치니크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시몬 바실리예비치 야코블레프(? ~ 1568/1569)
이반 4세의 첫번째 차리차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의 육촌형제. 카잔 전쟁에 참여했고 칼루가, 카시라 등의 총독을 지냈다. 크림 칸국 전쟁 이후 1558년 즈음에 보야르가 된 그는 폴로츠크의 총독을 거쳐 1565년에 카시라 총독이 되었다. 그는 1568년에 지방 총독 생활을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와 수도 경비 연대장을 맡았는데 그 즈음이나 이듬해 반역혐의를 받았고 이반 4세의 명령을 받은 오프리치니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블라디미르 안드레비치 스타리츠키(1533~1569)
이 사람은 이반 4세의 친사촌형제이다. 아버지인 안드레이 왕자가 어린 이반 4세와 모스크바 대공자리를 두고 유력하게 다투기도 했고 결국 그의 아버지가 이반 4세의 어머니인 엘리나 글린스카야에게 숙청당했기에 그는 삶 내내 이반 4세에게 감시를 당해야만 했고 1563년에 이미 큰 반역 사건에 연류되어 겨우 용서를 받았지만 죽을 때 까지 감시를 당하였다. 결국 스타리츠키를 위험하다고 여긴 이반 4세는 말류타 스쿠라토프를 시켜 그를 끌고오게 한 뒤에 억지로 독약을 먹여 죽였다. 당시 그의 어머니와 아내, 9살 된 딸과 6살 된 아들, 그리고 태어난지 몇개월 아니된 막내아들 모두 살해당했다. 한 때는 이바노비치 황태자가 죽으면 그 대신 이반 4세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결정된 바도 있었지만 형식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프로시냐 안드레예브나 스타리츠카야(1516 ~ 1569)
위에 언급된 블라디미르 왕자의 어머니. 즉, 이반 4세의 숙모가 된다. 아들이 독약을 먹고 죽자 며느리와 함께 이반 4세의 명령으로 강에 던져져 익사하였다.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립(1507~1569)
러시아의 총대주교 자리가 들어서기 전 까지 러시아 최고위 성직자였던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된 사람. 오프리치니크의 창설을 젬스키 소보로에서 대놓고 반대하며 이반 4세에게 맞섰는데 당시 이반 4세는 필립에게 닥치라는 험한 말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처참하게 쫓겨나 일개 수도자로 밀려났는데 이반 4세는 말류타 스쿠라토프를 시켜 죽였다. 이반 4세의 명령을 받은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그가 추방 된 트베리의 오트로흐 승천 수도원으로 가 그를 조롱하며 배게로 목졸라 죽였다고 한다.
표토르 세미노비치 세레브리아니-오볼렌스키(? ~ 1570)
대 카잔 전쟁에 참여한 귀족 중 한 명이다. 그는 카잔이 굴복한 이후에 터키 전쟁에 투입되었는데 이후 노보고로드와 프스코프를 폴란드에 넘기려고 했다는 의혹을 받아 이반 4세에게 살해당했다.
바실리 드미트리예비치 다닐로프(? ~ 1570)
카잔 전쟁에 참여했고 모스크바에 크림 칸국이 침공했을때도 참전해 막아냈다. 그는 1564년에 보야르가 되었고 1566년에 젬스키 소보르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1570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이반 4세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정황상 노보고로드 대학살에 휘말려 죽임을 당한 것 같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비스코바토프(? ~ 1570)
귀족들의 회의인 두마에서 서기직으로 일을 시작한 비스코바토프는 1554년에 시몬 로스토프스키가 블라디미르 왕자를 추대하려던 일을 조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리보니아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는 덴마크에 잠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덴마크가 참전하는 것을 막는 외교활동을 벌였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노보고로드 대학살 당시에 이반 4세가 여러 문서들을 찾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폴란드 왕에게 노보고로드를 바치려고 한 점과 아스트라한 칸국과 카잔 칸국의 옛 영토를 크림 칸국에게 바치려고 한 것이 들통이나 처형되었다. 그는 죽기전 시민들이 모인 광장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였지만 이반 4세는 그가 해명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안드레이 표도로비치 제리아 알렌킨(? ~ 1570)
리보니아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으로 체르니코프, 샤츠크, 토로펫의 총독을 차례대로 지냈다. 그는 한 때 카잔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어 다시 샤츠크의 총독이 되었고 크림 칸국 주변의 돈 요새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이반 4세는 그를 죽이기 위해 돈 요새로 오프리치니크를 보냈지만 이미 그는 전쟁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한 뒤였고 대신 이반 4세는 부하들에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아내는 어찌되었는지 불분명하나 이반 4세는 알렌킨의 아이들을 굶겨 죽였다.
