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乾祐당나라의 관료로 경조(京兆) 장안현(長安縣) 출신.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아들인 이소덕의 열전을 통해 그의 행적이 언급된다.
2. 생애
농서 이씨(隴西李氏) 단양파(丹楊派) 출신으로 정관(貞觀) 연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역임했다. 당시 유현령(鄃縣令) 배인궤(裴仁軌)가 문지기를 사적으로 부리자 태종이 이건우를 참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건우는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법령은 위로는 폐하께서 다스리는 것이자 아래로는 온 땅이 따르는 것으로 천하와 함께 하는 것이지 폐하께서 독차지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인궤가 가벼운 죄를 범했는데 극형을 내리는 것은 일률적인 다스림과 어긋나는 일입니다. 형벌이 부당하면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게 됩니다. 신이 헌사(憲司)를 더럽힐 수 있어서 감히 제칙을 받들 수 없습니다.
이건우의 상주를 받은 태종은 노여움이 풀렸고 배인궤를 면직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이후 시어사(侍御史)로 전임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하자 무덤 옆에 오두막을 세우고 흙을 지고 무덤을 쌓았으며 태종은 사람을 보내 이건우를 위로하고 그의 집안을 표창하였다. 이건우는 장안현령,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를 역임하며 유능한 명성이 있었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발탁되었다.
이건우는 중서령(中書令) 저수량과 사이가 나빠서 나중에는 저수량에게 참소를 당해서 영휘(永徽) 연간에 형주(邢州), 위주(魏州) 등의 자사로 전출되었다. 이건우는 비록 강직하고 재간이 있었으나 소인배들과 어울렸고 외군으로 전출되었을 때는 영사(令史)와 벗을 맺어서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정을 염탐하도록 했다. 뒤에 이건우는 자신의 친구에게 고발을 당하여 애주(愛州)로 유배되었다.
건봉(乾封) 연간에 계주(桂州) 도독으로 기용되고 형부상서(刑部尙書)[1]으로 임명되었다. 이건우는 경조(京兆) 공조참군(功曹參軍) 최탁(崔擢)을 상서랑(尙書郞)으로 천거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자 최탁에게 몰래 이야기를 했다. 뒤에 최탁이 죄를 저지르면서 이건우가 궁중의 이야기를 누설한 일을 고발했고 이건우는 죄를 받아 면직되었으며 머지않아 죽었다.
[1] 용삭 연간(661년 ~ 663년)부터 사형태상백(司刑太常伯)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