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상(작가)의 시, 1934년 7월 19일 조선일보에 기재되었다.2. 전문
운동 이상 일층 위의이층 위의삼층 위의옥상정원에를올라가서 남쪽 을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북쪽을보아도 아무것도 없길래 옥상정 원아래 삼층아래 이층아래 일층으로 내려오니까 동쪽으로부 터 떠오른태양이 서쪽으로져서 동쪽으로떠서 서쪽으로져서 동쪽으로떠서 하늘한복판에와있길래 시계를 꺼내어보니까 서 기는섰는데 시간은맞기는하지만 시계는나보다나이 젊지않으 냐는 것보다도 내가 시계보다 늙은게아니냐고 암만해도 꼭그 런것만 같아서 그만나는시계를 내어버렸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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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箱
일층(一層)우에있는이층(二層)우에있는삼층(三層)우에있는옥상정원(屋上庭園)에올라서남(南)
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北)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상정원(屋上庭園)밑에있는삼층(三
層)밑에있는이층(二層)밑에있는일층(一層)으로내려간즉동(東)쪽에서솟아오른태양(太陽)이서(西)
쪽에떨어지고동(東)쪽에서솟아올라서(西)쪽에떨어지고동(東)쪽에솟아올라서(西)쪽에떨어지고동
(東)쪽에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時間)은맞
는것이지만시계(時計)는나보담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담은나는시계(時計)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
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時計)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3. 해설
당시 <조선 일보>에 김기림이 연재하고 있었던 [현대시의 발전]이라는 평문 가운데에 출처 표시도 없이 별도의 글상자 속에 담겨져있다.시의 텍스트는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져 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과정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감지하게 됨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시적화자는 1층에서 3층 옥상을 오르내리면서 동서남북의 방향을 헤아려 보고 태양의 고도와 움직임의 방향을 가늠해 본다. 그리고 태양이 하늘의 한복판에 와 있는 순간에 자신의 위치를 헤아려 보게 된다. 공간 속에서 고도(상하), 위도(남북), 경도(동서)라는 세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려 한다. 인위적인 시간으로서의 '시계'의 대한 거부가 인상적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항구 불변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 역시 이러한 관점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감상포인트는 시인의 기하학적(幾何學的) 상상력을 이해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이 작품에서 근대적 건물인 ‘백화점’을 추상적인 기하학적인 관점 속에서 파악하여 시간과 공간의 현대적 느낌을 제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는 기존의 전통 서정시 개념으로만 보면 대단히 낯설고 난해하게 느껴진다. 기하학은 건축의 기본을이루는 학문으로, 이상이 건축가였다는 전기적 사실은 이 시가 이러한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러한 기하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된 또 다른 작품으로는 「건축무한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가 있다.
이 시에는 근대적 도시 공간의 상징으로 제시되는 ‘백화점’이라는 건축물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시적 화자의 거부와 부정이 나타나 있다. 즉 단순한 반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건축물이라는 화자의 공간인식은 바로 근대 문명이 이루어 낸 건축물 역시 규격화와 동일화로 빚어진 무의미한 것일뿐이라는 공간감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물을 둘러싼 공간을 서술하는데에도 ‘동서남북’이라는 방위개념이 필요할 뿐이다. 화자는 이제 그 같은 공간 인식을 바탕으로 옥상정원까지 올라가는 반복 운동도 없다. 이렇게 문명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된 화자는 다시 1층으로 오는 반복 운동을 해 보지만, 그의 의식속에 떠오르는 것은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떨어진다는 무료한 반복의 일상일 뿐이다. 이렇게 이 시의 전반부는 근대의 규격화된 공간을 상징하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하여 그곳을 아무 의미 없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단순한 반복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후반부는 근대의 규격화된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를 중심으로 하여 그 같은 시간속에서라도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화자의 의식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옥상정원을 오르내리거나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는 행위는 동적(動的)인 것이지만, 서서 시계를 꺼내 보는 행위는 그러한 움직임이 정적(靜的)인 상태로 바뀐 것이자, 반복적인 동작만으로 영위되는 시간의 삶을 측정해 보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시간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는 시계가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이긴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측정할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자,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시계를 ‘내동댕이쳐버’린다. 그것은 기계적이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시계의 움직임만으로는 삶의 다양한 측면을 측정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행위이자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반복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온 시계는 이미 ‘늙은’것이자 생명이 없는 것으로, 부정하고 싶은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시계를 내동댕이치는 행위는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요, 나아가 자신의 젊음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이에 화자는 ‘나는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는 항변을 통해서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운동만을 강요하는 근대에 대한 저항의지를 그러내는 한편, 비록 규격화된 시공간 속에서라도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의식의 단면을 표출하는 것이다. 근대의 표상으로서의 도시는 공간과 시간을 규격화함으로써 운영된다. 그러므로 규격화된 건축물과 규격화된 시계는 모든 사람들이 규격화한 표준에 맞춰 살아가도록 현대인의 삶의 방식을 규격화하고자 한다. 또한 규격화된 현대적 삶은 현대인들로하여금 반성적 인식능력을 저하시키거나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기계적 인간 군상(群像) 속으로 자신을 함몰시킴으로써 결국은 자기의 정체성 마저 상실하게 한다. 따라서 규격화된 시공간 속에서 단순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현대인의 삶이야말로 파괴해야 할 것임을 깨닫고 시계를 내동댕이치는 시적 화자의 행동을 곧 1930년대를 치열하고 의미있게 살고자 했던 이상의 의식 세계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