알렉세이 다닐로비치 바스마노프(? ~ 1570)
노보고로드 총독을 지낸 보야르. 그는 이반 4세의 편에서 슈이스키 가문을 몰아내는데 크게 일조하여 엘라트마, 포브릭의 총독을 차례로 지냈다. 그는 1555년에 7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 서 크림 칸국의 6만 대군을 격파한 공으로 이듬해 보야르가 되었다. 그는 이반 4세의 측근으로써 오프리치니크를 만들 것을 제안한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모스크바 대주교 필립을 추방하는데도 선두에 선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도 오볼렌스키와 같은 이유인 폴란드 왕 지기스문트 2세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는데 이반 4세는 아들인 표도르 바스마노프에게 아버지를 직접 찔러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는 아들에 의해 칼에 찔려 숨졌다.
표도르 알렉세비치 바스마노프(? ~ 1571)
아버지와 함께 오프리치니크로 활약했던 사람으로 라잔에서 카잔 칸국을 격퇴하는 공을 세워 귀족반열에 올랐다. 그는 오프리치니크들 중에서도 잔악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동료들을 데리고 공의회를 집전하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필립을 끌어내려 그의 의복을 모조리 벗기고 마차에 태워 수도원으로 끌고갔기 때문이다. 그의 최후는 위의 아버지에서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반 4세는 두 부자를 나란히 반역혐의로 감옥에 가두고서는 아버지와 아들 중 한 사람이 나머지를 칼로 찔러 죽이면 칼을 찌른 자는 용서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표도르 바스마노프는 이반 4세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칼을 들고 아버지를 직접 찔러 죽였는데 이반 4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아들인 표도르 마저 죽여버렸다.
노보고로드 대주교 피멘(?~1571)
이 사람은 이반 4세의 측근이었다. 그는 때로는 이반 4세의 명령으로 성당이나 수도원을 건립하기도 하고 이반 4세의 껄끄러운 외교적인 문제에서는 고위성직자로써 나서 대신 해결해주기도 하였다. 오프리치니크의 창설에 찬성했고 무엇보다도 총대주교 필립을 고발해 재판정에 세우고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서 끌어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도 노보고로드 대학살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이었던 지기스문트 2세와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 써 수도자로 강등당했고. 일설에는 그냥 죽었다는 기록과 달리 오프리치니크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두 설이 있는데 노보고로드 학살 당시 대주교였던 만큼 이반 4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반 페트로비치 야코블레프(? ~ 1571)
이반 4세 때의 사령관. 그는 리보니아 전쟁 당시에 이반 4세가 요구한 사항들이나 러시아 군사들의 잔혹한 행동들이 리보니아의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이반 4세에게 대놓고 반대하였는데 리보니아 전쟁에 함께 참여한 지방의 총독들이 그를 고발하는 바람에 이반 4세의 명령으로 모스크바로 끌려왔고. 왕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본인의 남동생과 함께 처형당했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템킨-로스토프스키와 그의 아들(? ~ 1572)
라잔 총독을 지낸 러시아의 귀족. 오프리치니크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1568년에 보야르가 되면서 오프리치니크 안에서도 상당히 높은 출신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1571년에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를 침공하자 지휘관으로써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반 4세의 신임을 잃고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미하일 야코블레비치 모로조프(? ~ 1573)
리보니아 전쟁에 참여한 귀족. 1549년에 보야르가 되고 리보니아 전쟁에서도 공을 세웠고 모스크바를 크림칸국이 침공한 1571년에도 공을 세워 연대 사령관 직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유도 없이 1575년 여름에 아내와 아들들과 압송되어 모스크바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레프 안드레비치 살티코프(? ~ 1573)
