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6 01:19:11

유육유칠의 난

1. 개요2. 발생배경3. 전개

1. 개요

1510년에 중국 명나라에서 유육(劉六), 유칠(劉七) 형제가 일으킨 농민 반란. 뇌물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서 '뇌물의 난'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이 용례는 한국 인터넷에서만 발견되어서 검증이 필요하다.

2. 발생배경

경제사회적으로는 명나라가 전부터 유지해온 마정(馬政), 즉 말 관련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나라의 주적은 북방의 북원으로, 북원과 싸우기 위해 기병을 육성할 필요가 상시 존재했다. 명나라는 이를 위해 화북 지역 백성들을 마호(馬戶)로 지정하여 말을 키우도록 강제로 할당했다.

이 마호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국가가 할당한 수 만큼 말의 수를 늘이지 못하거나 말을 돌보지 못해 죽으면 말의 값을 국가에 배상해야 했다.

어렵지 않아보이지만, 명은 평화가 오래 계속되자 인구가 늘어 각 호가 보유한 토지의 수는 갈수록 줄었는데, 명은 인구가 늘었으니 마호로 지정할 수가 늘었다며 마호를 더 늘여서 한 가구가 부담하는 양이 갈수록 더 늘었다는 것이 엄청난 문제.

이에 마호들은 의무를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가지고 튀어서 도적이 되기 시작한다. 이런 도적들을 향마도라고 한다.

여기에 명 정덕제가 즉위 후 국정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정덕제가 총애한 환관들이 팔호가 국정을 농단하며 문제가 커지기 시작한다.

3. 전개

난의 주역인 유육, 유칠 형제는 처음엔 관군과 협력해 이 도적들을 토벌하는 포쾌로서 활동했다. 그런데 유육, 유칠 형제가 도적을 잡아 포상을 받게 되자, 환관 유근의 부하 양홍이 형제들에게 뇌물을 요구한다.

유육, 유칠 형제는 양홍을 만족시킬 뇌물을 준비할 수 없어 거절했고, 양홍은 이에 앙심을 품고 형제가 포쾌로 위장하여 실제로는 향마도로 활동하고 있다고 무고한다. 결국 형제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뭐라도 하자고 정말로 반란군을 일으켜 명나라 조정에 대항했다.

형제는 다른 향마도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넓혔고, 상당히 세력을 넓혀 한때는 하북ㆍ산동ㆍ하남 지역이 반란군 세력권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들 대부분은 향마도 출신이기 때문에, 말을 타고 빠르게 기동할 수 있어서 근거지를 만들지 않고 계속 이동하여 관군을 애먹였다.

반란군은 세력이 커지자 둘로 나뉘어 유육 형제가 이끄는 무리는 하북과 산동 방면에서, 양호(楊虎)ㆍ유삼(劉三)이 이끄는 무리는 하남 방면에서 활동했다. 하남의 반란군은 지식 있는 자들의 조언을 받아 조직이나 정책도 명확하고 규모도 컸지만 정예가 부족했다. 그래서 명나라 관군이 변경의 방위군을 충당하여 군세를 늘린 뒤 공격하자 괴멸하고 말았다.

결국 난을 일으키고 3년이 지나 1513년 7월에 양자강 하류 낭산에서 관군에게 괴멸당하여 난이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