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6:20

왕준명

1. 개요2. 생애3. 기타4. 매체

1. 개요

王濬明
생물년 미상.

고려의 문신. 최종관직은 내시낭중.

2. 생애

희종 7년 신미년 해인 1211년 12월에 최충헌을 암살하기 위해 참정 우승경, 추밀 사홍적, 장군 왕익과 주도하여 그를 수창궁으로 불러들였다. 미리 잠복시켜둔 내시와 승려들을 동원하여 최충헌의 시종들을 먼저 제거하고 최충헌마저도 척결하려고 하였으나 최충헌이 희종이 있는 곳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희종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최충헌은 정3품 지주사 방의 장지 사이에 숨었고 이를 승려들이 계속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하였고 최충헌의 군사들이 난입하여 진압함으로써 최충헌 암살에 실패했다.

거사 실패 후 유배형에 처해지고 희종 또한 폐위되었다. 그 후 행방불명.
“내가 어질고 관대하지 않았다면 왕의 부자가 목숨을 보전하여 오늘날까지 이를 수 있었겠는가? 왕준명을 생각하면 나로 하여금 머리털이 모두 곤두서도록 한다.”
고종 2년, 을해년해 1215년 8월
최충헌은 후에 수창궁 사태에 대해서 엄청난 분노를 가졌음을 표출한다. 그만큼 최충헌에게 큰 변고로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3. 기타

왕광취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같은 왕 씨 성, 왕과 근접한 사이인 내시였다는 직책, 무신에게 저항했다가 실패했다는 부분 등 전체적으로 비슷하다.

4. 매체

  • 무인시대

    • 파일:무인시대 왕준명.jpg

      배우는 남영진.
      신종, 희종 대의 대전 환관. 희종을 태자일 때부터 보필하는 인물이다. 태자 시절 최충헌 형제 이간책에서 최충수에게 사주단자와 조작된 밀지를 전하거나, 최충헌 암살을 위해 동천이라는 인물을 불러올리는 등. 희종을 폐위시키고자 무장한 병력을 이끌고 대전에 들어온 최충헌을 막아 서다, 최우에게 폭행을 당하고는 병사들에게 끌려나간다. 최후는 명확히 나오지 않으나 아마 사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희종 폐위 이후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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