카잔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 그는 카잔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1552년에 오콜니치. 1562년에 보야르가 되었다. 그는 1565년에 반역혐의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힌 적이 있는데 그는 겨우 충성맹세를 하고 많은 돈과 보물을 지불해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오프리치니크가 탄생하자 오프리치니크가 되어 노보고로드 대학살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이반 4세는 그의 신임을 박탈하고 세르지오 라브라 수도원으로 보내 수도자로 만들어버렸고 2년 뒤에 그를 처형하였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콜리체프(? ~ 1575)
이반 4세 때의 인물. 그도 이반 4세의 친정 시기에 등장하였는데 초기에는 지방의 총독으로 임기를 시작하였다가 후에 리보니아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 역시 야코블레프와 더불어 이반 4세의 명령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최고 지휘관급은 아니었기에 처벌은 면하였다. 그는 이후 크림 일대에서 일어난 반역사건을 조사하는데 투입되었다. 이반 4세의 5번째 아내인 안나 바실치코바의 결혼식에도 참여한 그는 갑자기 1575년 그해에 실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세르지오 라브라 성당에서 자신이 전쟁 내내 죽인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는 기도를 하다가 이반 4세에 의해 처형당해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이반 안드레비치 부툴린(? ~ 1575)
리보니아 전쟁에 참여한 귀족으로 1565년에 프스코프 총독이 되고 1567년에 보야르가 되었다. 그러나 1575년에 이반 4세의 신임을 잃어 처형당했다.
노보고로드 대주교 레오니드(? ~ 1575)
피멘의 뒤를 이어 노보고로드 대주교가 된 인물. 그의 초기 행적은 알 수 없다. 1567년에 노보고로드 유리예프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고 이듬해에는 추도프 수도원장으로 옮겼다. 그는 피멘이 노보고로드 대주교에서 쫒겨나 살해당하자 그의 뒤를 이어 노보고로드 대주교가 되었는데 오프리치니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교회를 오프리치니크에게 예속시키려고 들거나 친 이반 4세 정책을 펴 많은 성직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그는 1575년에 반역혐으로 다른 귀족들과 기소되어 죽임을 당했는데 일설에는 모스크바로 압송되던 도중 쓰러져 죽었다는 설과 곰가죽을 뒤집어 쓰고 사냥개들에게 물려 죽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보리스 다비도비치 툴루포프(? ~ 1575)
역시 카잔 전쟁, 리보니아 전쟁에 참여했던 오프리치니크 사령관이자 귀족. 그는 카잔 전쟁과 리보니아 전쟁을 거쳐 오프리치니크를 이끄는 사령관이 되었는데 오프리치니크 폐지 이후에도 이반 4세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이후 보리스 고두노프와 영지를 두고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가 그에게 패배하여 모함을 당해 이반 4세의 신임을 크게 잃었고 두 아들 및 친척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영국의 외교관이었던 제롬 홀시에 따르면 툴루포프의 어머니는 감옥의 간수에게 처참히 강간되었다고 한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텔랴테프스키(? ~ 1579년 이후)'
리보니아 전투에 참가했던 귀족 1562년 폴로츠크 공성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579년 폴로츠크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버렸다. 역사서에서는 이반 4세의 사후에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또 다른 기록에는 폴란드와 평화가 체결되자 해방되었으나 모스크바로 돌아오자 이반 4세는 그를 포로로 잡혔던 사실에 분노하며 부하를 시켜 그를 물에 빠트려 죽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엘리세우스 보멜리우스(1530년경 ~ 1579)
신성로마제국 베스트팔렌주 베젤 출신의 점성술사이자 마술사. 그의 부모는 원래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에 이주해서 살다가 영국 주재의 루스 차르국 대사인 안드레이 그레고리비치 소빈의 소개로 이반 4세의 주치의가 되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이반 4세는 그를 신임해 많은 보물을 주기도 했고 보멜리우스 자신이 권세를 이용해 착복한 재산도 있었는데 이는 그의 고향인 신성로마제국 베젤로 옮겨졌다. 그가 만든 사악한 독약들은 많은 귀족이나 성직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폴란드, 스웨덴 왕과 내통한 것이 들통나 고문을 받다가 사실을 자백해 처형되었고 그의 아내는 끝내 돌아가지 못하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요청으로 이반 4세의 사후 겨우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1] 단순히 수도원장급이 아니라 대주교, 주교급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