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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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塩山市

일본 야마나시현 북동부 지역에 있었던 정으로, 2005년 11월 1일에 히가시야마나시군 카츠누마초, 야마토무라와 합병되어 코슈시가 되었다.

'엔잔'이라는 명칭은 당시 시 남서부에 위치한 시오노야마에 유래되었으며 고대 시대부터 갑으로 유명한 야마나시시와 함께 명승지로 알려졌다.

산간 지방을 중심으로 승석문 시대 때 나온 고고 유적지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전반기 말에는 시시노마에 유적을 비롯해 중반기 때 나온 시모아오노의 안도지 유적과 나카하기하라의 쥬로하라 유적, 카미하기하라의 도노바야시 유적에서 출토된 깊은 용기 형식의 토기는 뛰어난 미술품으로 중요문화재에도 지정되었다.

야요 시대 및 고분 시대에는 촌락지 분포가 산간 지방에서 선상지로 옮겨졌고, 야요 말기 때부터 고분 시대 전반기 때 니시다 유적에서 촌락지 터 등이 검출되었다. 고후 분지에서 고분 축조가 전반기 때 분지 남부 소네 구릉 지역에서 전개되어 후반기에 각 분지에 고분 축조가 확산되었지만, 명확한 고분은 발견되지 못했다.

고대 율령제 때는 야마나시군에 속해 있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야마나시히가시군으로 비교가 되었다. 헤이안 시대 때의 촌락 터전은 산간 지방이나 오모 강변 오른쪽을 중심으로 분포된 오오키도 유적 등이 있다. 히가시군 지역은 고대 카이국에서 관리인으로 세력을 지녔던 고대 호족 사이구사 가문의 세력을 기반으로 신사 등에 사이구사 가문과 관련된 전통 승계가 남겨저 있다.

헤이안 시대 후반기 때는 고후 분지 각 지역에 장원이 세워졌지만, 목초 장원이 후지키 및 오야시키에서 구 마키오카 지역에 이르는 곳에도 세워졌고, 카이겐 가문의 일족 중 한명인 야스다 요시사다가 목초 장원을 본거지로 삼고, 후지키에 호코지를 건립했다. 이후 요시사다를 포함한 카이겐 가문의 일족들은 겐페이 전쟁에서도 활약을 펼쳤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숙청으로 야스다 가문은 몰락했고, 고대 호족들과 사이구사 가문의 족보를 물려받은 오조 가문이 세력을 갖추었다.

오래된 사찰이 많고, 카마쿠라 시대 후반기 때인 1330년에는 목초 장원의 주인이었던 니카이도 사다후지가 무소 소세키를 청하고 에린지를 건립했다. 1380년에는 타케다 가문의 사찰 소유지에 기부하고 밧스이 도쿠쇼가 건립한 코가쿠지가 있다.

에도 시대 전반기에는 막부직할령과 이타미 가문의 도쿠미 번령과 하타모토령에 속했던 모든 마을이 있다. 1705년에는 모든 마을이 고후 번령이었고, 야나기사와 영주 가문 시대 때 지분된 고후 신덴 번에 속한 마을도 있었다. 1724년에는 카이 일국이 막부 직할령이 되면서 모든 마을이 이사와 관직 대리가 지배하게 되었고, 고산쿄 령 가운데 타야스 가문령이나 시미즈 가문령에 속한 마을과 고후 관직 대리로 옮긴 마을도 있었다.

생업은 지리적인 특징 때문에 북부 지역은 밭 농사가 중심이었고, 남부 지역은 벼 농사가 중심이었다. 그 외에 히가시군 지역에서 한창이었던 양잠과 하기하라 담배, 그리고 감 같은 과수 재배도 진행되었다. 또 하기하라산 입회지에서 생계를 꾸리는 일이 진행되었고, 쿠로카와킨잔(黒川金山)에서 채취하는 일은 근세 초반까지 진행되었다.

에도 시대 때 정비된 코슈 가도 외에 오메 가도와 치치부 가도 등 무사시국으로 통하는 가도가 개통되었고, 직소 설치 외에 부역을 맡은 마을들도 있었다. 또 에도 시대 때 카이국에서는 대규모 무장 봉기가 일어났지만, 1792년에 일어난 후토마스 소동은 지역 모든 마을 사람들이 참가했었고, 1836년에 일어난 텐포 운동에서 몰려든 무장 세력들이 갖가지를 때려부수며 피해를 받았다.

1872년, 세법 폐지를 상대로 반대한 마을 24곳의 주민들이 야마나시현청에 진압을 하고 나서 주모자가 단죄를 받은 다이쇼기리 운동이 일어났다.

1875년에는 후지무사 시로가 주도한 오메 가도의 개수 공사로 인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그대로 다이보사츠 고개길을 넘는 대신 야나기사와 고개길이 새로 개발되었다. 메이지 시대 때는 양잠업이 진흥되었고 1903년에는 츄오 본선의 엔잔역이 개업되자 누에고치 시장으로 발전되었고, 코슈 가도와 카츠누마슈쿠의 역참으로 번창했던 카츠누마 대신 히가시야마나시군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1881년 임야 민유 구분으로 인하여 하기하라산이 몰수되자 양잠의 주요 목재수요가 있었고, 난벌이나 도벌 등의 인적요인으로 임야가 황폐되었다. 1907년에 발생한 엄청난 수해로 오모 강 유역에서 둑이 무너졌고, 막대한 피해가 나왔다. 소작지률이 높고 양잠업으로 인해 지원받은 소작인이 성립되어 있었지만, 1920년에 서리 해로 일어난 시치리무라의 시모오조농민조합 투쟁은 모든 현에서 소작 쟁의로 발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뒤에는 양잠업이 쇠퇴한 반면 포도 등의 과수 재배가 증가되었고 다이보사츠 고개와 같은 자연적인 자원, 타케다 가문과 관계된 고찰이나 사적 등 역사적인 자원을 이용한 관광업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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